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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Don't do that

 

깊은 밤, 크리스마스를 맞아 방송되는 <러브 액츄얼리>를 보았습니다. 따뜻한 영화지요. 덕분에 제 마음의 온도도 1도쯤은 올라간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기분도 좋았지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습니다.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를 재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는 드라마랍니다. 저 역시 본방사수는 힘들어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습니다.

 

과장되고 작위적인 배경과 상황들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드라마는 재미있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정확히는 입시)에 몰입하고 매달리는 상위 0.1% 부모들의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과장이야 당연히 있겠지요. 수십억의 돈과 온갖 정성을 쏟아가며 자식을 서울대 의대(최고라는 상징이지요)에 합격시키고자 하는 부모들. 자신과 아이들을 통해 서로에게 경쟁심을 갖는 부모들의 시기와 질투. 그런 부모들 아래서, 어쩌면 그 부모들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독한 어른으로 성장해 갈 것 같은 아이도 등장합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하지만, 재미가 있어서 봅니다. 혀를 차면서도 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부자 주인공들의 몸에 밴 선민의식과 특권의식을 봅니다. 또한 그에 못지않은 가식과 위선도 봅니다. 그들이 수시로 드러내는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민낯으로 보여주려 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결국 욕하면서 몰입해 보는 재미랄까요. 막장드라마의 열혈 시청자인 제 모친의 마음을 이해할 듯도 싶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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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전화기를 가지고 놀다가, <오마이뉴스>의 기사 한 꼭지를 보았습니다. 합정역 앞의 이름난 곳. 최근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는 메세나폴리스란 주상복합 아파트의 이야기였습니다. 마침 며칠 전 새벽 그곳에 고객의 차를 운전하고 간 기억이 있어서, 눈길이 갔습니다.

 

그 아파트는 꽤나 비쌉니다. 평형에 따라 15억에서 30억쯤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새벽, 거대하고 복잡한 주차장과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맘먹고 제대로 폼 나게 지은 아파트 같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솔직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자의 말처럼, 밖에서 보면 아파트를 마치 성처럼 지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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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마이뉴스(링크)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길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지금 건물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잖아." "우리는 화물이 아니고, 손님은 귀족이 아닙니다." 이 두 마디의 말로 기사를 압축할 수 있습니다. 뒤의 말은, 그곳 아파트 앞에 선 몇몇 배달노동자들의 목소리입니다. 그곳의 입주민들을 향해 아파트 앞에서 펼친 플래카드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앞의 말은, 현장에 나온 일부 입주민들의 목소리입니다. 배달노동자들 앞에 마주 선 채 어서 물러가라고 외치는 내용입니다. ‘건물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고 꺼지라는군요.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메세나폴리스의 입주민들이 배달노동자들에게 주민용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게 했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워진다는 그런 이유들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배달음식을 아예 안 먹고살기는 힘들겠지요. 결국 내린 결론이, 배달노동자들은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라고 했다는 겁니다. 불가촉천민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에 분노한 배달노동자들 몇 분이 그 아파트 앞에 가서 플래카드를 펼쳐든 채 시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화물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대해주세요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아파트 주민들 몇몇이 배달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내려왔겠지요. 그리고 했다는 말이 저 위의 문장입니다. "당신들이 지금 건물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잖아." 건물의 명예... 세상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웠나 봅니다. 자신들의 집값이 떨어질까 걱정이 되는 거지요. 건물의 명예 운운하는 걸 보면요.

 

 

며칠 전 그곳으로 간 손님의 차는 김포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상요금보다 5천 원이 적은 확정요금이었습니다. 이른바 저가콜입니다. 순간 망설였지만, 기왕 잡은 거 그냥 가자 싶었습니다. 김포를 어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도착지가 합정역이면, 그거 하나는 괜찮은 편입니다. 도착지가 좋아야 또다시 다른 콜을 잡고 갈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대리기사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대리기사 고수들은 운행요금이 아니고 착지(도착지)를 보고 콜을 잡는다.’ 도착지는, 정말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연말을 맞아 카카오대리에서 진행하는 프로모션을 통과하려면, 정해진 시간 내에 얼른 한 콜을 더 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추가로 1만 원을 더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 원이라는 돈. 이게 참 별게 아니지만 묘하게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새벽 찬바람 맞아가며 거리를 뛰고 걷고 하다 보면, 그 만 원이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힘들여 하는 밤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고 싶은 걸까요. 대리기사들이 밤거리의 현장에서 느끼는 즉물적인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기왕 찬바람 맞으며 하는 고생, 1만 원이라도 더 받고 싶다는 정직한 욕망.

