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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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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뿐인데 이런 복장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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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에 누워있었다.

 

사람들이 수술대(정확하게는 그 위에 있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항상 겪는 일이지만 '이 타이밍에 못 참고 뛰어나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도 그럴게 가뜩이나 수술실의 차가운 공기에 몸도 마음도 잔뜩 쫄아있는 애의 귀에다,

 

"곧 수술 시작할 거예요"

"가만히 계셔야 해요."

"움직이면 큰일나니까."

 

라고 속삭이면, 입만 다물면 세상 얌전한 소녀 같은(나이부터 아님) 나도 갑자기 거친 말을 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얼굴에만 얼마를 들였든 무서운 건 무서운 거라구, 대체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데...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 정신이 주인을 가출하려고 할 때 즈음, 수술대에 몸을 결박(?)당한다. 이는 수술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로, '수술 중 도망'이라는 제목으로 뉴스에 뜨고 싶어도 한참 늦었다는 뜻이었다. 결박과 고통은 내 성적취향에 굉장히 부합하지 않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 기회에 고통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져볼까 하는 생각을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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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연)

 

 

 

누가 라섹 쉽다고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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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은 좀 어두웠다. 성형수술은 밝은 데서 오랫동안 하기 때문에 의느님과 본의 아니게 친해지는데(내 눈을 꼬매며 저녁으로 제육볶음 시켜달라 하는 거 보면 의사도 가운만 벗으면 아저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수술실은 어두워서 의사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볼 여유가 없다. 수술 내내 ①강제로 눈을 벌린 채, ②레이저를 응시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만 들어도 눈물이 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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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등장한 라섹 수술법

 

수술법을 짧게 요약하면 알콜로 얼굴을 소독한 뒤(로션, 선크림을 포함한 화장품류는 수술실에 들어오기 전에 다 씻어냄), 양눈에 마취 안약을 도포한다. 과연 이걸로 마취가 될까 의심하지 않는 게 좋다. 그 순간 휘몰아친다.

 

 

1) 예상 밖의 안구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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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 개검기

 

난 다년간 복싱을 다이어트 겸 취미로 해왔음에도 아직도 눈 앞에 뭔가 날아오면 쫄아서 눈을 감는 애였다. 그리고 라섹은 레이저로 각막을 조지는 수술. 주먹에 감기는 눈이 레이저를 상대로 감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약 수술 중 눈을 감는다면? 각막이 아니라 인생을 조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개검기'로 눈을 강제로 벌린다.

 

한 쪽씩 수술하니까 반대쪽 눈은 가려두는데, 가려진 눈을 최대한 뜨고 있는 게 좋다. 안 그러면 혼난다. 1분만 눈을 감지 않고 있어도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는데 말이지...

 

라식, 라섹수술한 지인들이 분명 "레이저로 각막 지질 때만 힘들고 다른 건 괜찮다"고 했던 것 같은데, 눈을 강제로 뜨고 있는 것도 충분히 힘들었다. 다들 내가 싫으면 말로 하지 이런 걸로 뒷통수를 칠 줄이야. 교우관계를 시험해볼 좋을 타이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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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검기하면 그간의 인생이 머리를 스치고 그른다

 

 

2) 레이저야,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음은 대망의 '각막을 지지는' 시간이다. 레이저로 시력교정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눈 위로 내려오는 레이저를 응시하고 있으면 수술 끝"

 

맞다. 레이저만 보고 있으면 끝이고, 최소 한 시간 이상을 소요하는 성형수술과 달리 수술시간도 짧다. 한 눈당 5분 정도면 끝나고 모든 과정이 15분~20분이면 된다. 그저 레이저를 응시했을 뿐인데 독수리 같은 시력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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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건 다 해본 놈들이 하는 말이다. 수능만점자도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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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 가득 들어오는 건 이런 정신 없는 화면 뿐...

 

우선 레이저를 응시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빨간 점(레이저)을 중심으로 주변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하고, 여러 개로 보이기도 한다. 당연히 정신 없다. 하지만 빨간 점을 향한 집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가운데 있는 놈이 진짜다, 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응시하고 있어야 한다.

 

각막도 신체의 일부라고 어떤 이는 각막을 태울 때 살 타는 냄새가 난다고 하던데, 솔직히 냄새 맡을 여력이 없다. 레이저에 대한 공포를 참고, 각막을 지지는 소리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부터가 이미 큰일이다. 이 와중에 정신이 눈치없이 주인을 벗어나려하기 때문에 이것도 똑띠 붙잡고 있어야 한다. 정신을 잃어서 시력을 잃게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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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하며 온갖 방언을 했던 것 같은데...

 

의사 아저씨(공포를 주었기 때문에 아저씨로 부르기로 함)의 "어어, 레이저에서 눈 돌리면 안돼요. 큰일나요. 금방 끝나. 다 끝났어요"라는 말을(살짝 빠른 템포) 두 번 정도 들으면 수술이 끝난다. 체감으로도 짧다고 느껴져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거친 말은 물론 거친 행동도 할 뻔 했다.

