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필독 추천12 비추천0

 

 

 

 

 

R720x0.jpg

 

중세 유럽에서는 두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는 것만으로도 혼인이 성사된 걸로 쳤다. 강력한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이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구약의 야훼, 신약은 예수와의 계약과 믿음이다. 이게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마치 무협지에서 남녀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하늘과 땅을 하객 삼아, 조상과 스승 앞에 맹세하며 혼례를 치르는 느낌이랄까. 둘은 사실 다르다. 중세 유럽에서 혼인의 본질은 약속 자체에 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예식이 더 중요하다.

 

중세 유럽에서는 성관계도 중요하다. 약속만으로도 결혼이 이뤄진 걸로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관계를 한 후에야 완전한 부부 사이로 친다. 혼인은 인간끼리의 계약이고 부부 관계는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부여한 신성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앤 불린과 헨리 퍼시의 결혼이 무리 없이 성사될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왕의 결혼은 교황의 허락을 받듯 귀족은 왕의 허락 하에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관례는 관례였고, 원칙적으로는 왕이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귀족 사회는 영향력이 큰 데 반해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알 만큼 구성원의 수는 적었다. 누가 누구와 사돈을 맺느냐의 문제는 당사자들에게는 이익이 걸린 정략결혼이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기득권들의 갈등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통치자가 모르는 대형 결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영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울지 추기경이었다. 결혼은 정치였고 곧 그의 소관이었다. 울지는 헨리 퍼시를 불러 앉혀놓고 '선생이 학생을 혼내듯' 갈궈댔다.

 

"너 이 새끼 결혼이 니들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건 줄 알아?"

 

헨리 퍼시는 혼겁이 났다. 갑자기 죄인이 된 불린 집안은 울지 추기경 앞에 납작 엎드려서 처분만 바랐다. 헨리 퍼시는 원래 정혼자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불행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앤을 잊지 못했고, 아내는 그런 남편을 증오했다.

 

이때까지 앤은 어떻게 하면 대단한 남자를 유혹해서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는지를 학습했다. 그녀는 지신의 실력을 헨리 퍼시를 상대로 실험했고, 멋지게 성공했다. 그러나 남자를 사로잡는 걸로 그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을까?

 

depositphotos_95597048-stock-photo-anne-boleyn-in-the-tower.jpg

 

그 남자 이상의 권력자가 동의하지 않는 한 유혹의 기술이 가지는 힘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마음을 얻는 건 유혹이지만 지위를 얻는 건 정치였다. 커다란 학습이었다. 앤은 이때부터 권력 의지를 가지게 됐다. 결혼이 파토나고 그녀는 울지 추기경을 상대로 선언했다.

 

“앞으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복수해 주겠다."

 

다시 말해, 울지 추기경보다 강해지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울지보다 강한 남자는 영국에 한 명밖에 없다. 잉글랜드의 군주 헨리 8세였다. 앤의 야심을 일깨운 이는 다름 아닌 울지였다. 그는 되바라진 처녀의 살기를 귀엽게 받아넘겼다.

 

"응, 그래. 애써라."

 

울지의 눈에 검은 머리 처녀는 이렇게 퇴장하는 듯했으나 앤의 아버지 토머스 불린은 깨달았다. 둘째 딸이 첫째와는 달리 마음만 먹으면 어떤 남자의 마음도 설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귀족들은 공식적으로는 6명, 비공식적으로는 60명까지 첩을 거느릴 수 있었다. 앤도 정부가 되기 좋은 위치였지만 정혼자를 제치고 헨리 퍼시에게 충성 맹세를 받아냈다. 그렇다면 혹시 와, 와, 왕도...? 불린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앤을 궁정에 남겨 놓았다. 그리고 앤은 토머스 와이어트라는 남자를 상대로 또다시 러브 게임을 벌여 한판승을 따냈다.

 

800px-Sir_Thomas_Wyatt_by_Hans_Holbein_the_Younger_(2).jpg

 

토머스 와이어트는 영국의 정치인이자 외교대사였다. 무엇보다도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영국에 소네트라는 시 형식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 그다. 와이어트는 부모님의 명령으로 연애결혼을 하지 못하고 정혼자와 결혼했다. 부부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앤과 친구가 되고 나서는 문제가 생겼다. 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앤과 시 문학을 논하는 친구로 지내면서 그는 아내를 혼외 간음으로 고소해 법정에서 이혼 판결을 받는 데 성공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때 와이어트가 앤에게 낚였다고 한다. 앤은 그에게 어떤 확답도 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싱이 되면 앤이 받아 주겠지 하는 기대로 이혼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앤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았다. 이게 앤에게 일종의 연습이었다고 한다면, 와이어트에게 너무 비정한가?

