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 개발자와 장기 졸
1.1. 입던은 점프
1.2. 개발자를 정의합니다
1.3. 주화입마
2. 작은 회사에서의 삶
2.1. 돌격 앞으로
2.2. 돌격 앞으로 실패! - 갑, 을, 병, 정 관계의 형성
2.3 머슴살이
2.4 독신자 기숙사
2.5 정리해고
2.6 우아한 출장
2.7 하드코어 인생이여 잘 있거라
2.7 하드코어 인생이여 잘 있거라 (하)
2.7.5 보이저 1호
우주 미아가 되고 말았다. 아니면 유배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미아가 된 사건은 3개월의 파견 근무의 말로였다. 회사에서 팀 인원 중에 3명을 경기도의 근무지로 3개월간 강제로 파견시켰다. 회사는 원래 거의 강제로 보내기는 한다. 하지만 보내기 전에 보통 준비 시간을 충분히 주고 통보하는데 이놈의 회사는 장기 출장인데 출발하기 4일 전에 통보하고 보내버렸다.
인원은 나를 포함한 팀장, 대리 이렇게 3명이었는데 대리가 통보받는 날 엄청나게 저항을 했다. 퇴사 불사를 하고 팀장에게 저항했는데 그 이유가 짠했다.
대리 : "아니 팀장님. 저 새로운 여자 친구 생긴 지 1주일밖에 안됐어요. 그런데 생이별이 말이나 됩니까?"
팀장 : "야!! 너 여자 친구 언제 생겼냐? 이렇게 탄로 나네... 누구냐? 우리도 아는 사람이냐?"
대리 : "아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습니까? 저번에도 이렇게 해서 오래 못 가고 헤어졌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이게 뭡니까?"
나 : "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사람입니까?"
대리 : "넌 인마 시끄러워!! 전 못 갑니다. 이번엔 회사 관두는 한이 있어도 못 갑니다. 그리고 장거리 파견인데 회사에서 출장비 줍니까? 아무 혜택도 없잖습니까?"
마지막 혜택 발언에서는 옆에서 신나게 거들고 싶었지만 나는 안타까운 솔로라 아무 말도 못했다. 대리가 화낼 때마다 손바닥을 비비거나 엉덩이를 들썩거려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쨌든 나의 손바닥과 엉덩이 들썩거림도 힘이 되었는지 팀장은 다음 3가지를 우리에게 약속했다.
1) 반드시 3개월만 있을 것. 3개월 뒤에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복귀할 것.
2) 파견 기간 동안 출장비를 받지 않는 대신 교통비 명목으로 매달 추가 금액을 지급할 것.
3) 주말 근무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
대리는 만족하지 않았지만 거래를 받아들였다. 나는 엉덩이만 들썩거린 대가 치고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2가지 문제가 잠복해 있었는데 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 대리가 거래를 받아들였지만 대리의 분노가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
둘째 - 이 거래가 나에게도 적용되는가?
어쨌든 함정이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고는 경기도 사무실 파견지로 도착했고 다시 새로운 숙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약 2주의 시간이 지나고 '첫째' 요소가 터지기 시작했다. 대리가 숙소 생활이 처음이라 단체 거주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숙소 생활 부적응은 쌓여 있던 분노가 터지기에 딱 좋은 촉매제 역할을 하고야 말았다. 2개월이 다 될 시점에 대리는 짜증을 이기지 못해 분노가 가득 차 있는 부풀어 오른 농양과 같은 상태가 되고야 말았고 짜증 섞인 독설의 빈도도 늘어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같이 밥 먹는 것조차 거부하고야 말았다.
3명 중에 한 명이 상관이고 한 명은 부하라고 한다면 이런 짜증은 당연히 부하가 독박을 쓰게 된다. 그 짜증을 옆에서 받고 있자니 나 자신이 좀 서러웠고 대리가 얄미웠다.
'제기랄 자기는 이제 막 사귄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솔로인 나에게 너무한 것 아닌가!!!'
그렇게 핍박 받는 솔로 모드로 버티다 보니 약속한 3개월이 되었고 드디어 팀장이 회의를 소집했다. 복귀 공지를 위한 회의라 이제 드디어 끝나나 싶었다.
