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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열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마약이라는 소재는 그야말로 끊을 수 없는 마약이다. 편안해지고, 몽롱했다가, 황홀에 이르러 결국 파멸시킨다는 그 금단의 열매를 이야기에 끌어오면 인간에 관한 많은 것을 풀어낼 수 있다. ‘부, 권력, 섹스, 야망, 성공’ 같은 거의 모든 종류의 욕망과 쾌락을 다룰 수 있으며 ‘배신, 살인, 파멸, 파국, 패륜’등 막장으로 치닫는 인간상을 묘사하는 데에도 더 없이 제격이다. 

 

생각해보면 재밌다. 마약의 환각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도 관객은 ‘약 빤 자’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려 한다. 약이라도 빨아야 견딜 수 있는 일상에서 진짜로 약을 빨고 살 수는 없으니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말만 잘하면 홍대거리에서 마리화나를 얻어 필 수 있고, 친구들과 모임에서 정겹게 들이마실 코카인 가루를 너끈히 구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브레이킹배드>나 <나르코스> 같은 드라마를 보는 맛은 확실히 싱거워질 것이다.  

 

금단의 열매. 그 금지된 욕망을 이야기 안으로 옮겨놓으면 관객은 자유로워진다. 도덕이 뭉개지고 정의가 증발해도, 괜찮다. 이야기일 뿐이니까. 비뚤어진 욕망을 탐닉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선뜻 만질 수 없는 선악과를 와그작- 와그작- 씹어 넘기는 맛은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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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작-)

 

 

그녀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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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다. 대학병원 과장 사모님에, 본인도 해외 명문대 출신이다. 이 스펙 쩌는 사람과 커피라도 한잔하게 된다면, 그 고급진 아우라에 오금이 저려 올 것이다. 본디 사람 됨됨이는 겪어봐야 아는 것이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므로, 걱정해야 할 것은 교양 넘치고 우아한 그녀와 맞춰내야 할 나의 격이다. 그녀가 산다는 서울 근교의 고급 타운하우스는 매매가 얼마나 하는지 전세매물도 있는지 당장 네이버 부동산에 검색해보고 싶지만, 저토록 기품 넘치는 여인 앞에서 속물스러운 호기심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에 당신이 그녀와 같은 수험생의 부모라면 당신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이 여자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넘치는 부와 명예도 모자라 그녀의 딸은 매번 전교 1등이다. 입시는 정보 싸움이며, 서울의대를 보내려면 엄마도 공부해야 한다는 그녀의 의견에 적극 동조를 해야 한다. “예서는 어떻게 그렇게 매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지 정말 대단해요~”라고 아부담긴 너스레를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운 좋으면 당신의 자녀를 위한 입시정보 꿀팁을 뭐라도 하사해 줄지 모른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어쩌겠는가. 궁한 자가 엎드려 구하는 게 세상 이치고 자식 가진 부모의 마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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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에, 당신 앞에서 그 고고하던 여자가 대치동 학원에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애절하게 읍소하는 표정을 짓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감정을 환기하겠는가. ‘그래,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애 가진 부모구나.’라고 동병상련을 느낄 것인가, 아니면 이런 그녀 앞에서 움츠러들였던 자신을 허무해 할 것인가. 무엇이 되었든 결정하긴 아직 이르다. 그녀가 감추어둔 위선과 거짓말은 이제 시작이다. 

          

We all lie

 

<SKY 캐슬>은 욕망을 전시한다. 그것들은 공감 가능한 쉬운 욕망이다. 더 높은 계층의 삶을 누리고 싶은 욕구, 마침내 취득한 그 우월한 지위를 가능한 소수의 자들과 공유하려는 선민의식,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 온전히 전수하고 싶은 모성애 혹은 부성애.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본능적이다. 하지만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피라미드 맨 위에 허락된 공간은 좁다. 

 

못 먹는 감은 찔러야 직성이 풀리고, 가지지 못한 것은 차라리 망했으면 싶은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드라마는 ‘고귀한 자들의 파멸’이라는 비극의 전통적 작법을 충실히 따른다. 명문가 규수 한서진에서 시장에서 선지 팔던 집 딸로 정체가 탄로 난 곽미향이 시전하는 찰진 ‘아갈머리’는 그래서 카타르시스가 있다. 

