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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사람의 아는 언니가 보낸 문자를 봤다. 책을 읽었단다. 그냥 사람 좋은 자연인인 줄 알았더니 사연이 많더란다. 읽고 생각이 많았단다. 이웃으로 살아 줘서 고맙단다. 나도 고맙고 아내가 용기를 얻었다.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도 책을 권유했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말은 우리의 삶이 상호의존적이라는 말이다. 생존에 필요한 것들뿐만 아니라 살아가야 할 의지와 삶의 가치마저도 주고받는다. 친구 아버님도 책을 받으시고는 좋아하셨다.

 

책이 여러모로 고마웠다. 딸아이 친구는 책표지의 클로버 문양을 보고 울 뻔 했단다. 표지를 디자인 해주신 분이 원고를 읽고 감흥받은 부분이 있지 싶었다. 나쁘지 않은 몇몇의 피드백이 조금 우쭐하게 했다. 그간의 삶을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살아온 삶이 변하지 않았고 살아갈 일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순간의 선택들이 이어진 삶이 나쁘지 않았다는 인정을 받았다. 주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을 하지만 사회적 동물은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다. 어찌나 민감한지 재판이 끝나고 시흥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던 말을 건네올 때 고마웠던 마음도 들었다.

 

 

 

2.

 

설 연휴가 끝나고 출근한 공장 한구석에 폐지를 쌓아두는 곳이 있다. 우리 작업 공간과 물리적 거리가 멀지 않아 자제를 포장해 온 폐박스가 쌓여가는 것을 매일 눈으로 확인한다. 그곳에 선물세트를 담았던 박스들이 버려져 있었다. 박스 숫자를 보니 삼만 원 안짝의 샴푸와 햄 세트다.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누어준 물건 같았다. 인간적인 기대가 없으니 서운함이나 굴욕감은 없다. 오너야 배운 게 없으니 그런다 치고 선물을 받아 간 사무실 직원들은 어째서 눈치껏 흔적을 치울 생각을 안했을까 하는 생각에 닿았다. 최소한 접어서 보이지 않게 덮을 수도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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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값이 더 싸고 군대가 지금보다 조금 더 열악하던 시절, 국가로부터 노예나 죄수 대접을 받는 병사들은 서로 군기를 잡았다. 입대일을 따져 서열을 정하고, 일정기간이 되기 전에 하면 안되는 행동을 정했다. 군화끈을 앉아서 묶는 것이 서열이 되고, 겨울철 주머니에 시린 손을 넣는 행위가 특권이 됐다. 지금 보니 장교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병사들이 열악한 처우에 반발해 집단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인다. 현장 노동자의 대부분이 최저임금 적용 대상자인 회사의 경영방침도 비슷한 것 같았다. 작업복 지급을 다르게 하고 점심식사의 국과 찌개를 따로 끓이는 등 미묘하게 차등을 둔다.

 

말콤 엑스가 말한, 들노예와 집노예 같기도 하고 유목민들이 키우는 순록 같기도 하다. 순록을 키우는 북방 유목민들은 어린 순록의 새끼를 간혹 어미에게 떼어내 사람이 사는 천막에서 키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먹이고 가족과 같이 대한다. 가끔 개가 풀을 뜯는 것처럼 사람 손을 탄 순록은 조금씩 육식을 하기도 한다. 순록만 키우는 유목민들이 어린 순록에게 먹이는 육포가 순록일 확률이 높다. 유대감은 상호작용으로 커지는 감정이다. 유목민들은 천막에서 키운 순록을 가족으로 대하고 절대 잡아먹지 않는다. 주인 가족에게 유대감을 느끼는 특별한 순록은 이동 중에 무리가 갈라져도 무리를 인솔해서 적극적으로 주인에게 돌아오고 보상을 받는다. 그 집 순록이 선택받지 못한 다른 순록들을 보는 눈빛이 비슷할 것 같다. 사무실 직원들이 신경쓰지 않은 건 신경을 쓸 이유나 필요를 못 느껴서인 것 같다.

 

사람이 비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은 상대를 동등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때 가능하다. 사람은 동등하다고 느껴지는 대상에게만 도덕을 적용한다. 그런 대상이 상처를 입은 모습을 보았을 때 외면하는 것은 사회적 규율의 지배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양심의 감시를 받는다. 양심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서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한다. 내집단에 느끼는 공감과 충성심만큼 외집단에 대한 경멸과 증오가 학습되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가 저술한 악의 평범성에서도 비슷한 걸 느꼈다.