팀장 : "자 이제 우리 복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말이다. 본사에서 한 명은 잔류하라는 명령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리의 반응을 살피니 대리는 별 저항 없이 얌전했다. 나는 이 조용한 반응을 보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미 나를 제외한 무언가의 합의가 있었던 것이니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팀장 : "대충 예상했겠지만 네가 남아라. 뭐 사실 이미 대충 보고도 끝났고 실장님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니까 그렇게 알고. 이미 3개월 적응 했으니..."
나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왜 내가 남아야 하는 것인지 물었고 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분명히 전달했다.
팀장 : "네가 남는 것이 제일 적당하잖아. 나는 신혼이고. 대리 쟤는 이제 막 연애를 했다는데 넌 남아도 큰 무리가 없잖아. 그러니 너무 불만 가지지 말고 좀 남아라. 실장님 지시다."
나 : "그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치면 저는 홀어머니가 경상도에 계십니다. 못 남습니다. 실장님께 면담 요청 합니다. 면담 잡아 주십시오."
그리고 실장과 면담을 위해 매일 같이 기다렸고 팀장에게 찾아가서 면담 요청을 계속했지만 오히려 내가 혼나고 말았다. 실장이 내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니미... 평소엔 출근해서 별로 하는 짓도 없으면서 꼭 이럴 때는 보기 힘들다니. 누구를 바보로 아나'
결국에 실장과 면담은 아예 하지도 못했고 나는 팀장과 대리와도 틀어지고 말았다.
나의 잔류는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확정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분노가 쌓여 가고 있었고 대리와 팀장은 웃으며 철수 준비를 했다.
2.7.6 보이저 2호
기름을 두른 팬 위에서 칼집을 내지 않는 비엔나 소세지가 부풀어 올라 터지듯 나의 분노가 부풀어 올라 터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세지가 픽픽 터지고 있을 쯤에 경상도에 있는 동기 한 명에게 전화가 왔다.
동기 : "야~ 인마. 잘 사냐? 나 다음 주에 경기도 사무실 간다. 나도 파견이라는데?"
나 :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 2명 철수하는데?"
동기 : "몰라 인마~ 나도 여기서 설명 듣다 화가 나서 포기했다. 어찌나 병신 같던지. 일단 올라가서 이야기 해주마"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경상도에 있던 동기 하나가 모든 짐을 싸 들고는 경기도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너는 왜 왔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뭐 올라가라고 해서 왔지 힘이 있냐? 근데 너 난리 쳤다며. 소문 다 났다. 나도 올라오기 싫어서 버텼더니 교통비 명목으로 지급되는 추가 금액을 줄 테니 가라고 그러더라. 그래서 왔지 뭐"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래저래 수소문하여 보니 나의 저항이 너무 심하기에 동기 하나를 붙여주면 회사 입장에서는 일할 사람도 하나 더 늘고 좀 조용해지지 않을까 싶어 동기를 올렸다는 이상한 소문만 들릴 뿐 직접적인 사실은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덩그러니 남고 팀장과 대리는 복귀해 버렸다.
보이저 1호를 따라온 2호는 사이 좋게 손을 맞잡고 지구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2.7.7 사라진 돈
그렇게 보이저 1, 2호가 된 후 약 2달이 지나고 급여가 지급되던 날이었다. 급여를 확인하는 순간 둘 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급여가 지난 달에 비해 줄어 있었다. 연말 정산 세금 납부도 아니었고 의료보험 정산 추가 납입도 아니었다. 급여 명세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출장비 대신 지급 받던 교통비 명목의 금액만큼의 돈이 입금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구석진 곳에서 현 상황을 짚어 보았다.
나 : "이거 왜 미납이 되었을까? 누락된 건가?"
동기 : "혹시 경영지원팀한테 전화나 메일 받은 적 있어?"
나 : "없는데, 까먹은 거겠지? 아마도?"
동기 : "경영지원팀으로 각자 전화 한번 해보자"
행여나 한 사람이 전화해서 말하게 되면 급여에 대한 사실을 누설한 것이 될 수 있으므로 각자가 전화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통화 후 우리는 똑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현 상황은 경영지원실장님이 알고 계시니 경영지원실장님께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면담 신청을 해 놓았다.
