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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명절을 보낸 부부가 있다. 캠퍼스 커플에서 한 아이의 부모가 된 호빈과 진영은 추석 때 시댁에 가지 않았다. 진영은 기쁘고 호빈은 짜릿했다. 완벽한 추석이었다. 

 

최고의 추석은 모진 날들 위에 핀 꽃이다. 진영과 호빈은 결혼 후, 아니 결혼 전부터 싹튼 고부갈등으로 바람잘날 없이 살았다. 아이가 태어나자 갈등은 본격화된다. 진영과 시어머니 사이를 긁고 지나간 말들은 돌아서면 사라져 증명할 수가 없었다. 기분은 상할대로 상하고, 사실 없는 서로의 주장만 남았다. 

 

진영은 호빈에게 촬영을 요구한다. 마침 호빈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뱉은 말과 지었던 표정을 찍으려고 켠 카메라로 호빈은 1년 반 가까이 어머니와 진영의 다툼과 거기서 파생된 부부싸움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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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고부갈등을 보여준다. 호빈의 동생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라는 시댁과 이름을 부르겠다는 진영 사이의 갈등에서 진영의 고양이를 치우라는 시어머니와 고양이를 지키려는 진영 사이의 갈등까지. 그리고 며느리 진영과 시어머니를 둘러싼 시아버지, 고모, 동생의 입을 향한다. 

  

“며느리는 하인이야”

 

“고부관계에서는 남자가 잘 해야돼. 여기 가선 이 편 들고, 저기 가선 저 편 들고”.

 

갈등을 좇으며 담고 보니 이건 시어머니와 며느리 싸움이 아니었다. 필름 속엔 그들을 그토록 다투게 만든 구조, 가부장제가 있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진영은 주체가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게임의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고부갈등 영화가 아니다. 

 

‘아주 전형적인 고부갈등’을 담은 영화는 그래서 상업영화가 아님에도 화제였다. 개인의 삶보다 가족 내 역할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 ‘다들 그러고 산다’는 말에 하이킥을 날리려고 일어선 부부에 대한 화답이었다.

 

1시간 20분, 스크린에 펼쳐진 부조리에 호빈의 부모가 있었다. 영화는 막을 내리고, 어지간한 언론 인터뷰도 지나간 자리. 전통적 가족문화라는 큰 바위에 하이킥을 날리려다 엄마, 아빠를 빗겨치기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부부는 무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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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호빈(남편, 영화 B급 며느리 감독)

: 김진영(아내, 영화 B급 며느리 출연)

: 인지니어스

 

 

아싸X핵인싸 

 

: 자기 얘기부터 해보죠. 나는 어떤 인간인가?

 

: 진영이(아내)는 아웃사이더고, 저는 인사이더에요.  근데 불만은 많은 인사이더? 시스템 안에서 궁시렁대고 있죠.

 

: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다는 거네요?

 

: 그렇죠. ‘저 꼰대들하고 얘기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게 체화돼서 말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말 안하고 액션을 하면 되지, 굳이 홍준표를 설득할 의지는 없어요. 원래 성격이 좀 그래요. 

 

호빈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근엄한 가장, 어머니는 성실한 며느리였다.

호빈의 집에는 '원래 그렇게 하는가보다' 하는 것이 많았다.

그런 분위기라, 호빈은 순종적이다. 적어도 어른 앞에서는.

 

: 진영 씨는 어때요?

 

: 집에서 "넌 야무진 아이야" 소리 들으며 자랐어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제 의견이 있고, 누구에게든 그걸 설명하고 납득시킬 수 있다 생각했죠. 다른 인터뷰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제가 말을 굉장히 잘해요. 

근데 남편이 저한테 헛똑똑이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생각해보니 맞더라구요. 서른에 딱히 직업도 없이, 혼전임신으로 결혼했잖아요. 현실에서 보이는 김진영은 굉장히 실속 없는 인간인 거에요.

 

: 진영 씨 캐릭터가 독특해요. 캡틴 아메리카 아세요? 사실 되게 옛날 사람인데 냉동 상태로 잠들었다가 현대에 팍 깨어나는 거에요. 그래서 가끔은 이 시대 사람이 맞나 싶을 때가 있어요. 처음 봤을 때 진영 씨는 한국 문화나 관습과 단절되어 있다가 팍 깨어나온 사람 같았어요.

 

: 어우. 그런 느낌이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교과서적이라고 제가 표현하는데…

 

: 고지식하다고 하기도 하고요. 결혼 초까진 넌 되게 특이하다, 특별하다고 하더니 시어머니와 갈등이 시작되면서 저를 또라이라고 했죠.

 

: 또라이라는 건 결혼 전에도 했던 말인데 뉘앙스가 달라지긴 했어요.

 

: 친정에서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행동이거든요.

 

: 진영이네 집은 갈라파고스 느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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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민주적인 환경은 아니었어요. 저희 아빠는 성질이 불 같아요. 누가 앞에서 운전을 너무 거칠게 하면, 그 자리에서 내려서 정말 치고 받고 싸우는 분이에요. 제가 크는 동안 거의 매달 합의금이 나갔죠. 

 

똑같은 일이 생겼을 때, 남편은 차에 앉아서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성질을 부려요. 저는 그렇게 짜증나면 차라리 가서 싸우고 오라고 해요. 

 

아빠가 그렇게 싸우는 게 불편했지만, 한편으론 맞는 행동이라 생각했어요. 열 받게 하는 사람을 조지고 옆 사람에게는 풀지 않거든요. 그런데 남편은 가장 가까운 가족을 불편하게 하는 거에요.

 

: 진영 씨 어머니는 어떤 며느리에요?

