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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국방과 관련해 무엇이든 질문하면 답변하는 형태의 연재물을 제안했어. 오케이. 해서 앞으로 금요일마다 연재할 거야. 질문 목록을 보고 써둔 원고가 조금 있는데 사실 난 사람들이 뭘 궁금해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어. 세상에 고수도 많은데 굳이 나까지 뭘... 이런 기분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국방 혹은 국방에 관련된 역사라면 무엇이든 궁금한 점을 댓글로 달아줘. 열심히 메모해두고(뭐 편집부가 해주겠지) 썰 한 번 풀어볼게. 

 

일단 내가 선택한 첫 질문은 이거야.         

 

 

세계 최강의 용병 부대는?

 

 

1. 

역사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용병부대들의 이름이 떠올라. 좀 많은 게 아니라서.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프랑스 외인부대나 네팔의 구르카 용병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이들보다 유명한 부대들이 ‘꽤’ 많아.

 

까놓고 말해서 인류 역사상 용병이 없었던 시절은 없었어. 3~40대 아재들이 초딩 시절 TV에서 봤던 <에어리어 88>이란 만화영화의 모티브가 된 게 그 유명한 ‘로디지아 용병’들이었어. 전 세계의 특수부대 출신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흑인들을 도륙했지(로디지아란 나라는 사라지기 전까지 남아공과 함께 아파르트 헤이트를 실천했던... 좀 ‘뭣 같은’ 나라였어. 결국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로 이름을 바꾸고 흑인들의 나라가 됐지만... 역시나 거기서 거기인 상황이 됐지).

 

지금은 어떨까? PMC(Private Military Company)라고 이름을 바꿨지만, 하는 일은 용병이잖아? 민간군사기업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전쟁의 외주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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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 용병

 

거두절미하고,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하고, 내가 꼽는 최고의 용병은 ‘스위스 용병’이야. 이건 전투력과 같은 객관적인 측면을 떠나(스위스 용병이 한때 세계 원탑을 찍은 적도 있긴 있어. 냉병기 시절... 그러니까 창과 칼로 싸우던 시절에는 유럽 최강을 말했어. 스위스 용병을 이겨보겠다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언 1세가 만든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와의 대결구도는 흥미진진하지) ‘정서적 측면’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아, 스위스 용병을 무시하는 건 아냐. 그들은 중세를 지배했고, 이 덕분에 용병의 대명사가 됐고, 오늘날 ‘용병’이란 개념을 정착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존재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위스는 정밀기계공학 이전에 ‘용병’으로 먹고 산 나라야. 스위스를 봐봐. 알프스는 물론 아름답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땅이야. 이 곳에서 이들이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은 게 용병이었어.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위스는 200만 명 이상의 용병을 유럽에 제공했어(이런 전통 때문인지, 지금도 스위스는 세계 유수의 PMC 본부들로 득실거린다. 중립국이란 정치적 안정성과 용병의 전통 때문인지 PMC들은 스위스 땅에 둥지를 틀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가 아사다 지로(淺田次郞)의 ‘칼에 지다’야. 어지간한 이야기에는 감정이입을 잘 하지 못하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었지. 주인공인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신선조에 들어가 칼을 휘둘러. 

 

(가족들을 위해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고, 이걸 가족들에게 보내고... 무사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린 모습이지만, 최후의 순간 요시무라 칸이치로는 무사로 죽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마지막 남은 무사의 자존심이랄까?)

 

내가 왜 스위스 용병을 좋아하는지, 어째서 이들을 최강의 용병집단으로 선정했는지 어렴풋이 감이 오지? 물론, 그렇다고 스위스 용병이 ‘최강’과는 거리가 있다는 소리는 아냐. 몰락하긴 했지만, 한때 최강을 찍긴 했으니까. 

 

 

2. 

중세 시대 최강의 무력은 말탄 기사였어. 기병의 돌격은 오늘날의 탱크 돌격과 같다고 볼 수 있었지. 이 기사들을 보병만으로 무력화 시킨 게 스위스야. 스위스 독립 전쟁 당시의 모르가르텐 전투를 보면, 오스트리아 기사단 2천 명을 포함한 9천의 대군을 스위스 보병 1천 3백 명이 도륙을 냈어. 한국 역사로 대입해 보면, 명량해전 같은 일이 벌어진 거야. 스위스 남자에게 할버드를 쥐어주면, 그 앞에 있는 적의 목은 떨어졌다고 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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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용병과 할버드

 

맹위를 떨치던 스위스 용병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면서 일순간 몰락했어. 스위스 용병의 ‘짝퉁’이라 할 수 있는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 용병(감정이 섞여있는 걸 용서해 주길 바래)과 진검 승부를 벌이게 돼. 바로 비코카 전투지.

 

이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군이 구축한 방어선에 묻지마 돌격을 했고, 덕분에 3천 명의 병력은 포탄과 총알을 뒤집어 쓰게 되지. 뒤이어 벌어진 파비아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스위스 용병은 박살나(이때는 고용주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도 붙잡히게 돼).