 

대한민국 상류사회로 묘사되는 SKY 캐슬의 비극들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드러난다. 최신의 입시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던 캐슬 부모들의 자녀교육에는 반칙과 불법이 난무하고, 결국에 인생 최고의 트로피로 만들어낸 자식들은, 셀프로 호적을 파서 도망가거나 학력을 위조해 국제 사기범이 되어 돌아온다. 지성과 교양이 넘쳐흐르는 캐슬 주민들의 회합은 조그만 자극에도 금세 경박한 바닥을 드러내고 여차하면 머리끄댕이를 잡고 개싸움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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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부러워하는 피라미드 꼭대기의 그 고고한 성벽 안쪽을 드라마는 내밀히 들춰낸다. 저잣거리의 덧없는 욕망과 다름없는,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천박한 위선들이 엉켜있는 캐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조롱한다.

 

 

관음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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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세탁소 한 켠에 형제들이 드글드글한 단칸방에서 자랐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피라미드 꼭대기를 향한 그의 집념은 무서웠다. 결국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사법시험 합격은 최연소였다. 파죽지세로 차장검사를 달았다. 결국 명문사립대학의 로스쿨 교수가 되어 캐슬에 입성했다.

 

그가 당신의 고향 친구라고 상상해보자. 명절에 각자 고향 집에 오가다 소주 한 잔은 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안하무인 재수 없게 굴어도, 모인 친구들은 그의 술잔에 기꺼이 잔을 부딪치며 장단을 맞춰줄 것이다. 갑갑한 일 생기면 그래도 제일 먼저 전화할 수 있는 친구니까. 서울법대 나와 차장검사가 되어 든든한 빽이 되어줄 친구가 있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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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맨 아래서부터 맨 위까지, 그는 온전히 그의 힘으로 기어 올라왔다. 그래서 그는 캐슬에서도 자녀 입시에 관해 가장 유별난 아버지다. 자신이 일구어낸 이기적 유전자를 자식들이 오롯이 전수받기를 원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삶에 중요한 가치는 없다. 지는 것은 곧 인생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냉정한 승자독식의 피라미드다. 

 

차민혁의 인생관에 선뜻 반론이 나오지 않는다. 삶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경쟁은 늘 존재한다. 지는 것보단 이기는 것이 인생의 다음 선택지를 쉽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그 연속된 승리의 보상으로 SKY 캐슬 입주권이 주어진다면, 쉽게 마다할 수 있는 이 있을까. 드라마 속 캐슬 주민들의 위선을 비웃다가도 방송이 끝나면 피라미드 어느 칸 안에 갇혀 허우적대는 일상을 마주해야 한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다. 틀렸지만 거부할 수 없고, 비뚤어졌지만 올라타고 싶은 상승의 욕구. 이 드라마는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스스로 관음하게 한다. 

 

 

열매를 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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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king 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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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S>

 

마약을 다룬 이야기들의 결말은 대부분 파국이다. 어떤 작가적 상상력을 가져다 대어도, 금단의 열매를 베어 문 자들을 죄를 사할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금단의 선을 넘는 짜릿한 경험을 관객을 대신해 수행했던 이야기 속 마약왕들은 그 임무를 다하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다. 주인공과 광란의 질주를 같이해 온 관객들에게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갈 시점을 알리는 것이다. 

 

정(?)들었던 주인공의 죽음을 뒤로하고 이야기에서 빠져나올 때의 씁쓸한 뒷맛은 “역시 약을 빨고 살면 ㅈ되는 구나”라는 단순한 교훈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마약왕들의 광시곡이 휘저어 놓은 내 안의 욕망이 정제되고 통제된 현실 속에서 다시 가라앉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종영을 앞둔 드라마 <SKY 캐슬>도 파국이 착착 준비되고 있다. 살인 사건에 휩싸인 캐슬에는 더 이상 지성도 교양도 없다. 쉰 이 넘은 대학교수는 어머니를 찾아가 당신이 나를 잘못 키웠다고 패악을 부리고, 비명에 간 아이의 억울함보다, 살인 누명을 쓴 남의 집 아이의 인생보다, 내 아이의 내신 성적이 우선이다. 성공한 그들의 부러운 성이었던 캐슬은 점점 사람이 사람답지 않은 괴물들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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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기어이 파국으로 끝을 맺을 때, 당신의 일상에서 <SKY 캐슬>은 어떤 모양으로 가라앉을 것인가. 주말을 기다리며 그것을 미리 준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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