 

: 할머니 성격은 아빠처럼 세고, 직설적이에요. 엄마가 몇 번 데이고 나서 시댁에 가길 거부했고, 아빠는 시댁에 가야 한다고 강요한 적이 없어요. 저희 엄마 아빠가 한 동네에서 크셔서, 시댁을 못 가게 되면서 친정도 안 갔죠. 

 

: 기본적으로 근거가 있으면 논쟁이 가능한 분위기인 것 같네요. 

 

: 결코 민주적인 집은 아니었지만,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이런 분위기.

 

그런 분위기다 보니 시댁과의 갈등이 시작될 때, 저는 지금껏 해왔듯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논리의 날실과 씨실을 엮어내면 제 말이 맞다고 해주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천년 가까이 내려오는 이 조선의 악습을 바꿀 수 있나보다, 그렇게 시작했어요. 나는 이길 수 있다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진영은 논리로 대화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보수적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진영을 당찬 아이로 키웠다.

진영의 집에는 원래 그런 것 대신 '논리'와 '설득'이 있었다. 

논리와 설득의 대상에는 어른도 포함되었다.

 

: 갈라파고스에서 온 진영 씨가 봤을 때 선씨네 가족은 어땠어요?

 

: 결혼하고 처음에 되게 놀랐던 건, 남편네 가족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법한 가족의 모습이었다는 거에요. 아버지는 엄하시고 어머니는 자애로우시고 추석에 모두 모여 하하 웃으며 송편을 먹었습니다. 딱 그런 가족이에요. 

 

: 그런 행동을 하는 가족이라는 의미죠?

 

: 본인들이 그렇게 살려고 하는 욕망이 굉장히 강하시니까, 끈끈한 이미지의 행동을 계속 해요. 

 

: 이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이 크다보니 갈등이나 분노를 묻는 가족이에요. 남편은 어떻게 보면 저보다도 더 부모님을 어려워하고 불만이 많아요. 그런데 그것들을 애써 묻고 없는 것처럼 살아요. 이 가족의 첫 갈등이 저와 어머님의 고부갈등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제가 가서 한 일은 묻어뒀던 갈등을 표면화시킨 거죠. 

 

: 말만 들어선 시댁에선 아무도 싸우지 않을 거 같은데, 그런가요?

 

: 남편이랑 시어머니가 싸우는 걸 보고 제가 경악을 했어요. 저도 부모님이랑 자주 다투지만, 한번도 남편처럼 한 적은 없어요. 자기 엄마랑 싸우는데 ‘와... 엄마한테 저렇게 성질내네’ 했죠. 근데 더 황당했던 건, 그렇게 미친 듯이 화를 내놓고 십 분도 안돼서 아무일 없던 것처럼 밥을 먹더라고요. 

 

: 아냐. 십 분은 아니고… 한 두 시간 지났어.

 

: 성질내는 거 보고 제가 다 심장이 벌렁벌렁 했는데, 둘은 평화로워요. 그런데 금방 화해하고 푸는 게 아니라 싸우면서 수면에 올라온 갈등이 있었는데 그걸 서둘러 덮는 모습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결혼하고나니 그게 문제가 되더라고요. 저는 그런 식으로 불만을 묻는 사람이 아닌데, 남편은 뭔가 수면으로 올라오면 서둘러 묻는 패턴이 반복되었으니까요. 

 

: 본질에 못 다가가는 거죠. 감정싸움만 하고.

 

: 본질을 회피해도 싸울 때 감정은 상하지 않아요? 

 

: 상하죠. 그런데 싸워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거든요. 어머니랑 싸우면 종국에는 어머니의 ‘어따대고 엄마한테'로 가게 돼요. 어쩌면 그래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거 같기도 해요. 본질은 안 건드렸으니까. 그 짓을 한 서른 넘게 했죠. 

 

지금 생각하니까 진영이한테 고맙긴 하네요. 삼십 넘게 쳇바퀴만 돌다가 이제는 제가 싸우는 법을 좀 익혔거든요. 그리고 어느 집이나 부모 자식 관계에 모순이나 앙금이 있잖아요. 그걸 진영이가 빵 때려서 터트려준 것 같아서, 저도 해소된 게 많았어요. 

 

 

B급 며느리

 

결혼 전부터 시어머니는 진영에 대한 요구를 숨기지 않았다.

처음에는 진영도 어느 정도 요구를 수용했다.

결혼 후, 시어머니의 요구로 진영이 시댁에서 산후조리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쌓인 감정은 1년이 지나지 않아 폭발한다.

진영은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짊어져 온 모든 억압과 착취에 맞서겠다고 다짐한다.

 

: 처음에 진영 씨가 빵 때렸을 때는 어땠어요? 

 

: 진짜 깜짝…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저는 안보고 사는 게 좋습니다.” 이걸 영화나 책이 아니고 실제로 보면 진짜 입이 떡 벌어져요. 우리나라에서는 어른한테 말을 돌려 하잖아요. 진영이는 그런 거 없고 기분이 너무 나쁘다고, 우리 집에서 나가달라고 하는데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처음에는 또라이 아니냐고 그랬죠.

 

: 각자의 인생에 충실하자고 했잖아. 그 정도면 잘 말한 거지.

 

: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내가 A라고 생각해서 A라고 말했는데 뭐가 잘못 됐어?’ 하더라고요. 그런데 틀린 말이 아니라서 할 말이 없는 거에요. 그래도 말을 좀 돌려서 해야되는 거 아니냐니까 ‘시부모님들은 왜 돌려서 안 해?’ 그래요. 생각해보니 그것도 얘 말이 맞아서 나도 막 동조가 돼… 하여튼 설득력이 있어요. 

 

: 이렇게 설득이 잘 되는데도 진영씨가 느꼈을 때 장벽이 있었어요? 