 

(당시 최신무기였던 ‘화약병기’가 전장에 등장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자신들의 전통인 장창을 놓지 않았어. 이게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었지. 스위스 용병이 총을 손에 잡은 건 17세기 무렵이었지. 이 정도면 이걸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전통이라고 해야 할지...)

 

이 두 번의 패배로 스위스군의 이미지는 급격하게 흔들렸지. 이때까지 스위스 용병들의 이미지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 무적의 부대

둘째, 고용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이였어. 놀라운 건 패배로 인해 ‘무적’의 타이틀을 잃었지만, ‘충성’이라는 또 다른 이미지만은 끝까지 지켜냈다는 거야.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 용병을 앞세운 신성로마제국은 바티칸까지 밀고 들어와. 그리고 이어지는 약탈!!

 

이때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189명의 스위스 용병 근위병들은 죽음으로 신성로마제국군을 막아내. 클레멘스 7세가 비밀통로를 통해 도망갈 때까지 147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죽음으로 길을 막아.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용병들은 끝까지 교황의 안전을 지켜냈어. 이후 로마 교황청의 유일한 군대로서 교황을 호위하는 임무는 스위스 용병만이 맡는 걸로 선포돼(어쩌면 너무 당연한 결정이지. 이 정도의 로열티를 보여줬는데... 미안해서라도 독점권을 줘야지).

 

(지금도 바티칸에서 교황을 경호하는 건 ‘스위스 용병’ 뿐이야. 스위스는 1927년 공식적으로 용병금지법을 제정했는데, 이때 걸린 게 바티칸 경비였어. 스위스는 이 영광스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스위스 근위대’ 만을 예외로 뒀는데, 이들이 ‘용병’ 인 건 아니야. 법적으로 이들의 신분은 군대가 아니라 ‘경찰부대’ 의 형태로 정리됐지. 이들은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147명의 용병들이 전사했던 5월 6일을 기념하기 위해 새 근위병들은 이날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현장에 배치돼).

 

교황의 호위를 독점적으로 맡게 된(500년이 넘게 독점하고 있지) 스위스 용병들은 그 이름값을 지켜내지. 1798년 나폴레옹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도 스위스 용병들은 당시 교황이었던 피우스 6세를 위해 거의 전멸하다시피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로마로 진격하던 찰나 스위스 용병들은 죽음으로 바티칸 진입을 막아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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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런 교황과의 인연도 재미있지만, 스위스 용병들을 설명할 때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역시 프랑스 대혁명이지.

 

이 당시 스위스 용병의 가장 큰 물주는 ‘프랑스’였어. 루이 14세 시절에는 프랑스군 전체 병력의 1/3이 스위스 용병일 정도였지(이 당시 프랑스 정규군 숫자가 30만 명 수준이었는데, 이 중 12만 명이 스위스 용병이었어).

 

이들 중 가장 유명했던 게 ‘레드코트’(영국군 아님!)를 입은 스위스 근위대였어.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 왕실에 고용됐던 거야. 왜 그런 걸까? 간단해.

 

“스위스 용병은 배신하지 않는다.”

 

란 이유였어(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이들 스위스 근위대가 다시 한 번 그들의 충성심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야.

 

분노한 파리 군중들이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 왔을 때 루이 16세를 지키던 프랑스군 근위대들은 다 도망갔어. 이때 끝까지 루이 16세의 곁을 지켰던 이들이 스위스 근위대였지.

 

이 당시 파리 군중들은 스위스 용병들에 대해선 별 감정이 없었어.

 

“너희들 돈 벌려고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는 거 안다. 너희들한테 감정 없다. 안전은 보장해 줄테니 돌아가라."

 

스위스 용병들은 이에 응하지 않았지. 심지어 고용주인 루이 16세가,

 

“이만하면 됐다. 설마 나까지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너희들은 돌아가도 좋아.”

 

라고 했음에도 끝까지 루이 16세 옆을 지켰고(단, 1명의 이탈자도 없었어), 전멸해.

 

1792년 8월 10일날 일어난 일이지. 이때 튈르리 궁에서 죽은 스위스 용병의 숫자는 786명이었어.

 

스위스 루체른에는 이때 전사한 용병들을 기리기 위해 상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빈사의 사자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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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이유가 뭘까? 간단해. 만약 자기가 도망을 간다면, 자기 가족들과 후손들은 더 이상 용병으로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거야(가족을 볼모로 목숨팔이를 한다고 해야 할까?). 척박한 알프스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용병으로서의 삶 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이들은 ‘스위스 용병’이라는 브랜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버렸던 거야.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먹먹함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야.

 


 

편집부 주

 

독자들의 격렬한 요청에

생각비행 출판사가 마지못해 굴복, 

펜더의 인기 연재물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가 단행본에 이어

합본으로 나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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