하지만 그달에는 그 경영실장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줄곧 항의를 했지만 경영지원팀원은 기상 알람 소리처럼 똑같은 소리만 해댈 뿐이었다. 실장이란 사람의 존재는 필요 없을 때는 나타나서 온갖 시비를 걸어 대고 일도 하지도 않지만 꼭 이럴 때는 그림자조차 보기 힘든 개똥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어처구니없게도 한 달이 더 지나갔고 급여가 한 번 더 지급되었다. 역시나 해당 금액은 누락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나 : "야 이건 계획적이다. 이건 모를 수가 없다"
동기 : "참나. 올라오기 전 실장과 면담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금액은 주겠다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더니만..."
나 : "이건 정말 모를 수가 없다. 이미 우리가 지난 달에 보고까지 한 사항이라 이건 그냥 계획적이다."
동기 : "도대체 이놈들 무슨 꿍꿍이야? 이유라도 좀 알자"
우리는 경영지원팀의 급여 담당계에 돌아가며 전화를 해댔다. 면담 요청을 지겹게 하기 시작했다. 알람 시계가 똑같은 말을 해대면 우리 역시 똑같은 말을 해댔다. 결국 우리는 경영지원실장을 만났다. 개똥 같은 실장은 무엇을 그렇게 잘 먹었는지 얼굴에 기름이 흘러넘쳐 석유 시추선을 정박시켜도 될 정도였다.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실장 : "그래. 이야기는 전달 들었다. 그 금액이 지급되지 않았다지?"
나 : "네 맞습니다. 현재까지 2달째 지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장 : "그래 어디선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상황을 자세히 알아봐야 하니까. 내가 알아볼 동안 며칠만 좀 더 기다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우리는 귀를 의심했다. 경영실장이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약으로 조금 이나마 쓰일까 싶은 개똥이지만 이건 뭐 아무짝에 쓸모없는 난데없는 개똥이었다.
우리는 아직 막내 계급이라 개똥한테 알겠다고 대답한 이후로 또 한 달이 지나고야 말았다. 그 달에 지급된 급여도 당연히 그 금액은 누락이 되어 있었다. 발광에 가까운 불만을 터트렸고 경영지원실장을 한 번 더 독대할 수 있었다.
나 : "실장님. 미지급된 우리 급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실장 : "아... 이거 참 말해 준다는 것이 좀 늦었네. 그게 나도 알아보니 말이다. 사실은 말이야.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났다는구만. 미안하게 되었어"
나 : "그렇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결정이 난 것인가요?"
실장 : "자네들이 지급 받지 못한 그 때부터"
우리는 평정을 유지했다. 거의 해탈의 수준으로 평정을 유지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대충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무 저항 없이 무표정으로 실장에게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3개월이었다. 이놈들이 우리의 급여를 누락시키고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나 : "야 지친다 지쳐 이제 어쩌지? 역시나 바로 던질까?"
동기 : "당연하지 인마. 망설이고 할 게 뭐가 있냐? 다 던지자. 급여를 사기 쳤는데 뭘 따지냐"
나 : "그런데 이 치사한 새끼들이... 대리 팀장 딱 내려가자마자 돈을 까냐."
동기 : "그러니 빨리 관두자 지겹다. 지겨워."
우리는 퇴근하고 숙소에 도착해서, 구인 홈페이지를 열어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2.7.8 하드코어 인생이여 잘 있거라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에 우리 둘은 사표를 던졌고 이 병신 같은 회사와는 완전한 이별을 하고 저 멀리 심우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평소에는 누구나 "그만둬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상 그만두는 일은 쉽지 않다. 오만 가지 일이 고민거리가 되어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 일을 겪은 후 급여 사기당한 마당에 뭐가 더 있겠나 싶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던졌다.
사표를 던지고 난 후 주변 동료들의 반응은 참 다양했다. 경상도에 있는 팀장에게 전화로 통보했을 때 팀장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다시 지금 당장 나를 경상도로 불러 주겠다며 약속을 하고 다짐을 했지만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몇 번이나 다시 불러들여 주겠노라고 나를 설득하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씁쓸했다.