 

: 남편은 설득이 돼요. 그렇지만 정작 그런 시부모님께 하면 어떻게 우리 부모한테 그럴 수가 있냐고 난리를 치는 거에요. 남편이 정말 미웠던 지점이죠. 저는 적어도 시부모님한테 감정조절을 못하고 덤빈 적은 없거든요. 

 

: 맞아요.

 

: 흥분해서 막말을 하신 건 시부모님이에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가 드러누우면 모든 비난이 저한테 오는 거에요. 그 전까지 제가 들었던 폭언은 다 공중으로 가고, 오히려 폭언을 듣고도 흥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잘못은 다 저한테 오더라구요.

 

: 그럴 땐 진영이가 너무 인간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 시부모님들 입장에선 나를 미워 할 수 있어요. 친자식도 아니고, 본인들 입장에서는 조용하다고 생각한 집에 분란을 일으켰고, 세트로 내가 손자도 안보여 주면. 그런데 남편 너는 뭐냐? 너무 서운한 거에요. 그리고 사실은 제 이런 모습을 연애 할 때 굉장히 좋아 했거든요.

 

: 아니 아니야. 그런 모습을 좋아한 게 아니야.

 

: 독특하다면서 저한테...

 

: 아니라고, 그 모습 아니라고.

 

: 너 정말 특이하다, 다른 여자 같지 않다.

 

: 이 정도인지 몰랐지.

 

: 이러면서 좋아 했는데 그게 본인 엄마랑 부딪치기 시작하니깐.

 

: 아니야. 아니야.

 

24시간 함께하는 사람들의 티키타카에는 힘이 있다. 나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다.

 

: 제 성격은 변한 게 없는데 전에는 좋다더니 이젠 비난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나를 이해하는 그런 사람 아니구나 생각했죠.

 

: 아니~ 그게 아니라

 

: 저희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그랬어요. 네가 지금 젊고 예쁘니까 비위 맞춰주는 거라고.

 

: 그래도 지구인일줄 알았던 거야. 나는.

 

: 그 말이 딱 맞았어요.

 

: 첨 봤다니까. 태어나서 첨 봤다니까… 

 

정적

 

: 그… 저희 무슨 얘기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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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며느리는 어떤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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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가족들은 저마다의 정의를 내린다.

진영의 답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진영은 며느리가 어떤 사람인지 행동으로 보여준다. 

 

: 영화에서 가족들이 저마다 며느리를 정의하는데, 정작 주인공의 대답은 못 들은 것 같아요. 진영 씨는 며느리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 한마디로 남이에요, 남. 자기 아들과 결혼한 여자를 부모들이 그렇게 부를 뿐이지, 이 여자의 원래 정체성 중에 며느리라는 건 없어요.자기 존재를 규정할 때 며느리라는 정체성에 맞춰 생각해온 여자는 없을 거에요. 

 

아들이랑 결혼하는 여자는 아들과 서로 사랑하는 여자면 족하죠. 애초에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에게 무엇을 해주는 존재가 아닌데, 그 의무감을 좀 벗었으면 좋겠어요. 아들과 결혼한 여자는 그냥 아들과 결혼한 여자라는,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봉사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해서 뭔가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묶이는 순간 상대의 존재 자체가 부담인거죠. 그리고 거기서부터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 부부의 관계가 다 어그러지는 거에요. 저희 부부가 겪었던 거처럼. 

 

: 그렇다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잘 지낸다는 건 어떤 거에요?

 

: 기본적인 인간관계랑 같죠. 배려랑 커뮤니케이션이요. 저희 시어머니 인간관계 좋으세요. 굉장히 매너 좋고, 쾌활하세요. 근데 유독 며느리를 대할 때는 인간관계의 모든 규칙이 날아가 버려요. 제가 거절하면 “어디 시어머니한테” 이렇게 난리가 나는 거에요.

 

: 내용보다는 거절 자체를 못 견뎌하시는 게 있어요. 특히 며느리가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말대꾸를 한다는 자체를 놀라워하신 거죠.

 

: 시어머니는 아들을 명문대에 보내고 결혼도 시켰고, 이런 과정을 거쳐 본인이 사는 삶의 방식이 있었거든요. 자기 인생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 방식을 상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죠. 특히나 상대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 그걸 누가 밀어 넣을 수 있겠어요.그런 관계는 세상에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부당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며느리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막 대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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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범고래

 

: 영화에서 진영 씨가 "진짜 왜 그렇게 나 싫어하는 거야?" 라는 말을 해요. 그동안 호빈 씨는 방관하는 캐릭터로 나와요. 중재 보다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탁구공이에요. 영화에는 왜 방관자 남편만 부각되나요?

 

: 1차 편집본을 보니 남편인 제가 나레이션도 하고, 감독도 하고, 등장도 하는데 거기다 액션까지 많이 하니 너무 과해지더라고요. 제 거대한 변명이 되었어요. 감독이 영화에 나오지 않아도 사람들은 컷마다 감독의 의도가 들어있다는 걸 다 아는데. 

 

그래서 많이 죽였어요. 선호빈을 멍청하고 수동적이고, 비겁한 남자로 깔고 최대한 분량을 줄이자고. 물론 감독으로서 제가 부족했던 부분도 있었어요. 디테일을 잡아줬으면 나았을 거라고 보거든요. 영화에 나온 제 모습 때문에 영화 자체를 싫어하는 관객들이 많았어요. 기자들 10자평 중에도 "남편새끼 뭐야? 2점" 이런 것도 있었어요.

 

: 답답하긴 했어요. 

 

: 좀 억울한 면이 있죠. 남편을 방관자로 넣은 것 역시 감독인 저거든요. 어쨌든 내가 나의 캐릭터를 만져야 하는데 잘 못했어요. 선호빈이 선호빈을 만드니까 대충 툭하고 잘라버리는 면이 있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에도 캐릭터라이징이 있다.

