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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린 나이에 죄와 벌을 읽었다. 국민학생이었지만 선민의식과 영웅심으로 세상에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수전노 노파를 죽였다는 이야기 정도는 알아먹었다. 막상 죽이고 나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고뇌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정당한 살인에 대한 질문 하나를 던져두고 도스토옙스키를 묻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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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글들에서 가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하거나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하는 것을 접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문인. 뇌전증으로 발작이 지나가면 책상에 앉아 장문을 글을 썼다는 이야기들을 미리 접했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신의 존재를 느끼고 영적 체험의 충족감을 경험하는 부분은 뇌전증에 영향을 주는 부분과 근접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은 발작 직후에 글을 쓰는 모습이 마치 발작 중에 보고 온 것을 잊기 전에 적는 것 같더라고 했다. 명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것을 생각하다 보니 막연하게 떠오른다.

 

러시아 소설은 이름이 진입 장벽이다.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이 조금 과장하면 수십 가지는 되는 것 같다. 문학동네에서 세 권으로 나온 책은 그래도 옮긴이가 애칭마다 주석을 잘 달아 주어서 알아보기가 좀 수월했다. 권당 500페이지가 넘는다. 책에서 옮긴이의 약력을 보니 노어 문학으로 평생을 연구하고 사신 분이다. 성별은 모르지만 김희숙 님의 노고로 좋은 책을 읽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진입 장벽은 좀 있다. 150년의 시간과 문화적인 차이도 극복해야 한다. 번역된 글에서도 문체가 느껴진다. 다듬고 아름답게 쓴 문장이 아니라 토해내듯 장중하고 길게 쓴 글이다. 도입부인 1권의 대사 중 터키 군인들의 잔혹함을 스치듯 묘사한 부분이 들어왔다. 1880년도에 출간한 책이다. 일제 시대와 남북 동란 전후의 시기를 그린 조정래 작가의 책이 발매된 시기와 비교해 보면 최소 수년에서 수십 년 된 피의 흐름이다. 어미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공중에 던져두고 놀이 삼아 찔러 죽였다고 했다. 그때 흘린 피가 몇 대를 지나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 학살을 낳았다. 보스니아에서 인종 청소를 독려한 살인자들을 두둔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 증오의 기원을 우연찮게 살짝 본 기분이었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의 집단 기억을 아직 가진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생각한다. 덕분에 신분 상승의 기회를 획득한 이들도 있지만 만만치 않게 잔혹한 일들이 있었다. 한국의 지배 계층은 잊었지만 일본의 지배 계층은 잊지 않은 것 같다. 동해 해상에서 일본이 군사적 갈등을 유발하려는 행동을 한다. 내부 문제의 불만으로 인한 갈등을 외부로 돌리려는 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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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보이는 종교적인 부분은 인간 본연의 특성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다른 생명들처럼 극한 상황에서도 생존을 추구한다. 존재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로 욕망이 진화한다. 조금 더 나아진 존재가 되려는 욕망이 생긴다. 그 욕망이 다른 기호와 결합하면 특정한 한 가지를 더 좋아하고 잘하는 덕후나 전문가가 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욕구가 방향성을 정하지 못할 때 더 위대한 상위의 존재와 합일의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싶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대상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인간화해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다.

 

무신론자는 아니다. 진화론은 생명의 발달을 설명할 수 있지만 발생을 설명하긴 어렵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 위대한 섭리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섭리가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구에 사는 같은 생명체들도 생태계에서 처한 위치와 생존 메카니즘에 따라 다른 전략을 취한다. 같은 종끼리도 그다지 동족 의식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무리 창조주라 해도 다른 차원의 존재가 우리들이 같은 인간에게도 행하지 못하는 무한한 선의를 보일 것이라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설령 선의를 보인다고 해도 그걸 인간이 선의라고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몰지각한 어른들이 행하는 아이들에게 잘 되라고 하는 이야기라는 언어 폭력과 뭐 다를 것 있는가 하는 생각이다.

 

나이만 먹은 것이 아니라 생각도 조금은 자랐다. 덕분에 소설이 그리 어렵고 난해하지 않았다. 작가의 세계관을 파악하는 약간의 진입 장벽을 벗어난 후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하게 몰입했다. 근대 소설의 새 장을 연 도스토옙스키 최후의 걸작 인간의 정념, 이성, 신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앎이라는 문구가 표지 뒷면에 적혀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연작 소설의 첫 이야기다. 이어지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작가가 죽었다. 3권의 마지막 장을 덮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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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시리즈를 읽고 작가의 죽음을 아쉬워한 후 오랜만이다. 뒷이야기를 적지 못한 작가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야기를 창조하는 크리에이터의 능력은 일정 부분 타고나야 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특히 3권의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는 검사와 변호사의 법정 발언은 한 호흡처럼 읽히고 울림이 있다. 고전 명작도 한때는 대중 소설이었다.