 

메세나폴리스로 가자고 하는 고객은, 예상요금보다 5천 원을 적게 올려도 집으로 가는 콜을 잡기가 어렵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그날 다시 한 번 확인을 했겠지요.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고객입니다. 빠꼼이라고나 할까요. ㅋㅋ.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객을 만나는 경우에도, 내색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제가 선택한 콜이니까요. 고객과 통화를 한 뒤, 군소리 없이 차를 찾아가, 운전대를 잡고, 묵묵히 운전을 하고, 도착하면 키를 차주에게 건넨 후 돌아설 뿐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도저히 못하겠더군요. 그건 잘 안됩니다. 

 

피한다고 피해봐도 결국 저가콜을 20~30%는 잡게 됩니다. 아니, 어쩔 수 없이 잡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은 벌어야 하고 일은 해야 하는데, 저가콜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저가콜을 잡은 후, 차를 찾아가다 보면 차종이 궁금해집니다. 궁금함은 대부분 싱겁게 확인되곤 합니다. “역시 또..., 그럼 그렇지...” 이런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저가콜의 경우(이용요금을 낮게 책정해 차주가 직접 올리는) 차종은 BMW가 많았습니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40~50%가 넘습니다. 압도적이지요. 그리고 차주들이 비교적 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운행한 콜 수가 1천 건이 조금 안 되니, 표본 수가 그리 적은 건 아닐 겁니다. 실제 제가 2년간 경험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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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콜의 비율은, BMW를 제외하면 대체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더 재미있는 건, 경차들이 오히려 요금에 대해서는 깔끔한 편입니다. 나온 요금만큼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선지 저는 비싼 차들보다는 일반적인 차들을 만나기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쪽이 깔끔하고 마음이 편합니다. 물론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일반적으로 차의 가격과 운행요금으로 인해 받는 대리기사들의 스트레스와의 상관관계는, 대체로 정비례하지 않나 싶습니다. 간단히 말해 비싼 차가 피곤하다는 이야깁니다. 좋은? 비싼? 차가 아닌 걸 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편합니다. 다른 기사분들도 저랑 비슷할까요?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가, 성(城) 같은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와 배달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곳의 고객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늘도 살짝 자괴감이 듭니다. 대리기사로서 느끼는 감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고 나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고 기분도 나아지곤 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끼게 되는 이 자괴감은 영 고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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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몇 번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합니다. 대리기사를 불러 운전을 시키면 그에 합당한 요금을 지불하면 좋겠습니다. 더 싼 요금으로 가고 싶은 분들은 상담원과 통화해 가격을 합의하는 쪽의 대리운전을 이용하면 좋겠습니다. 합의가 안 되고, 비싸서 안 되겠으면, 그냥 택시를 타고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운행요금보다 더 싼 금액으로 고객이 올리는 콜도, 결국에는 대리기사들이 잡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자꾸 그렇게 싼 요금을 올리는 거지요.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말입니다. 대리운전에 갓 입문한 초짜 기사들이 콜을 잡기 힘드니 남들이 기피하는 콜들을 마구잡이로 잡는 거지요. 혹은 지역이나 시간 등의 상황이 곤란한,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은 기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잡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또 한 가지, 집으로 퇴근하는 길에, 방향이 비슷하면 싸더라도 잡는 경우도 있을 테구요.

 

이 모든 게, 어찌 되었든 합의의 형태 아니냐는 분들도 있습니다. 싫으면 안 잡거나 취소하면 되지 않냐는 논리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생각을 길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서로의 입장이 전혀 다르고, 그 입장이란 누군가의 설득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저 역지사지라는 말을 건네볼 뿐입니다.

 

저가콜을 고객들은 다 압니다. 알고 있으니 싼 가격으로 미끼를 던져놓는 거지요. 그걸 덥썩 무는 기사들도 있는 것이구요. 그렇게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습관이 되다 보니, 정상요금은 바가지로 느껴질 테지요. 정상요금을 지불하는 건 바보 같은 행위처럼 생각되는 거겠지요. 그렇게 터득한 자신의 절약(?) 노하우를 여기저기 자랑하기도 하고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월급과 노동이 소중하다면, 처음 보는 타인의 노동도 그만큼은 존중해주기 바랍니다.

 

아는 이들 앞에서는 세련되고 교양 있어 보이게 말을 하고 매너 역시 좋은 그런 모습을 보이는 분들. 그렇게 여유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분들이, 술 한 잔 하고서 폼 나는 외제차 타고 집에 갈 때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에 이야기한 아파트의 일부 입주민 분들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타인들을 알아주고 존중해달라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적어도 배달노동자들이 당신들 때문에 굴욕감과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 해도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