선호빈 감독은 자신의 캐릭터라이징에 조금 실패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호빈은 일관되게 우유부단하다. 편집으로 만들어진 모습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는 실제로 자신을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로 인식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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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인지 남편 캐릭터는 책과 영화에서 다른 사람이에요. 영화에서는 거의 모든 갈등에 있어서 남편 뭐야? 싶은데, 책에선 전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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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빈은 영화 <B급 며느리>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묶어 책 <B급 며느리>를 냈다.

책은 진영과 호빈이 살아온 과정, 만남부터 가부장제와 가족주의에 대한 호빈의 시각을 보여준다.

 

: 와이프 입장에서 제일 얄미운 점이에요. 책을 보면, 이 사람이 통찰력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 근데 액션이 없는거지.

 

: 본질을 파악하는 충분한 안목이 있어요. 다 알아요. 둘이 소주 한 잔 하면서 얘기하면, “엄마는 이게 문제야. 이렇게 해야 돼!” 하고서는 정작 상황이 되면 아무것도 못하고 뒤에서 가만히 있어요. 

 

“아니 왜 그때 입 닫고 가만히 있었어?” 이러면 엄마한테 어떻게 그러냐는 거죠. 너무 짜증이 나는 거에요. 아예 모르기라도 하면 다 알려주면 되는데, 이미 다 알아요, 알면서 이러죠.

 

: 사실은 99% 진영이 말이 맞고, 저도 거의 같은 생각이에요. 저도 부모님들이 불만이고, 저 분들 모순이 장난이 아니라는 거 알죠. 홍준표에요. 근데 우리 엄마잖아요. 아무리 화가 나도 약해지긴 하는 거야. 그게 딜레마였어요. 

 

: 처신이 답답하고 정말 화나요. 책에서 아무리 날카로운 시선으로 고부관계의 모순을 고발했다 해도 현실에서는 진짜...

 

 

고양이 키우는 며느리로 살아남기

 

고양이 사수 사건은 호빈의 딜레마와 진영의 분노가 교차하는 전형적인 예다.

진영에겐 원래 고양이가 있었고, 시어머니는 고양이를 키우면 호빈과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진영은 임신 중에 불려 가 고양이를 버리라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두 시간 동안 듣는다.

호빈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날 진영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돌아왔다.

 

이후 호빈은 진영과 함께 논문을 찾아본 후,

어머니에게 "고양이를 키울 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한다.

 

: 그래도 책에 보면 고양이 얘기에서는 실제 액션이 있었잖아요. 

 

: 그것 말고도 액션은 있었어요. 씨알이 안 먹혀서 그렇지. 

 

: 무슨 액션을 취했다고 썼어요?

 

: 고양이를 키울테니까 음.. 간섭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고양이를 그냥 키울 테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이때 어머니는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B급 며느리 P76, 믹스커피

 

: ?? 오빠가?

 

: 했지! 야! 니가 모르는데 맨날 해. 내가 대전 가면 왜 싸우겠냐?

 

: 고양이는 온전히 제 싸움이었어요. 고양이가 아이한테 손톱만큼이라도 해를 끼치면 내손으로 고양이 치우겠다고 약속을 하고 아이랑 같이 키운 거거든요.

 

: 이건 되게 명백한게, 우리집이니까 우리가 결정하면 돼요. 나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고양이 키우기로 결정했으니 그렇게 알고 계시라고 했죠. 그래도 내려가서 이런 저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 "넌 내 아들이다" 그거죠. "너 누구 아들이야?"

 

: 제가 뭘 하면 안 좋아지는 게 많았어요. 너 벌써 편 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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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땅을 보고, 아버지는 허공을 보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린다

 

: 어머니가 우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때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공간에 있는데 누구도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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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제가 꼽는 명장면 중에 하나에요. 책에 며느리와 어머니를 이등병과 병장, 아버지를 장교로 비유한 부분이 있었잖아요. 그걸 가장 잘 시각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 저는 사실 이 장면에서 무력감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인간과 인간이 이렇게 소통이 안 된다는 것도 그렇고, 부모님들의 설득에 최소한의 돌파구도 없고. 태어나서 이렇게 답이 없는 건 처음 봤어요. 아버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비겁함이랄까, 그런 것도 있고요. 

 

: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

 

: 그렇죠. 자기 때문에 그런건데 사실은. 그런데 그런 태도는 저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 역시 포함된 무력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가부장제를 굳이 까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럴 필요조차 없이 이 찰나로도 이미 웃기잖아요. 

 

: 저는 가부장제라는 틀 안에서 구성원 모두 나름의 피해자라 생각하거든요. 피해자인 동시에 거기서 누린 나름의 기득권을 가지고 서로 아웅다웅 하는 거에요. 내가 누리는 안락함, 내가 이전사람한테 바쳤던  존경과 복종을 나도 받았으면 하는 그런 보상심리를 가지고.

 

남편은 저와 시어머니라는 약한고리에 집중했지만, 제 생각에 결국은 총대를 맨 사람만 짊어지고 나머지는 같은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고개를 돌려서 마치 나는 이렇게 세속적인 일과 상관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 남편도 이 갈등의 당사자인데 그걸 내심 못 본 체 했다는 거죠. 사진처럼.

 

어머니는 진영에게 며느리의 역할을 요구하면서

스스로 며느리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영화는 이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문제는 어머니가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구조임을 드러낸다.

 

: 불쌍하다고만 해요. 엄마의 삶이 불쌍하고, 엄마는 아빠를 위해서만 살았고, 평생 일만 하고...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기 가정 안에서 제 삶이 자기가 연민하는 엄마와 닮아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뭘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심지어 엄마가 아직도 가사 일에 시달리는 게 불쌍하다고 하면서도 대전에 내려갔을 때 팔 걷어 붙이고 엄마 내가 할게, 이런 식으로 나서지는 않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냥 불쌍해만하는 거에요. 

