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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판곤 위원장이 밝힌 국대 감독 선임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기를 지배하고 승리를 따낼 수 있는 능동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감독을 희망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빠른 역습으로 골을 뽑아낼 수 있는 팀을 만들 수 있는 감독이 필요하다.“

 

월드컵이 끝나고 필자는 글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신태용의 재계약을 바라면서 쓴 글이지만, 사실상 어려워 보였기 때문에 빠르고 굵직하며 효율적인 축구를 하는 감독이 후임을 맡아주기를 바랐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종료 직후부터 시작된 높은 볼 점유율과 짧은 패싱 플레이에 기반한 ‘지배하는 축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고, 그런 축구론 아시아 무대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개인적인 바람과는 반대로, 또다시 지배하는 축구, 그것도 철학과 소신이 무척이나 뚜렷한 파울로 벤투 감독이 선임됐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김판곤 위원장이 밝혔던 선임 조건에서 두 가지는 맞고 두 가지는 틀리게 되었다. 지배는 하였으나 승리하기 위한 능동적인 축구는 없었고, 정신력은 강했으나 빠른 역습으로 골을 뽑아내는 축구도 없었다.

 

벤투 감독은 선임 단계에서부터 아시안컵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협회에서도 이번 아시안컵을 위한 계획 수립과 평가전 준비를 다른 대회 보다, 슈틸리케호보다 더 잘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아시아 최강의 자리는 여전히 요원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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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배하는 축구’ 이야기를 더 해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대표팀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기성용과 구자철은 마음을 굳혔고, 이청용은 고려하고 있다. 이 세 선수는 조광래호에서부터 대표팀의 핵심 자원으로 뛰었었고, 지배형 축구에 없어서는 안 될 자원들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서 세 명의 키 플레이어가 뛰던 모습은, 박스 근처에서 위협적인 패스나 크로스를 올리는 것보다 중앙선 인근에서 볼을 받고 다시 돌려주는 연결고리, 플레이메이킹 하던 기억이 잔뜩 남아있다.

 

우리는 아시아 팀과 경기할 때 항상 텐 백으로 주저앉는 상대를 만난다. 지배하는 축구로 가장 강한 팀을 만들었던 스페인과 독일은 이에 대해 과감하게 라인을 올리고 상대 진영에서 머릿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상황을 만들어나간다. 즉, 중앙수비수와 골키퍼 정도를 제외하고 모든 선수가 상대 진영 요소요소에서 볼을 받을 준비를 해나간다. 이 경우 역습에 대한 부담이 강하지만, 상대가 볼을 받아도 숫자 싸움에서 대등하게 가져간다면 효율적인 압박이 가능하게 되고, 역습 리스크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한 독일의 전술이 그러했다. 우리가 준비한 역습은 결국 골키퍼까지 나온 뒤에서야 이뤄질 수 있었다.

 

아시안컵에서 보여준 우리의 지배하는 축구는 솔직히 쫄보 축구였다. 낮고 간격이 좁은 두 줄 수비를 상대함에 있어, 황의조 선수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선수가 상대 라인보다 내려온 상황에서 볼을 받으려고 했다. 한국의 공격전개는 9명의 수비를 상대로 3~4명에서 다 해결해 나가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라면 바레인전 황희찬이 골 넣던 모습대로 약간의 운빨세컨볼게임이 되길 기도하게 되었다. 공격전개 전술이 없다기보다, 숫자 싸움에서 밀리다 보니 선택지 자체가 무척 좁아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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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조를 톱으로 쓰게 되는 것도 선택지를 굉장히 좁히는 일이다. 황의조는 몸싸움, 헤딩, 패스, 스피드 등 모든 면에서 그렇게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가 아니지만, 훌륭한 퍼스트 터치를 기반으로 한 훌륭한 슈팅을 무기로 갖고 있는 공격수다. 이탈리아엔 콸리아렐라, 시모네 자자처럼 이러한 유형의 공격수가 좀 보이는데, 우리 팀이 내려앉는 전술을 쓰고 있을 때 롱 볼을 받아 한 큐에 처리하는 팀 전술에서 아주 효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예 볼을 받을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을 땐 효율이 굉장히 떨어진다. 역시 숫자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황의조에게 초점을 맞춘 롱볼과 양 풀백의 크로스를 넣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황의조가 못 받더라도 주변에서 받아줄 수 있게끔, 순간적으로 상대 박스 안에 최소 5~6명이 들어오는 숫자 싸움이 필요했지만, 상대들의 역습이 두려워 그렇게 하질 못했다. 감독이야 그렇게 요구했겠지만, 애초에 지정된 위치가 너무 멀면 그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다. 우리의 라인을 올리고, 후방 빌드업도 잘해나가지만, 상대 박스 근처만 가면 볼을 잃어버리는 일이 계속해서 나온 까닭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벤투 감독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우리가 스페인이나 독일처럼 완벽하게 볼을 통제하면서도 숫자 싸움을 벌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레인전에서 쉐도우 스트라이커 자리에 손흥민을 기용하며 박스 안에서의 순간적인 숫자 싸움을 기대한 것은 일종의 절충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존재만으로도 무게감 있는 손흥민의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흔들어보겠다는 것이다. 덕분에 황인범과 황희찬에게 기회가 많이 나왔지만, 황인범은 침투를 잘하는 선수가 아니고 황희찬은 골 결정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다. 과거의 구자철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겠지만.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공격적인 운영을 할 것인가? 안정을 위해 재미없고 지루하지만, 철저히 후방 빌드업에 기반한 축구를 할 것인가? 벤투 감독을 우승을 위해 후자를 택했고 그것이 일반적인 선택이지만, 나는 상대가 중동이라면 다른 전술을 들고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기를 완전히 지배하면서 한 방 맞고지는 경기는 중동팀을 상대로 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던가. “한국에는 소리아 같은 공격수가 없다”라는 말과 함께.

