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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망언으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지지율이 어디서 어떻게 빠졌는가'이다. 연령별/지역별 조사에서 지지율이 가장 많이 빠진 집단은 TK다. 무려 13.6%가 증발했다. 20대보다 60대 이상에서 더 많은 지지율이 빠졌다. 진보의 고정관념으로는 기이한 일이다.

 

이런 결과는 주대환 선생께서 명저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와 그간의 활동에서 보여준 통찰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분의 사상에서 배울 점이 한두가지겠냐마는, 이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한 줄 요약하면 이렇다.

 

 "반대진영의 유권자는 내가 생각하는 만큼 어리석지 않다."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TK 사람들은 신군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짓이 엄연한 폭력이며 비극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망언에 화낼 줄도 안다. 진보진영의 도그마와는 반대의 현실이다.

 

진보의 오랜 도그마는 보수 유권자들을 아직 깨어있지 못한 계몽의 대상이나 계몽의 희망이 없는 '노답'으로 정의했다. 정치권에서부터 유권자에 이르기까지 이런 사고를 다같이 유통하고 강화했다. 이로부터 우리가 익히 아는 풍경들이 도출된다.

 

- 노년층은 군부독재에 세뇌되어 사고가 경직되었다는 논리

- 혹은 군부독재에 너무 학대당한 나머지 압제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맞는 아이 신드롬' 논리

- 그리하여 명절날 도시에서 온 젊은이가 친척 어르신들에게 정의와 민주주의를 강론하는 모습

- "노인들은 노답이면서 투표는 열심히 하니 빨리 죽어야 한다."

-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이 개인의 일탈일 수 없는 사실

- 타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보수 지지층은 자신과 달리 순진한 백지 같아서 조중동과 가짜뉴스에 쉽게 세뇌된다는 믿음

- 그러므로 진실을 더 빨리 더 많이 알리고 깨우쳐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순진한 유권자들이 더 이상 속으면 큰일난다는 걱정은 참여정부 시대에도 있었다. 공중파에서 따로 코너를 마련해 조중동의 기사를 지적하던 그때는 이미 방송의 영향력이 신문지면을 완전히 압도한 후였다. 유권자들은 방송이 아니라 신문지면에만 선택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적다. 

 

'깨어있는 시민'의 세계관은 동료 시민을 무시하는 동시에 정권의 실패를 외부에 전가하는 데에도 편리한 도그마다. 또한 한줌도 안 되는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은 도그마에 소중한 자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권자는 여러분이나 나와 다를 바 없는 지성을 가지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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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를 신뢰하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빨갱이라고 믿는 이들은 소수 있다. 동시에 그때문에 보수정당과 보수언론에 고개를 가로젓는 보수적인 노인들도 그만큼 존재한다.

 

조중동의 선동과 가짜뉴스가 소비된 이유는 욕하고 싶은데 욕할 핑계를 줬기 때문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조중동의 자극적인 기사와 보수인사의 망언을 시원하게(요즘 말로 '사이다') 제공하는 서비스로 인식했을 뿐이다.

 

TK가 그간 지역이기주의에 입각한 투표를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투표란 게 원래 이타적인 행위여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특별히 사악하지도 어리석지도 않다.

 

꽤나 고루한 경기도 시골이 본관인 내 예를 들어보겠다. 평생 보수만 찍던 친척 어르신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서만큼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김대중이 노벨상 타려고 북한에 돈 갖다 바쳤다고 열성을 토하던 분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참담함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들이다. 핑계김에 욕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었지만 정작 남북평화가 가시적인 거리로 다가오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분들은 비용이 들고 필요하면 북한에 저자세를 보이더라도 이 기회에 종전이라는 대어를 거머쥐어야 한다고 확언했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언어화하는 기술이 아랫세대만 못할지언정 지성이 녹슨 적은 없는 것이다.

 

빨간 색안경이라는 장르를 즐긴다고 진짜로 레드컴플렉스 환자는 아니다. 이런 점에서 5. 18 망언뿐 아니라 종전은 아니된다며 열변을 토하고 다니는 나경원의 행보도 지지율 폭락에 큰 공(?)을 세웠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5.18 망언이 당 공식입장이 아니라며 꼬리자르기를 시도하는 나경원의 모습은 우습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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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 18 망언을 포함한 자유한국당의 일련의 언행은 보수층이 용인할 선을 넘었다. 사이다 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니.

 

사실 진심보다 나쁘다. 보수 권력층도 조중동도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하는 묘한 자의식이 생긴 것 같다.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문 대통령의 그것과 반비례해서 조금씩 회복된 이유는 정권에 대한 비판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선동과 가짜뉴스로 유권자의 머리를 매만져서가 아니다.

 

내용의 질을 고려하지 않는 자극적인 선동이 그간 진짜로 통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가 양성평등과 청년정책에서 지지층과 불협화음을 내니 이 기회에 작심하고 망언을 하면 크게 벌 줄 알았으리라. 이 얄팍한 생각을 우리가 느끼면, 보수층 어르신들이라고 못 느낄까? 그분들이라고 광주에서 짓밟힌 보편적 정의를 모를까? 사람은 다 똑같다.

 

진보진영이 자신과 생각이 다름을 무지몽매함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오만하다면, 보수진영은 다름아닌 자신의 소비자를 낮춰본다는 점에서 괘씸하다. 물론 유권자를 자신과 지적 등급이 다른 공략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알릴레오>와 이 방송이 비판하는 보수언론의 시민관 역시 본질적으로 같다.

 

선동에 속는 사람도 있고 태극기 집회에 나서는 이도 있다. 강경한 문꿀오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 이룬 여론의 큰 강은 선동이나 '가르침'에 흐름이 바뀌지 않는다.

 

정권의 지지율은 정권의 책임이고 보수당의 지지율 폭락은 그들이 만든 결과다. 유권대중은 시간차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합당한 결과를 되돌려준다. 주대환 선생의 말마따나 '대중은 모르지 않는다.' 고로 정치권은 '너만 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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