 

: 가부장제가 참 한심하다, 한심해... 하는 태도로 그냥 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잘못한 거에요. 짠하다고 하면서 실제로 몸을 바꾸는 건 정말 오래 걸리는 거 같아요. 

 

: 그 장면에서 울면서 자기 입장을 호소하는 엄마, 고개 돌린 시아버지, 그리고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아들… 이 모습이 이 가족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 그 장면을 얘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되게 좋네요. 그걸 꼽아주시니까.

 

 

그 이후의 삶

 

: 영화를 만들고 나서는 어떻게 지내세요? 놀랍게도 원래 이게 인터뷰의 메인인데요. 영화를 만든 후에 가족들 관계는 어떻게 됐어요?

 

: 어머니가 굉장히 민감해 하셨어요. 영화 만드는 거나, 인터뷰 하는 거나.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는 걸 어머니가 너무 싫어하시는 거에요. 당장 다 지우라고 하고, 영화도 당장 내리라고. 

 

전화하신 적도 있어요. “너 실업급여 받는 장면 빼라”고. 어머니가 자기 친구들한테 호빈이 되게 잘 먹고 잘 산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거에요. 

 

: 아 이거는 생각도 못한 포인트다.

 

: 저는 그 말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자기 자신보다 아들을 통한 성취로 내가 인정받고, 정작 내 안은 공허하달까?

 

: 진영 씨와의 관계는 어떻게 됐어요?

 

: 인터뷰는 진영이가 하니까 당연히 얘 입장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러다보니 거짓말이 아닌데도 어머니 감정이 좀 날카로워졌었어요. 진영이 걔 왜 거짓말 하냐고. 얘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를 던진 거에요. 그래서 사이가 한동안 또 안 좋아져서 제가 아버지랑 자주 통화 하면서 어머니 상태를 체크했어요. 

 

: 왜 지난 얘기를 꺼내서 이렇게 사람 민망하게 하냐 정도의 말이었으면, 저도 충분히 제가 더 조심 하겠다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한다니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심지어 내가 이 영화 찍으라고 한 사람인데. 

 

3년 동안 내가 시간을 헛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시부모님 안 보고 지냈어요. 지난 설날에도요. 시아버지 생신이라 5개월 정도 만에 시부모님을 뵈었는데 이 얘기가 나왔죠. 

 

시어머니가 오빠한테 “너 내 아들 맞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두 분이 나쁘다고 얘기한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이 충돌하는 것에 대한 얘기라고 말씀드렸어요. 어머니께서 저한테 “고양이 키우지 말라고 한 번 얘기했다가 뒤통수 된통 맞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만감이 교차 했어요.

 

: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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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시부모님이 “너는 이제 우리 딸이야.”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실제로는 결혼생활 내내 저는 남이라는 걸 느꼈죠. 

 

사실 늘 알고 있었어요. 저도 제발 그냥 남처럼 대해주길 바라면서 이 싸움을 한 거에요. 그런데 어머니가 저한테 ‘뒤통수를 쳤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이제 진짜 저를 남으로 대하신다는 걸 깨달았죠. 한편으론 서운하면서도, 내가 원했던 제자리라는 게 아마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내는 과정이겠구나 생각했어요. 

 

: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 그런 느낌.

 

: 좀 솔직해 진거지. 그게 낫지.

 

: 스스로도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님이 저를 밀어내는 듯 말씀하실 때 기분이 좀 미묘하더라구요. 제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가족까진 아니어도 하나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이 집단의 구성원은 될 수가 없겠구나, 이걸 깨닫는 게 내심 서운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이었어요.

 

 

진영의 투쟁은 성공했을까

 

: 영화 엔딩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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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반부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진영 사이에도 조금씩 화해무드가 싹튼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무렵 진영이 시부모의 집을 오랜만에 방문한다. 

 

: 엔딩을 좀 비관적으로 하려고 했어요. 지금은 진영이가 시댁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닫고 유쾌하게 끝나잖아요. 영화의 전체 톤과 의미를 결정하는 건 그 다음 씬이거든요. 

 

원래 생각했던 건 우리 집 거실에서 해준이랑 부모님, 제 동생이 밥 먹고 있고 진영이 혼자 일하고 있어요. 그 뒤로 창문 밖에 눈이 막 내려요. 그 장면을 롱 테이크로 넣고 끝내려고 했어요.

 

막상 붙이니까 편집 기사님이랑 피디님이 너무 우울하고 짜증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열린 결말 처럼 현관문 닫는 장면으로 끝낸 거에요. 

 

: 와 우중충해... 실제 결말은 어때요?

 

: 당시에는 실패인 줄 알았는데 실패는 아닌 거 같아요. 부모님이 그 후로 많이 변했거든요. 가부장제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결말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진영이 개인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게 있고 존중하는 게 있어요. 그건 대단한 거죠. 

 

: 선을 좀 지키게 됐군요.

 

: 예. 그걸 넘으면 진짜 고통스러우니까. 그리고 진영이도 생각을 다시 하게 됐다고...

 

: 저는 결혼으로 인해 책임질 범위가 넓어지는 거지 개인의 정체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반대로 시부모님들도 본인들이 살아온 방식이 있잖아요. 어느 순간 이분들한테 제 삶을 존중하라고 말하면서 저는 이 사람들 삶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목표를 수정했고, 그 목표는 완성했어요.

 

: 목표가 뭐에요?