 

라섹은 각막을 지진다고 끝이 아니다. 각막 뚜껑을 떼었기(?) 때문에 그 위에 보호용 렌즈를 덮어준다(잘라낸 각막이 차오를 때까지 덮어두는 것). 렌즈는 보통 3일~7일 사이에 제거하는데 나는 5일 째에 제거하기로 했다. (물론 수술하고 나면 이런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오니 '무슨 요일에 오세요'만 잘 기억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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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케어 받을 줄 알았지만...

 

보통 성형외과에서는 회복실에서 조금 쉬게 한 뒤 집에 보내는데, 여기서는 수술 잘 하셨다며 집에 조심히 가라고 했다. 환자를 강하게 키우는 병원이구나 싶었다.

 

딱히 보육방침에 반기를 들 생각은 아니었다. 사실 여기서 가장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이가 있다면 나일 것이었다. 아파서였다.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그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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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수술은 끝났지만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 인생은 실전이라더니...

 

 

 

고통을 견딘다고 으른이 되진 않는데요

 

시력교정수술을 한다고 개안한 것처럼 세상이 확 밝아보이고 그러는 거 아니다. 처음엔 안경 안 썼을 때보다 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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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고 시리기까지 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시야가 더 제한된다. 운전은커녕(면허는 없지만) 길 건널 때도 차에 치이지 않을까 조심해야 했다. 이래서 수술할 때 보호자를 동반하라고 하는구나. 눈에 뵈는 거 없는 애처럼 산다고 진짜 잘 안 뵈는 일을 겪게 될 줄을 몰랐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고 콧구멍 만큼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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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야는 이런 모양이었다. 세상이 울렁거렸다.

 

혼자 집에 가야 하는 외로운 도토리에게 '집까지 택시 탈래, 지하철 탈래'라고 물으면 보통 전자를 택하겠지만, 병원은 서울의 번화가 중 번화가였고, 나는 200만 원이 넘는 돈을 가볍게 긁은 뒤였다. 갑자기 최소 몇 만 원은 나올 택시비가 그렇게 아까웠다(이래놓고 귀갓길에 다량의 마카롱을 구입함. 얘는 그냥 교통비를 아까워하는 타입). 몰골이 좀 수상하니까(겨울에 선글라스 끼고 다니는) 탑승거부를 당하거나 만만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덤터기를 쓸 것 같다는 불안이 들기도 했다.

 

라는 건 거짓말이고 그냥 객기였다. 내가 두 번째 쌍꺼풀 수술 후, 아픈 눈을 부여잡고 퇴근시간 압구정에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귀가한 애였다는 게 생각나서 그랬다(동네 중국집에서 짬짜면까지 먹고 들어갔다). 지금은 한낮이라 지하철에 사람도 없을 터였다. 왠지 집에 잘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람이 필요할 때 돈을 안 쓰면 어떤 고초를 겪는 지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다행히 집에는 잘 도착). 만 25세 미만은 시력교정수술 후 무조건 택시를 타는 것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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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집에 도착했다고 마음이 놓였는지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눈이 시리고 아파서 눈물이 났다. 모든 불을 끄고, 암막커튼도 치고, 방문도 꼭 닫고, 푸우가 그려져있단 이유로 구매한 아동용 내복으로 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도 똑같았다. 계속 시리고 따가웠다. 꼭 콘택트 렌즈를 넣고 문지르는 것 같았고, 계속 모래를 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쉬는 텀도 없이 찾아오는 고통에 '이제 착하게 살 테니까 그만 좀 하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보호용 렌즈 또한 고통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보호를 목적으로 했다고 해도 이물질은 이물질이었다. 렌즈를 뒤집어낀 것 같은 불편한 이물감. 눈을 비비고 싶어도 렌즈가 빠질까 그러지도 못했다. 듣자하니 보호용 렌즈가 빠지는 건 당장 병원에 달려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인 듯 했다. 옘병, 눈 부셔서 형광등도 못 키고 있는데 병원을 가기 위해 밖에 나가야한다니...

 

어디까지 아프려는지 열도 나기 시작했다. 원래도 열이 나면 눈썹뼈와 눈두덩이가 아팠는데, 이번에도 어김 없이 눈썹뼈와 눈두덩이가 아파오는 것이었다. 눈알 아프지, 눈 주변 아프지, 열 나지. 두통은 부록이었다. 통증을 줄여보자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는데, 아프니까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서 누르는 힘도 아픔으로 돌아왔다. 내가 얼굴과 마음 모두 순하고 청량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인데 입에서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자꾸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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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건 다년간의 수술 경험이 알려주는 어떤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아픔을 적어도 보호용 렌즈를 빼는 날까지는 안고 가야 한다는...

 

렌즈 빼기까지 닷새. 저는 앞으로 닷새를 존나게 버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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