 

더 하나 안타까운 것은, 빠른 역습 축구 역시 잘 안 되었다는 점이다. 역습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가장 큰 무기인데, 대회 내내 선수들의 체력과 폼이 빠른 역습 축구를 구사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완벽한 역습 타이밍에서 황의조와 손흥민이 잦은 터치로 템포를 죽이는 장면을 볼 때마다 골 넣기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체력 문제는 때마다 흘러나오는 이슈지만, 메디컬 팀 문제까지 불거졌다는 점은 김판곤 위원장에게 상당히 실망스러운 지점이다. 카타르전에선 고작 후반 60분에 대부분의 선수가 퍼져버리는 상황을 야기했고, 실점 장면도 체력 문제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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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는 축구는 볼을 받기 위해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므로 체력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한 번에 에너지를 폭발하는 역습 또한 효과적으로 될 수 없다. 기성용이나 손흥민에 대한 관리를 포함한 체력 문제는 경기력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으니, 늘 체력이 강점이었던 한국 축구의 기초 색깔까지도 사라진 대회가 되어버렸다.

 

 

3.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시안컵 탈락으로 벤투 감독을 경질하자는 말은 실없는 소리다. 그러나 아시안컵을 지켜본 사람들의 뇌리에는, 지난 8년간 있었던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떠올랐을 것이다. 아기자기하고 세밀한 패스 축구로 찬사를 받았던 조광래호는 체력 관리 실패, 전술의 융통성 부재, 동기부여가 없는 국대 선발이란 문제를 야기했고, 열심히 지배하다 한 골 처먹고 지는 경기가 계속 발생하더니, 결국 레바논 쇼크로 ‘평화왕 조광래’라는 희대의 짤방만을 남긴 채 경질당했다. 까고 보니 감독이라기보단 정치인에 가까웠던 슈틸리케는 포메이션만 들고 나가는 철학 부재, 상대 대응전략 부재, 소통 부재라는 문제를 야기했고, 역시 똑같이 지배하다 한 골 처먹고 지는 경기가 계속 발생하더니, 결국 카타르 쇼크로 ‘소리아 같은 공격수’라는 희대의 명언만을 남긴 채 경질당했다. 

 

경기 후 인터뷰가 워낙 재미없는 사람이지만, 벤투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축구에 대해 정확한 관점을 지닌 것만은 분명하다. 기자회견장에서 언론을 상대로 한 경기 피드백은 보통 누구나 다 알 법한 평이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만, 벤투 감독의 이야기에선 한 두 가지 정도 경기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 담겨 있다. 감독으로서 경기를 보고 있는 눈만큼은 확실히 살아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바레인전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나온 다음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전반 끝나고 한 이야기는?“

 

”세컨드 볼 컨트롤 강조 / 롱볼 대응전략 / 볼 점유율 높게 가져가면서 공격 시 수비전환에 주의 / 문전에서 최대한 멀리 플레이할 수 있도록 지시“

 