 

헨리가 앤을 확실하게 의식하게 된 시기는 의견이 뭐 분분하다. 많은 이들이 지목하는 연대는 1526년이다. 그러므로 이때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언니 메리는 수년째 헨리 8세의 정부로 지내고 있었다. 남편 윌리엄 캐리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낳았는데, 둘째가 헨리 캐리다. 이 아이는 헨리 8세와 너무나 빼닮은 외모로 당연히 왕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다. 아내가 왕의 정부이면 법적으로 자기 아내라도 함부로 육체관계를 요구할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감히 왕의 것을 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왕의 여자를 안전하게 관리하고 바치는 역할이야말로 신하로서 영광인 줄 알아야 하던 때이다.

 

화려한 외모의 메리와 놀던 헨리 8세는 앤을 의식하고 나서야 당연한 사실을 상기한다.

 

'아 그래, 메리에게 여동생이 있었지...?'

 

메리는 자타 공인의 미녀, 누가 봐도 한눈에 미녀였다. 반면 앤은 '볼매'였다. 앤은 현명하게도 먼저 왕을 유혹하지 않았다. 왕이 먼저 자신에게 접근할 때까지 수년을 참고 기다렸다. 반면 헨리 8세의 생각은 순진하고 단순했다.

 

"얘하고도 함 자봐야겠는걸?"

 

헨리 입장에서야 동생이 언니와 특별히 다를 리가... 캐서린 여왕도 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앤은 순종적인 시녀였기에 감히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King_Henry_and_Anne_Boleyn_Deer_shooting_in_Windsor_Forest.jpg

 

놀랍게도 앤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헨리에게 거리를 두었다! 갈랑트리 학습, 연구, 실험까지 거친 앤은 헨리를 미치게 했다. 앤이 헨리에게 했던 것은 아슬아슬한 썸이었다. 헨리는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과는 연애란 것을 했고, 다른 여성들은 육체적으로 가지고 놀기만 했으되 썸이란 것은 앤과 처음 타봤다.

 

이전까지 헨리 8세가 원했을 때 몸을 던지지 않은 영국 여자는 없었다. 앤은 몸과 마음을 줄 듯 줄 듯 안 주니 헨리는 몸과 마음이 달았다. 처음에는 그녀의 육체를 탐했지만, 결국에는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앤은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써서 연애편지로 혼내고 만나서 달래주는가 하면, 만나서 토라지게 한 후 연애편지로 달래주기도 하는 등 헨리로 하여금 자꾸만 자신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헨리는 앤과 자고 싶었다. <연애의 목적>의 박해일처럼 자고 싶었다. 왕을 성나게 해서 좋을 게 없으므로, 아마도 높은 확률로 앤은 입과 손으로 사정을 시켜주었을 것이다. 이것도 프랑스식 ‘예법’이었다.

 

앤과 자고 싶은데 욕정을 풀 길이 없으니 홧김에 언니인 메리를 상대로 욕정을 풀기도 했다. 오직 결혼만이 앤과 잘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시 말해 헨리는 앤에게 결혼을 약속했다. 불린 가문은 앤의 연애 테크닉에 가운을 걸게 되었다.

 

이미 헨리 8세는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에게 작위와 영지를 물려주는 등 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메리의 아들 헨리 캐리에게는 그러지 않았으며, 일부러라도 무관심했다. 왜일까. 자기 아들이 아니라서? 가능성이 거의 없다. 헨리 캐리를 자기 사생아로 공인하면 앤은 아들의 이모가 된다. 이러면 앤을 메티레상티트르(제1 정부)로 만들 수도 없고 결혼도 할 수가 없다.

 

스크린샷 2019-01-09 오전 1.36.55.png

 

앤과 결혼하겠다는 욕망이 처음으로 드러난 해는 1527년이다. 헨리가 형수님과 결혼해서 죽은 형에게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못 살겠다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헨리와 앤이 고의적으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유포했다. 왕비 캐서린의 인기는 드높았다. 전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임금님이 돌아가신 형한테 죄책감을 느낀다는 게 레알?"

 

"죄책감은 니기미, 거 앤 불린인가 머시긴가 하는 처자한테 푹 빠져서 맛이 좀 가셨디야."

 

"그럼 그렇지 형수와 결혼하자고 난리 부르스를 칠 때는 언제고..."

 

"어허 형수라니! 우리 여왕 폐하는 아주버님이랑 부부관계였던 적이 없어야!"

 

유럽 세계도 섬나라의 왕을 비난하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죄책감을 느낀대. 풉."

 

"테세 전환에 무릎을 탁 치고 갑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앤은 헨리 8세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맹세는 지켜야 했다. 헨리 8세는 그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는 백마 탄 기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