 

: 처음에 가장 큰 문제는 시어머니가 “노”라는 대답을 절대 못 받아들이셨다는 거에요. 본인이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내야만 하는 분인데, 이걸 저희 결혼 후에도 계속 하려고 하신 거죠. 지금은 저희 쪽에서 거부 의사가 나오면 “그래 됐다” 이런 식으로 라도 물러나세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두번째로, 그분들도 저를 어려워했으면 했어요. 시부모님은 저에게 이전에 살던 방식으로 앞으로 못 산다는 걸 끊임없이 어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어떤 것도 그분들 성에 차지 않으면 잘못된 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저를 좀 어려워해주셨으면 하는 게 목표가 되었고, 이젠 실제로 어려워하세요. 저는 이게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제 최종목표는 제가 시부모님을 보살펴 드려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제 마음에 앙금이 없는 것이에요. 

 

: 그런 분들이 많대요.

 

: 가족도 인간관계잖아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인간관계의 평범한 룰이 들어가면 돼요. 낯설 땐 서먹하고, 점점 서로 알아가고, 조심하고, 가까워지고. 고부관계는 안보면 그만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기본 룰을 좀 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 아직도 계속 해 가는 과정인거네요?

 

: 그렇죠. 보통의 인간관계처럼 업 앤 다운이 있어요. 지금은 사실 다운이고요.

 

: 근데 뭐 큰일은 안 일어나요. 옛날이면 난리날텐데.

 

: 그 엔딩장면에 어떤 분들은 굉장히 마음 아파 하세요. 아 저 여자가 결국은 다시 시스템으로 들어가는구나, 이러시는데. 사실은 남편의 나레이션대로 아무도 강요 안할 때 갔다는 게 중요한 거거든요. 

 

: 약간 허무하긴 했어요. 아니 허무하다기 보다는 아쉬웠고, 이대로 접은걸까? 하는 생각도 들고. 

 

: 나름의 과정이 있었어요. 영화에 짧게 나오는데, 저희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이 있잖아요. 그 이후에 저희 부부가 제일 큰 위기를 맞았어요. 실제로 이혼을 생각했고, 남편이 집을 나가있었어요. 

 

아이가 없을 때 정리할 것들이 있어 남편을 잠깐 집으로 불렀고, 그날 제가 울면서 폭발한 날이었어요. 가족 내 갈등을 시어머니가 항상 감정적으로 대하셨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성적으로만 대했는데, 그날은 울고불고 하니까 마음이 너무 상쾌하고 편해졌어요. 갑자기 선호빈이랑 이혼 안하고 살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기고요.

 

: 갑자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남편도 울면서 미쳤다고 그랬어요. 그 이후로 저희가 세 달 가까이 시댁과 아무 일 없이 지냈죠. 결혼 후 처음이었어요. 그때 오히려 자기 객관화가 됐어요.

 

내가 내 삶을 존중해달라고 하면서 나는 저 사람들 살아온 방식을 계속 부정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내 부모님한테도 할 수 없는 것들을 남편과 남편의 가족한테 강요하고 있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어머니가 주는 것들을 기꺼이 받기 시작했어요. 어머니가 보내는 호의적인 제스처라고 받아들이고 결국엔 집까지 간 거죠.

 

그렇게 진영은 2년 5개월만에 시부모의 집을 찾았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 호빈 씨에게도 변화가 있던가요?

 

: 남편은 예전에 부모님의 요구를 절대 이겨내지 못했어요. 서로 사이가 얼마나 악화됐든, 시부모님은 무조건 2주에 한 번은 손자를 보셔야 되는 거에요. 그럴 때마다 남편은 부모님이 오시는 걸 막지 못했고, 싸움이 커지는 것의 반복이었죠. 이제 남편이 하나는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사이가 이렇게 나빠질 땐 절대 부딪히면 안 된다는 거.

 

그리고 시어머니가 거절을 못 받아들였듯 남편은 거절을 못했어요. 부모님한테 안 돼요, 이 소리를 절대 못했죠. 그런 면에서는 혁명적으로 발전했어요. “엄마 안 돼.”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 저는 사실 진영이 덕분에 부모님이랑 뜻하지 않게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됐어요. 싸우기도 엄청 싸우고. 고맙죠.

 

: 이건 제 공이라 생각해요. 남편 가족이 굉장히 많이 가까워졌어요. 

 

: 이렇게 되기 전에 부모님은 내가 어떤 앤지 전혀 모르셨더라고요. 진-짜로. 이젠 내가 자기들 기준에서 얼마나 비뚤어지고 엉망인지 드디어 깨달으신 거에요. 그게 제 솔직한 욕망이거든요. 어려서부터 저는 그런 얘길 안 했어요. 그럼 혼나니까. 

 

그래도 이제 거절이든 대화든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럽긴 했는데 이건 진보죠. 서로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 

 

 

비겁한 평화

  

: 영화에서 마지막쯤에 진영 씨가 고부갈등의 본질에 대해 얘기를 해요. 본질은 뭐에요?

 

: 본질은 너무너무 복잡해요. 저희 시부모님은 아들한테 느꼈던 서운함과 동시에 자식이기 때문에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며느리에게 돌려받기 원하는 보상심리를 가지고 계셨어요. 육체 노동보다는 감정 노동으로 힘들었어요. 내가 마음이 닿지 않는데도 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것들, 그리고 나에게 행동을 강요함으로써 내 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그 요구들? 그런 것들이 굉장히 절 힘들게 했고, 요구한 것들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친정에서 너를 어떻게 가르친 거냐, 하는 식의 지적을 받았죠. 반대로 제 친구 같은 경우는 무관심 땜에 힘들어해요. 시부모님이 손자도 일 년에 한 번도 보러 안 오신다고 너무 서운해 하더라고요. 고부갈등이 떠오르는 양상은 가족마다 너무 달라요.