위의 지시사항들은 지배하는 축구를 유지하면서 상대의 역습 기회를 줄이는, 소위 '이기는 확률'을 높이기 위한 지시사항들이었다.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저 팀 멘탈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던 슈틸리케와는 확실히 다른 나름의 처방전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특히나 한국의 지도자들은 느슨하게, 세부적인 지시 없이, 그저 하던 대로 경기에 나서는 사람이 과거엔 꽤 많았는데, 팀을 책임지는 감독으로서 누구보다 축구에 밝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벤투 감독의 부임 후 한국은 후방 빌드업 능력이 훨씬 더 상향됐다. 지난 아시안컵에서 소위 ‘늪 축구’라고 불리며 잦은 실점 기회와 엉성한 빌드업 과정을 기억한다면(재밌는 이야기지만, 한국이 엉성한 플레이로 기회를 내주자 상대방의 뒷공간은 점차 열리게 되었고, 한국의 역습은 그래서 통할 수 있게 되었다) 굉장히 매끄럽고 압박을 잘 피해 나가는 이번 대회의 후방 빌드업 과정을 칭찬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골키퍼-수비수-풀백-중앙 미드필더 라인까지 볼을 운반해 나오는 과정까지는 일본보다도 나은 장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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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서 말했듯, 아시아팀을 상대할 때 지나친 실리적 운영에서 나오는 공격 작업의 효율 저하 문제는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벤투 감독의 감독 커리어를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월드컵 아시아 예선 과정은 아시안컵보다 더 선수들의 체력 관리가 어렵다. 아시안컵은 약간의 합숙훈련이라도 있었고, 이 과정을 거친 주세종, 황인범, 김진수 등의 아시아 리그 선수들은 확실히 체력적으로 월등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100% 쌩쌩한 상태의 손흥민을 볼 수 있는 날은 흔치 않을 것이다. 벤투 감독은 체력 관리 문제와 공격 작업 문제에 있어 자신의 철학, 혹은 고집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글쎄, 과연 중동 축구를 파훼할 수 있을까? 또다시 체력만 잡아빼는 70분 동안 볼 돌리는 축구하다가 한 방 얻어먹고 녹다운되는 경기가 나오지 않을까?

 

이런 우려를 묻는다면, 벤투 감독에게 예상되는 대답은 이렇다.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대대로 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4.

 

한국이 세계 축구계에서 갖고 있는 입지는 다소 애매하다. 강자에겐 꽤 강한 편인데, 약자에게도 꽤 약하다. 김판곤-벤투 체제가 지배하는 축구 철학에 대한 강한 욕심을 내는 것은, 강자와 약자 모두 지배하는 축구로 결과를 내보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남아공 월드컵의 허정무호가 그랬다. 워낙 세부 전술이 없고 선수들에게 의존하는 팀이다 보니 아시아 예선과 월드컵 본선의 팀 전술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태용호는 몇 경기 치르지 못한 아시아 예선이라 비교하기 어렵지만, 감독의 스타일로 볼 때 아시아 예선과 월드컵 본선의 팀 전술이 판이하게 다른 팀이었다. 유럽 팀들이 아시아 예선과 월드컵 본선을 비슷한 맥락을 이어가며 팀을 운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은 아시아와 월드컵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괴리감을 극복해나가기가 쉽지 않다.

 

어떤 감독은 하프타임에서 ”우리의 축구를 하자“고 말하는 반면, 또 어떤 감독은 상대를 분석하며 맞춤 전술을 내놓는다. 벤투 감독은 ‘우리의 축구’에 더 집중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축구라는 건 잘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다. 변수를 줄이기 위해 ‘우리의 축구’를 최대한 완성하는 것을 택한 벤투 감독의 선택이 그래서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상대가 나오더라도 괴리하지 않게끔 단단한 자신을 만들겠다는 포부는 가장 ‘바람직한’ 해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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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손흥민 문제에서도 자신의 '바람직한' 해결책을 고수했다. 주목받았던 포르투칼 출신 피지컬 고치를 애써 데려온 만큼, 그가 손흥민이 가진 체력적 문제를 몰랐을 리 없다. 뉴캐슬에서 기성용의 몸 상태를 거론하며 차출일 연기를 요청한 것도 고민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벤투 감독은, 손흥민에겐 매경기 선발 거의 풀타임이었고, 기성용에 관한 베니테즈의 요청도 거부했다. 나는 명백하게, 손흥민의 중국전 출전은 실수였다고 본다. 또한 국대만 다녀오면 부상에 시달리는 기성용도 세심히 관리해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몇 선수들의 체력 관리 문제, 똑같은 포메이션에 똑같은 선수 교체 등, 사람들이 벤투 감독을 비판하는 요소들은 일견 타당하지만, 그는 바뀌지 않을 것이고 바꿀 생각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에겐 '옳은' 축구이기 때문이다. 핵심 선수가 체력적 문제를 겪고 있더라도 그것을 팀으로서 극복해 내는 것, 어떤 선수가 들어가더라도 팀 전체적으로 꾸준한 경기력을 내는 것, 그것이 벤투 감독이 원하는 '지배하는 축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심 선수들의 체력관리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부서지지 않는 이상은 그대로 가고 그 결과까지 감내하는 것. 축구팬들은 그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벤투 감독에게 '능동적인 축구'를 기대하는 마음은 접었다. '지배하는 축구'에 대한 벤투 감독의 완고한 철학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잘 되기를 바라지만, 불안불안한 시선으로 그 포부를 지지하는 것이 나 같은 축구팬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평생에 한국이 지배하는 축구로 아시아를 뚜까패는 날이 올지는 다소 회의적이지만 말이다.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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