'면담 한 번을 그렇게 원했건만...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제는 믿지 않았다. 팀장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회사를 믿지 않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나와 밥조차 먹지 않겠다 하던 대리에게 전화를 했을 때 대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길게 낮은 한숨만 쉬었고 향후 앞으로 잘 되길 바란다는 짧은 인사를 남겼다. 역겨운 순간도 있었다. 필요할 때 만날 수조차 없었던 실장이 내 자리로 찾아온 것이다.
실장 : "이제 좀 신경 좀 써주려고 했더니 왜 퇴사하려고 하니?"
나는 그 말을 듣고 억지 미소만 지었고 참 역겨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있지 않았다면 이런 입 발린 소리조차 하지 않았겠지 싶었고 영원히 관심받는 일은 없었겠지. 사표를 던지기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태 면담 한 번을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 동기와 후배 사원들은 여전히 관심 밖이고, 이놈의 희생양이 되겠지'
나머지 동기들에게 실장이 했던 말을 그래도 전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 현실이고, 회사에서 우리의 위치니 각자도생 잘하자고 말이다. 반면 나가는 것이 뭐 잘하는 짓이냐고 나가려면 조용히 나가라고 우리를 혼내는 선배도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환경에 적응한 사람도 있으니 역시나 사람은 다양하다 싶었다. 어쨌든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운 좋게 이직할 회사도 극적으로 정해졌다. (이직에 관해서는 추후에 다시 한번 이야기해볼까 한다)
마지막 근무 날 실장과 파견 후 알게 된 몇몇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수원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함께 그만두기로 한 동기는 나보다 약 10일 정도 뒤에 퇴사였기에 곧 따라가겠노라고 웃으며 배웅했다.
수원역에 도착하여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갔다. 내가 타야 하는 열차는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기에 플랫폼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길게 이어진 철로를 보고 있지나 지난 과거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 입사해서 동기와 인사하던 일, 기숙사 냉장고 옮기던 선배, 구조조정 당한 동기, 매일 새벽 2시의 퇴근, '갑'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던 나 자신...
처음에는 물이 가득 찬 세탁기가 이제 막 돌아가기 시작해 물이 일렁이듯이 감정의 수면은 찬찬히 흔들거렸다. 하지만 과거로 조금씩 더 들어갈 때마다 그 흔들림의 강도는 높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우리를 버리듯 유배시키고 급여로 장난친 생각까지 미치니 나의 가슴 속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입은 굳게 다물고 두 주먹을 꾹 쥐었다. 감정은 폭발적으로 출렁였고 사장이라는 인간을 한 대 쥐어 박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들이 직원들에게 준 고통만큼 그들도 고통을 꼭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숨이 한참 가빠지고 있을 즈음 열차 도착 안내 방송에 정신을 차렸다. 고조되어 있던 숨은 큰 한숨으로 정리를 했다. 그 큰 한숨에 억압되어 있던 증기가 뚜껑이 열려 순식간에 빠져나가듯 가슴속 무언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때까지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꽤나 되는 모양이었다.
방송이 끝나갈 즈음 참 바보 같고 순진하다는 생각을 했다. 야근 수당 없는 야근, 이해하기 힘든 비용 절감, 구조조정, 그리고 우리 급여의 장난과 유배는 회사의 그 누군가가 무능해서 생긴 일도 아니고 임원 간의 의견 부조화도 아니었다. 사회 시스템이 이런 꼴로 디자인되어 있었고 사장 개인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 간단한 문제에 우물 안 개구리였던 우리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사정을 마음대로 붙이고 이유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다음'에 대한 괜한 희망을 기대했던 것은 우리들의 착각이었다. 그 모든 일은 우리가 안에 있어서는 막아 낼 수 없는 일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 사장이라는 인간은 다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쓴웃음 위로 큰 한숨이 다시 나왔다. 선로 저 멀리 보니 내가 타야 하는 열차가 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작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는 탈출이었다. 이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에는 여전히 잔류하지만 부조리하고 부패 덩어리인 이 회사에서는 탈출이었다. 열차가 점점 커져감에 따라 나는 탑승 준비를 위해 짐을 챙겼다. 짐을 점검하고 앞을 바라보며 속으로 혼자 조용히 구시렁거렸다.
'잘 있어라. 개XX들아. 잘 먹고 잘살아라'
그리고 나는 다음을 위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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