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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독충들을 열 토막 내라

 

고려 제19대 왕 명종의 치세는 가히 난세였다. 명종 자신, 그 묘호인 명(明)과는 전혀 달라 무신 정권 틈바구니의 허수아비 임금에 주색에 탐닉했던 암군이라 할 만했다.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 무신들의 칼싸움이 끊임없이 펼쳐졌고 이에 반발한 지역의 반란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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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수도라 할 서경을 중심으로 한 반란은 그 주도자였던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고, 전주의 노비들이나 공주 명학소의 천민들도 봉기했다. 청주는 그 지방 출신들끼리 싸움이 붙어 청주 토박이들과 개경에 거주하던 청주 출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난세 와중의 1179년 서북면 지병마사로 있던 이부라는 자는 끔찍한 계획을 세운다. 서북면 지역의 껄끄러운 분위기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그가 낸 꾀는 다음과 같았다. 병사들이 서북면 각지를 돌며 방을 붙였다.

 

“굶주린 사람들은 서북면 5개 성으로 오시오. 그대들을 위한 양곡을 쌓아 놓았소. 와서 마음껏 가져가고 이제 반란의 무리에서 벗어나 폐하께 충성하시오.”

 

배고픈 양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다섯 개 성에는 서북면의 관군들이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었다. 양민들이 남부여대하여 식량을 퍼 갈 그릇이며 단지들을 들고 희희낙락 성문으로 들어선 이후 육중한 소리를 내고 성문이 닫혔고 대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부의 명령은 잔혹했고 실제 현장에서는 더욱 참혹하게 이행됐다. 봉쇄된 성 안에서 관군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서북면 사람들을 쓰러뜨렸고, 칼을 쓰다가 쇠가 상하면 몽둥이로 때려죽였고 여인들은 글자 그대로 능욕의 대상이 되었다가 쓰러져 갔다.

 

오늘날 평안도 가산의 옛 이름인 가주성 역시 비슷했다. 이 성에 들어온 양민들은 앞다투어 식량 창고로 들어갔는데 학살이 벌어지면서 창고 안에 고립됐다. 밖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똑똑히 본 고립된 양민들은 나갈 수도 버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창고에 불을 지른다. 누가 부싯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터, 나뭇가지를 죽어라 비벼대 낸 불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저항이었다. 이로 인해 양민들의 목숨과 함께 10만 섬의 양곡이 잿더미가 돼 버렸다.

 

서북면 각 성에서 벌어진 학살의 소식은 바람처럼 퍼졌다. 학살을 경험한 서북 지역 민중들은 다시 무기를 들고 저항에 나선다. 이 항쟁의 지도자로 나선 우방전이라는 이였다. 이 사람은 우리가 흔히 보는 단양 우(禹) 씨가 아니다. 소 우(牛) 자를 쓰는 우방전(牛方田)이었다. 필시 농투사니 아니면 노비 출신이 아니었을까.

 

이 우방전의 주도 하에 일어선 서북 민중들은 치열하게 싸웠다. 진압에 나선 안북도호부 판관 함수산이 전사할 정도였다. 끝내 관군의 공세에 진압되고 말았으나 우방전의 봉기와 그에 함께 했던 용사들은 오래도록 서북 지역의 전설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조정에게 이들은 그저 난민일 뿐이었으며 죽어 마땅한 이들의 노략질로 부를 뿐이었고 도살자 이부는 직문하성사에 이르렀으니, 단지 서북 지역 사람들만이 아니더라도 전 고려 백성들이 분노하여 이를 갈았다. 이부가 거들먹거리며 개경으로 돌아온 후 한 하급 관리가 치를 떨며 내건 시가 동문선 부록에 전한다. 작자는 미상이다. 다음 자료(링크)와는 관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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鴆昇而遐慨且蟠 짐승이하개차반

독기 그득한 새 날아올라 멀어지니 분노가 또 몸을 휘감네

 

喝餓魔悉咀惡漢 갈아마실저악한

굶주린 악마를 끝까지 꾸짖으며 악한들을 저주하노라

 

士志竭曷理回處 사지갈갈이회처

용사들의 뜻은 다하였으니 어느 제에야 제대로 된 세상에 돌아와 살 것인가

 

史待刎撻蠱十斷 사대문달고십단

역사는 기다리노라 저 독충들을 때리고 목베어 열 토막 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