 

농노제가 없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러시아의 시대 배경상 그 글을 접하는 대상은 일정 기준 이상의 인텔리거나 귀족 계급이었다. 시대의 최고 지성을 목표로 한 글이 아니고 글을 읽는 사람들의 평균을 목적으로 쓴 글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생산 계층이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글과 지식이 보편화된 현상의 반증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발작적 히스테리와 뇌전증을 앓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글은 작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둘째 아들의 섬망 발작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자신의 경험을 글로 체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서 묘사된 그 시대 여자들의 제어할 수 없는 히스테리는 여성들의 태생적 섬세함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예민하고 섬세한 것들이 폭력과 억압에 고장나기 쉽다. 사람이 아니어도 내구도가 좋은 것들은 단순하게 작동하는 것들이다. 삶이 고된 사람들이 무채색을 띠는 것도 그런 것 같다. 다채롭고 섬세한 사람들은 일찍 고장나 버리고 무덤덤한 사람들만 남아서 그리 보이는 걸 수도 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머니의 발작이 아마 섬망 증상이었을 것이다. 간혹 발작을 하고 난폭해지고 괜찮아지기도 하는. 어머니는 섬세하고 예민한 분이셨던 것 같다. 삶이 많이 힘들었던 것도 같다. 살아온 과거를 인정한다. 의식적으로 외면하던 어머니의 기억에 생각이 닿았다. 동생도 뉴런의 연결이 어머니만큼 섬세하고 여렸나 보다. 만 명이 같은 책을 읽어도 살아온 경험에 따라 만 가지의 감상이 존재한다.

 

흥미로운 이야기야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 내겠지만 이만한 울림이 있는 이야기는 드물 것 같다. 영혼이 풍성해지는 기분이다. 좋은 글을 읽었다. 마무리를 하려고 보니 막상 소설 이야기를 적지 않았다. 간략하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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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서 존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아버지와 세 아들이 있다. 큰아들과 동생들은 어머니가 다르다. 둘째는 무신론 사회주의자에 가깝고 막내는 종교인의 길을 걷는다.

 

아버지는 세 아들의 혐오스러운 부분만을 모아둔 것 같은 사람이다. 첫째 아들과 같은 여자를 두고 경쟁을 한다. 작가가 사생아라는 의혹을 충분히 심어 준 하인에게 살해당한다. 부친 살해의 혐의는 큰아들에게 돌아간다. 하인은 자신의 죽음으로 증언을 거부하고 계획을 완성한다. 그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둘째 아들이다. 둘째 아들은 형의 범죄를 의심하다가 사실을 알고 형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번민의 과정에서 섬망증에 빠진다.

 

모든 등장인물이 저마다의 무게를 가지고 살아 움직인다. 얼핏 보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막내아들이 주인공인 것 같지만 낮게 취급할 존재가 없다. 성자로 칭송받는 종교인의 죽음이나 보잘것없는 아버지를 사랑한 어린아이의 죽음의 무게감은 같다. 다만 죽음을 접하고 경험한 만큼 사람이 자란다. 모두가 같은 속도로 자라는 것이 아니니 성장을 보여주는 사람을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이야 그렇지만 더디게 자라도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법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읽는 도중 내내 큰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는지 아닌지 독자가 의심하게 만든다. 진짜 살해범이 밝혀진 후에도 오히려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다시 언급하지만 클라이막스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각자의 논리로 대결하는 부분이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든 상대편의 논리를 인정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대로 다음 편이 만들어졌다면 탈출한 큰형이 미국으로 갔을 것 같다. 둘째는 회복되어 사상의 전환을 했을 테고 셋째는 신의 품 안에서 좀 더 인간에 가까이 내려왔을 것으로 예상한다. 더 많은 이야기가 녹아있지만 거칠게 정리했다. 작가가 인간과 자신을 탐구한 결과를 이야기로 풀어놓은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섬망 발작 중에 보고 온 이야기를 썼을 수도 있다. 섬망증은 환각과 망상을 보게 하기도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설사 환각 속에서 본 대사를 옮겨 적었다 하더라도 그가 구축한 틀 안에서의 환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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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카한일유압의 부당한 정리해고 이후,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까지 1334일이 걸렸다.

세상에 큰 뉴스 많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딴지 필진 범우는 이에 맞서 투쟁한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본인의 성격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하게.

 

그와 그의 가족에게 참으로 무거운 날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던 노예의 다른 이름이다.

근로자는 착한 노예. 노동자는 불순한 노예.

 

 

이 시대 노예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고 때론 발버둥치고, 때론 포기하고,

때론 관조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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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일기(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