 

사람의 사회적 관계망이 150명에서 200명이라는 말은 평균의 함정이다. 누군가는 동질감을 느끼고 연민의 폭이 확장되는 대상이 말 못하는 동물에게까지 닿는다. 이명박 정권에서 구제역 파동이 일어났을 때 동물들을 죽이는 역할을 맡았던 공무원들 여러 명이 괴로움에 자살했다. 동물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수의학을 전공한 이들을 도살에 사용했으니 탈이 났다. 반대쪽에는 자신조차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평균을 내면 150에서 200이 되는 듯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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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권력에도 쉽게 중독되는 사람들을 보았다. 처음 인터넷에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던 사람도 그랬다. 노동조합의 창립에 참여하고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다. 초기 노동조합의 기세가 강성한만큼 특권의식을 갖게 되었다. 새로 들어온 신입 사원의 일이 늦다고 내치기도 하고, 자신의 말에 대들었다고 안전화를 벗어 회사 동생의 얼굴을 때렸다. 징계 위원회가 열렸다. 노조 측 위원 3명과 회사 측 위원 3명, 대표이사가 위원장이었다. 노동조합에서 해고를 주장했고, 회사 측에서 정직 3개월을 주장했다. 그는 3개월 뒤 현장에 복귀해 사측의 사람으로 변했다.

 

권력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 완장을 차게 되면 권력에 취해 안하무인이 되기 쉽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인간의 그런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초심이 아무리 선량하고 올곧은 사람도 권력을 차지하고, 이익을 위해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이면 변하는 게 정상이다. 상대적 약자에게 조금 더 편하게 대하게 되고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자에게는 예의를 보인다.

 

예의라는 건 상대에게 존중받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몸에 익은 배려하는 습관일 수도 있다듣기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을 예의라고 칭하기도 한다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예의에서 아부로 넘어가는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다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둘의 차이점을 구분할 수 있다.

 

 

 

4.

 

무대에 중독된다는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인정욕구의 자극에 중독된 것 같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은 없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나르시즘과 인정욕구가 결합하면 대단한 성취를 이루기도 한다. 듣기 좋은 말에 중독되다 보면 사람이 변하기 쉽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동종 간 유대 감각이 풍부한 포유류는 긍정적 상호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 변화를 모색하기도 한다. 인간의 경우는 조금 더 복잡한 반응을 한다. 교육과정에서는 칭찬으로 행동 변화를 유도하기도 한다. 찬사는 서열 관계나 권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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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개인이 어우러진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으로는 넛지(은근한 상호작용을 긍정적 피드백으로 끌어내는 기술)가 좋다. 강요나 리더의 선민의식은 반작용을 부른다. 인간의 상호작용은 각자의 관계망이 이어진 것처럼 연쇄작용이 되기 쉽다. 연쇄작용도 그 시발점이 있다. 최초의 깨진 유리창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쓰레기가 버려지는 골목에 벽화를 그리는 최초의 누군가가 있다. 각자에게 마땅한 평가가 주어진다면 사회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거라고 생각한다.

 

60년 전만 해도 미국에 흑인은 입장할 수 없는 식당들이 있었다. 어느 날 흑인 남성들이 식당에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사회가 유지되는 관성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제재를 당했다. 흑인들은 끌려 나왔고 맞았다. 그 과정이 티비로 송출되었다. 그 장면을 눈으로 본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맞아야 하는가? 그런 과정들이 여러 곳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되었다. 흑인들의 입학을 불허했던 학교나 흑인들이 앉을 수 없었던 버스 의자에서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그리고 60년이 지나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최초의 시도를 한 사람들과 티비에 송출시킨 사람들과 그것을 보고 생각을 한 사람들 모두가 상호작용한 결과다. 성향이나 사고 방향에 따라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나는 많은 대중에게 문제의 장면을 보여준 기술의 발달이 조금 더 필수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시도를 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시대마다 있어 왔고 질문에 맞는 답을 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일정 수를 넘어서고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임계점을 넘긴 건 기술의 발달로 가능했다.