 

하지만 본질은 부모와 아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관계, 그 관계의 부조리가 그대로 며느리한테 더 심화돼서 옮아온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며느리는 감정적으로 조금 더 수고스러워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있으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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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제가 우리 시부모님들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고 아들도 착하게 잘 키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말을 콕 집어서 너희 시부모님 못된 사람 아니라고, '너 정도면' 되게 편하게 사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아요. 물어보고 싶어요. 그럼 며느리는 어느 정도 감정적 수고는 그냥 감수하면서 사는 사람이야? 

 

우리가 살면서 결혼과 같은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서 인생이 조금 더 개선될 걸 기대하잖아요. 누가 감정적으로 힘든 걸 굳이 선택하겠어요. 저한테 결혼은 인생을 건, 말 그대로 빅딜이었거든요. 저는 제 인생이 행복해지고 개선될 걸 기대하면서 결혼을 선택한 거에요. 그런데 그 선택으로 인해서 내가 나를 죽이고, 감정적으로 힘든 것을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그게 당연한 삶을 살게 된다면 여성이 왜 결혼을 하겠어요. 저는 며느리에게 기대되는 감정의 디폴트값은 옳지 않다고 봐요. 

 

선호빈 감독은 어머니와 아내 진영의 갈등으로 가족의 평화가 산산조각 난 후에야

자신이 지키려던 평화가 며느리가 짊어진 감정의 디폴트값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지키려는 평화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누군가를 짓밟고 그 사실을 모른 체하며 기만적으로 이루어낸 것은 아닐까?

그것은 혹시 비겁한 평화가 아닐까?

B급 며느리 P5, 믹스커피

 

: 이때까지 어떻게 이렇게 지냈을까요? 얘가 얘기하니 저도 이제서야 궁금해지더라고요. 

 

: 내 말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어?

 

: 진보, 보수 이딴 거 다 떠나서 몇 년 전에는 사랑과 전쟁같은 프레임 말고는 이런 얘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게 어떻게 가능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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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봐요. 고부갈등을 겪고 있는 여성들조차도 제 이야기를 보고 ‘나는 더한 시집살이를 하는데도 시댁 간다’거나, ‘좀 더 부드럽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시어머니는 저렇게까지 안 심해서 다행이다' 라는 식의 리뷰를 했더라고요. 쓰라린 경험이었어요.  

 

: ‘우리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 태도는 문제가 있어요. 다른 회사는 아닌데 우리 회사 사장은 주휴수당 챙겨줘서 다행이다? 그건 그냥 운이에요. 운이 아니라 당연한 게 되어야 하잖아요. 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게 야만적인 사회인 거죠. 그런데 이게 극단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이에요. 가족의 영역은.

 

: 시어머니 때문에 결혼생활에 질이 좌우되는 거 자체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 시스템이에요. 그런데도 내가 겪지 않는 고부갈등은 다 사랑과 전쟁 영역으로 몰아넣는 거죠. 저 여자들은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걸 왜 저렇게 시끄럽게 살까, 생각하면서. 

 

: 그런 반응을 봤을 때 영화에 가족의 모든 것을 노출한 게 부끄럽다거나 하진 않았어요?

 

: 결혼을 하고 들여다 본 시댁은 분명히 이미 문제가 있는 집이었어요. 지금 보시면 알겠지만 남편은 감정표현도 풍부하고 굉장히 수다스럽잖아요. 선호빈은 그런 사람이에요. 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 원래 내 직업이 감정에 대해서 세밀히 분류하는 직업이니까.

 

: 그런데 부모님들 앞에 있으면 꿀 먹은 벙어리에요. 아버지랑 얘기하면 사적인 얘기는 아무것도 오가지 않고 새로 난 도로 얘기만 해요. 시아버지 역시 저에 대한 불만이 있으셨어요. 오히려 시어머니보다 훨씬 저를 심각하다고 생각하시고.

 

: 오히려 아버지가 신념이 투철하시거든요. 

 

: 그걸 저한테 한 번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어머니보다 훨씬 감정적이셨어요. 친정에서 그렇게 가르쳤냐는 말까지 저한테 하셨는데, 저는 그때 그동안 왜 말을 안하셨을까, 생각했어요. 

 

문제가 있으면 꺼내놓고 고치는 게 당연한데. 그동안 서로 묻고 모른척하고 서먹하게 있는 게 화목한 가족이라고 꾸려나가고 있었던건가 이 사람들은? 저는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그 구조가 굉장히 우습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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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저는 고부갈등을 여자들의 편협함 때문에 벌어지는 캣파이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꼭 지적하고 싶어요. 고부갈등이야 말로 불만을 얘기함으로써 문제를 고치려는 용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요. 실제로 저희 가족과 시부모님 사이에 변화가 시작된 계기는 저랑 어머니가 문제를 표면화시켰던 순간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고부갈등을 그런 식으로 폄하하지 않았으면 해요. 여자들의 이런 의사표현이 한국의 가족문화를 계속 바꿀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여성들이 노동을 얼마나 하느냐를 떠나서 오랫동안 내려온 이런 가족구조 안에서는 여성이 자존감을 지키며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들어요. 구조가 주는 자괴감이 있거든요.어머니 세대의 여성분들 히스테릭한 면이 있으시잖아요, 피해의식도 있고. 저는 한편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구조 안에서 몇 십 년 동안 살아왔다면 저런 것들은 그냥 얻게 되는 것인가보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 둘이 소주 한 잔 하면서 많이 했던 얘기에요. 엄마들은 왜 다 그럴까? 그러면서.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된다면

 

: 이상적인 가족상이 있어요?

 

: 제가 가정을 꾸리면서 가졌던 확고한 기준은 가족이 서로 희생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거였어요.

 

제가 친정부모님과 사이가 많이 틀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희생이거든요. 부모님은 아주 전형적으로 희생적인 분들이에요. 제가 저희집에서 공부를 제일 잘 했기 때문에 저를 공부 시키는데 모두 매달렸어요. 

 

‘내가 이걸 놓으면 이제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지, 너무 걱정이 됐기 때문에 하기 싫은 공부를 놓지 못 했어요. 역시나 제가 공부를 그만 두겠다고 한 순간 엄마, 아빠의 이혼 얘기가 오갔어요. 이제 우리는 살 이유가 없다고. 

 

그 순간이 무서워서 그 분들의 희생이 제 발목을 잡고, 제가 그 분들 발목을 잡고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살았죠. 서로의 인생을 옭아매고 서로에게 봉사하는 존재로만 존재하게 되는 거? 가장 비극적인 가족의 모습인 거 같아요. 

 

: 진영이가 사법고시 관뒀을 때 부모님의 저항이 엄청나게 왔어요.

 

: 자기만의 인생을 꾸린 게 없으니까 자식이 성공해야만 인정받게 된 거에요. 제가 사법고시 1차 합격했을 때 아빠 사업이 이미 기울고 있었거든요. 그랬더니 아빠가 저한테 훨씬 집착하게 됐어요. 그땐 아빠 인생에서 단 하나라도 완성할 수 있는 게 제 공부였던 거죠.

 

진영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명문 대학에 진학했고, 역시나 부모님의 뜻에 따라 고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응시한 사법고시 1차에 붙어버렸다. 부모의 자랑거리였지만, 숨이 막혔다.

사실 의대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내 고시 공부를 그만두자 부모님의 지원은 끊겼다.

진영은 스스로 돈을 모아 의대에 진학하려고 했다. 그때 아이가 생겼다.

 

: 저희는 고정 소득원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했고, 아기가 다섯 살 될 때까지 정말 어렵게 살았어요. 그렇지만 남편한테 무조건 돈 벌어오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결혼했기 때문에,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내가 꿈꿨던 미래를 포기하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저도 강요받고 싶지 않고, 남편한테도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거든요.

 

두 번째 목표는 자식을 키우면서 가지게 됐는데, 나중에 아이가 제 도움 없이 자립하는 존재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에요. 어느 순간 완전히 내 영역 밖으로 나가게 되는 걸 항상 염두에 두면서 키워요. 그 순간이 되면 공허하고 슬플 수 있겠지만, 부모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가장 상처 받는 건 자식인 것 같아요. 자기 인생을 살지도, 그렇다고 부모를 위해서 살지도 못하고, 그냥 부유하는 인생이 돼버리는 거 같더라구요. 

 

: 그렇군. 되게 말을 잘 하네요. 

 

: 나중에 어떤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가 되고 싶으세요?

 

: 그런 상은 없어요. 대신 해준이와 저의 관계가 저와 아버지 관계처럼 안 됐으면 좋겠다는 목표가 있어요. 저한텐 되게 큰 목표인데, 잘 될까 모르겠네요. 제가 꼰대가 되더라도 뭐랄까...

 

: 열린 꼰대?

 

: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사회인이었으면… 생각해보니 진영이가 정확히 봤네요. 그런 게 없거든, 아버지랑 내가.

 

: 근데 그런 교류가 왜 없어요? 저는 그게 좀 신기해요.

 

: 시아버지 세대 남자들은 감정 표현하는 거 자체를 수치스러워 하죠.

 

: 맞아요. 감정 표현이란 남자로서 하면 안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아요. 하다 못해 옷 색깔이 맘에 안든다고 해도 남자 새끼가 뭘 그런 걸 신경 쓰냐고 하시고. 저도 제 감정을 어려서부터 솔직하게 얘기하면 굉장히 변태 취급을 받았어요.

 

: 그런 시대였으니깐요.

 

: 그랬던 거 같아요. 저는 그 감정적 결핍을 영화쪽에서 찾았고, 지금도 영화 찍는 거 같애요. 아버지의 관점에서 영화는 되게 허상이라서.

 

: 진영 씨는 어떤 시어머니가 되고 싶으세요?

 

: ‘어떤’ 시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해준이의 엄마죠. 제가 그럴 생각도 없지만, 해준이가 커서 제가 찍어주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해준이가 결혼하겠다는 아이가 제 마음에 안 들 수도, 아니면 완벽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이 없죠.

 

아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지속되고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는 제 손을 떠난 일이기 때문에 해준이가 선택한 여성에게 제가 어떤 존재가 되어 주겠다는 각오는 없어요. 저는 해준이의 엄마니까 해준이를 사랑으로 키워주고 싶고요. 해준이가 자존감을 가지고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아이로 자란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 이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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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악이 있다. 그것도 아니면 손 쓸 수 없이 해묵은 부조리가 있다. 대부분 눈 감고 넘어간다. 손 흔들고 일어나봐야 바뀔 가능성이 적다. 그래도, 가끔은 일어나 외치는 사람이 있다. 

 

기획 인터뷰 <그 이후의 삶>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같은 일을 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 위해 걸어야 할 것은 많다. 선호빈, 김진영 부부는 가족을 걸었다.

 

다른 공익제보자들처럼, 이 부부는 가족주의에 겨우 작은 균열을 하나 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실금 하나다. 이것으로 부조리가 눈 녹듯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균열이 생겨야 부숴질 가능성도 생기는 법이다. 

 

바위를 내려치는 계란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영화 <B급 며느리>는 그래서 소중한 기록이다. 이 행위가 역할을 수행하는 장기판의 말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이라서.

 
 

 

 

편집부 주 
 
 
본 이너뷰 기획 시리즈는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한다. 
사회를 위해 용기냈던 분들을 딴지 기자들이 돌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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