 

박근혜 정권의 탄핵이 가능했던 것도 통신 기술의 발달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상호의존적이고 서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통신기술의 발달로 더 많이 더 넓게 연결되면서 피드백이 빨라졌다. 이전에는 세대구성이 변할 때나 겨우 한 번씩 가능했던 사이즈의 사회적 운동들이 상시로 가능하다. 사회적 변화가 가능한 에너지의 절대량만이 문제는 아니다. 심리적 피로감과 운동에 저항하는 기득권들의 연합도 더 공고해지기는 했다. 통신 기술의 발달을 인민통제에 사용하는 지금의 중국 권력이 잘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따라쟁이들이 줄 것도 같다.

 

다시 인정욕구로 돌아간다. 상사의 어색한 농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부하나 오너의 생각 없는 결정을 결단력으로 포장하는 직원의 반응도 상대에게는 인정욕구를 충족시킨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인지하면 적극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다. 절제가 없는 서열확인이나 권력행사를 갑질이라 부른다. 상호의존적인 인간이 한쪽의 감정만을 충족시킨다는 건 감정의 착취다. 만족감을 얻는 당사자에게도 자위행위와 다르지 않다. 자위행위에 중독된 원숭이처럼 끝이 좋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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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사를 하던 김문수 씨가 원래 권력지향적인 인간이었는지 자신의 헌신을 알아주지 않는 대중에 대한 복수심을 느끼고 변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어쨌거나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타인이지만 우리는 서로 사회 관계망 속에 얽혀 있기에 평가를 주고받는다. 그가 우리를 치워 버려도 좋을 쓰레기처럼 취급했던 기억이 남아 있을 수는 있다.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향상심은 경쟁심을 부르기도 한다. 나는 그보다 더 쓸모 있고 괜찮은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다수의 타인에게 돌렸을 때 부정당하기가 쉽다.

 

방법을 바꾼다. 나는 권력을 가져보지 않았기에 힘이 주어지면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없다. 초기에야 초심을 유지하겠지만 변한 환경에 적응하다 보면 대다수처럼 변할 수도 있다. 김문수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도 상대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은 사람들을 안다.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절대권력의 자리에서 권력에 취하지 않았다. 책을 발간한 일로 약간 우쭐해지려는 마음이 다시 가라앉는다.

 

 

 

5.

 

명절이 지나고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에게 책이 나온 일을 알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버지는 명절에 어디 갔었는지 물었다. 집에만 있었다고 하니 자신이 시설에 들어갈지를 물어온다. 집안일이 버거운 건지 외로운 건지 모르겠다. 시설에 들어가는 건 쉬워도 나오는 건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시설에 입소하는 사람들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복지사업가들이 더 많다. 아는 곳이 있거나 운이 좋아 좋은 곳으로 들어간다면 모르지만 시골 한적한 곳에서 통장 뺏기고 휴대전화 뺏기면 방법이 없다. 발작 증상을 일으키는 환자들을 위한 무기력 유발 주사라도 맞으면 가망도 없다. 혹시라도 시설에 입소하려면 도시로 가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삶은 세대를 통해 이어지고 유한을 살면서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상속은 신성한 권리다. 여전히 아버지는 나의 한계를 규정한다. 인과의 사슬을 내 대에서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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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일기가 출판되는 데 일조한 사람들이 용산에서 얼굴을 보기로 했다. 2년 전부터 출판을 추진한 투아웃 님과 그 제안을 받아 출판사를 연결해 준 죽돌 편집장, 그리고 출판사 생각비행의 손성실 대표다. 나는 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과는 별개로 천성이 선하지 않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도마와 결이 통한다.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는 다른 제자들 앞에 그 손의 못자국을 만져 보고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 보아야 사실을 인정하겠다던 성정과 닿는다. 눈앞에 드러난 현실은 승복하고 인정한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과 하등 연관 없는 일에도 선의만으로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 있다.

 

원고를 선고하고 교정하는 기간에 투아웃 님 집안에 우환이 있었다. 알았더라면 부탁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환 중에도 원고를 다시 읽고 표현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고쳐주었다. 이익이 없음에도 출판사를 연결해 준 죽돌 편집장은 홍석동 씨 납치 살해 사건만으로도 그의 삶이 지향하는 부분을 알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홍석동 씨 아버님의 처지와 마음에 공감이 가서 고마웠다. 그 건을 빌미로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중파와 종편에 소스를 개방해서 사건의 빠른 해결을 도모했었다. 요즘에는 아이와 아내를 보며 가장의 무게를 느낀다고 말한다. 인생이 굴곡에 들어 현실주의자로 변한다고 해도 가족을 팔아 자신의 변심을 변명할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손성실 대표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책을 위해 그동안 돈을 벌어 출판사에 넣었다고 한다. 출판사를 구성하는 다른 팀원들도 다들 생계를 위한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형편이라지만 하루에 세 시간씩 자며 다른 출판사의 교정 알바를 하는 그의 희생이 끈끈한 팀웍을 이루는 아교다. 범우 일기는 그의 발자국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오점이 되지 않기 위해 남은 삶을 잘 살아야 한다는 부담이 적당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사회적 지위는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변변찮게 살아온 삶을 기록한 글이 책으로 만들어졌다. 고마움은 빚으로 남는다. 부담을 두지 말라고 하지만 부담을 가져야 한다. 나는 태생이 선한 사람은 아니다. 고마움이 당연함이 되어 버리면 삶의 방향이 변한다. 대화가 주제 없이 흐르지만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4인용 식탁은 서로에게 집중하기 좋은 공간이다.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손성실 대표에게 물어보았다. 출판업계가 어떤 메카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부담을 갖지 말라며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1쇄로 1000부를 찍었다. 이 중 50부 정도를 증정용으로 돌리고 450부를 서점에 배포했다. 배포된 책이 잘 팔리는지는 알지 못한다. 출판사에서 책을 백 권 정도 만들어서 이제 겨우 자생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조금씩 자금 순환이 된다. 처음 만든 책은 김대중 대통령 미공개 사진집인데 광주 서점에서 자신이 팔아 보겠다며 200부를 주문했다가 몇 달 후에 199부를 반품했다. 출판시장은 가늠할 수 없다. 이익을 보고 책을 만들지 않는단다.

 

판촉을 위한 행사가 있다면 참가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동안 그런 일이 없어서 작가들 중에 실망하시는 분도 있었단다. 불특정 다수의 대중 앞에 노출될 일은 없다는 안도감과 출판사에 손실이 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숨이 된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선의가 이어져서 만들어진 책이다. 책을 좀 만들어 봤다는 죽돌 편집장의 기억에 처음 있는 일이고, 손성실 대표에게는 두 번째로 의미가 있었던 작업이라고 했다. 투아웃 님의 선의가 그렇게 증폭되어 나에게 닿았다. 그 선의를 증폭해서 다시 넘겨주어야 한다. 적어도 내 선에서 꺼트리지는 말아야지 하는 게 자존심의 최저치다.

 

인터넷 판매 현황을 물어보았다. 가장 많이 팔린 곳이 알라딘이고 아홉 권이 팔렸다는 것만 가르쳐 준다. 후하게 생각해도 인터넷 판매로 팔린 것이 50권 안짝일 것 같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한 것들은 한두 달 지나야 예산이 집행될 것이다. 사준 분들에게도 빚을 졌다.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도의상 맞다. 도의는 법이나 규율처럼 행위를 규제한다. 우리가 공유하고 공감하는 상위의 개념이다. 의식하고도 어기는 순간 죄책감과 불편함으로 스스로를 응징한다. 투아웃 님이 부담되지 않도록 책을 산 사람들과 식사 약속을 잡기로 했다. 부담이 되지만 거절할 수가 없다. 한두 시간 일찍 가서 벙커1에서 커피를 마실 생각이다. 식사와 반주 자리가 번잡하거나 시간이 이른 분들은 거기에서 뵙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내에게 혹시 지방에서라도 이런 요청이 있으면 움직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연을 할 주제나 실력은 못 되지만 고객 분들의 선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어떻게든 할 생각이다. 그 상호작용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억이었으면 좋겠다. 다만 가족의 치부가 너무 드러나 필명으로 책을 낸 사정을 해량해 주시기를 바란다.

 

 

 

 

파카한일유압의 부당한 정리해고 이후,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까지 1334일이 걸렸다.

세상에 큰 뉴스 많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딴지 필진 범우는 이에 맞서 투쟁한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본인의 성격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하게.

 

그와 그의 가족에게 참으로 무거운 날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던 노예의 다른 이름이다.

근로자는 착한 노예. 노동자는 불순한 노예.

 

 

이 시대 노예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고 때론 발버둥치고, 때론 포기하고,

때론 관조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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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일기(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