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한 회사를 20년째 다니고 있다. 이 일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물으면, 나는 좀 머쓱한 얼굴로  "글쎄"  라고 할 것 같다. 입사를 한 게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그 무렵의 일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데다 그 이후의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가서, 아직도 그 세월이 나를 관통해 지나갔다는 게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거울 속의 내가 좀 늙어 있어, 낯설다는 느낌 외에 다른 감정은 없다.

어르신들이, 낮잠 한 번 길게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앉았다더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어쨌거나 그 사이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이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한 조직에서 버텨낸 것만큼은 기정사실이니, 이번 연재는 그간 내가 직장생활을 하며, 무엇을 느꼈고 어떤 걸 배웠는지, 최대한 경험에 근거해 써 볼 생각이다.

이야기에 앞서, 내가 다니는 회사와 내 업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 회사는, 지방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평범한 제조회사다. 내가 입사하던 무렵에는 규모가 제법 컸는데, 그 후로 재계 순위에서 많이 밀려 이제 사람들이 우리 회사 이름을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어 버렸다.

그 사이 내가 맡은 업무도 많이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계약직 사무 보조원으로 들어와 커피도 타고, 화분에 물도 주고 영수증 처리를 하다가 정직으로 전환이 된 후에는 본사나 연구소의 지원 부서에 소속되어 그때그때 주어지는 일들을 했다. 그러다 몇 년 전에는 팔자에 없이 신제품 개발 TF에도 몸을 담았다가, 호되게 맘 고생을 하고 나온 후 근래에 다시 지원 부서로 발령받아, 또 다시 이런저런 일을 맡아 하고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도서관 사서 일도 한 적이 있는데, 몸이 배배 꼬일만큼 적성에 맞지 않아, 당시 담당 과장님을 꼬셔 도서관에 무인 대출 시스템을 들여놓고, 매달 산더미처럼 입고되는 학술지도 전부 온라인 구독으로 바꾸고 그 일에서 빠져나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그러니까 2008년을 전후 해서는 채용 관련 업무도 잠깐 했는데 그 무렵 나는 매해 비상식적으로 입사지원자가 증가하는 걸 보며 세상이 놀라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몸소 느꼈다. 당시 내가 받아 본 취준생들의 대학 성적은 거의 대부분 4점대를 넘겼고, 더러는 만점을 받아 오는 이도 있었으며 커트라인이 600이면 되는 토익은 전부 900을 넘겨 왔으며 그들의 자소서에는 고작 이십여 년을 살아온 사람이 해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생의 이력들이 들어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지키고 있는 자리의 가치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이제 나 같은 사람이 제도권으로 편승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아마도 그 무렵 공시생들이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량진으로 밀려들기 시작하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게 있어 직장생활은 여러모로 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일단 안정적인 수입도 수입이지만,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패턴이 내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에 꽤 도움이 됐다. 매달 통장에 따박따박 찍히는 그 알량한 숫자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나같이 세상을 만만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의 돈 버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듯,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날도 있었지만, 속이 끓고 애가 타는 날도 많았다.

특히 몇 년 전 신사업 일을 할 때는 전에 없는 마음고생을 했는데 어떤 날은 수원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이건 아니잖아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 하며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그 후로 나는 자주 정상 궤도를 이탈했고, 그러다 지난 여름에는 제대로 사고를 쳐 회사에 물의를 일으켰다.

(신경안정제를 과다 복용하고, 업무용 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냈다) 덕분에 나는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회의실에서 사장님과 마주 앉아 징계를 받고, 입사 이래 처음으로 고과도 'C'를 받았다. 그리고 이 일은 내 생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단 사고가 나자 제일 먼저 주위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당시에 나는 조직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었기에, 나와 말을 섞는다는 건, 내가 하는 행동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여서였는지 사람들이 말도 걸지 않았다. 덕분에 태어나 처음으로 외부 세상으로의 완벽한 고립을 경험했다. 두 번은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가짜와 진짜가 구분되었다. 따지고 보면, 전부 잃었다고만은 볼 수 없겠다.

이 일을 통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여태 잘한 게 하나 없었다. 주변의 뿌리 깊은 적의가 이해됐다. 게다가 그들이 아는 나는 그랬으니까. 소문 속의 나는 내가 봐도 나쁜 년이었다. 일이 그렇게 될 때까지 원인 제공은 전부 내가 했으니, 남 탓할 것 없었다. 맞다. 나는 모난 돌이었고 정 맞을 짓 해서 정 맞은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때릴 땐 좋더니 맞아보니 아픔뿐이었다.

그 후로 그간의 행동을 찬찬히 살펴, 잘못되었다 여겨진 것들은 고치려 애썼다. 분별없이 아무 자리에 가 앉지도 않았고(나는 조직의 높은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 스타일이 그렇다. 부장님!, 상무님!, 네!, 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소리 내어 웃고 다니지도 않았다. 누가 뭐라든 귀 닫고, 안 보고, 그날 그날 주어지는 일들만 성실히 했다. 남의 소문 백 일 간다니, 백 일이면 잠잠해지겠지 참았고, 백 일이 지나고 해 넘어가면 괜찮겠지 하며, 참았다. 한데 아무리 고개를 처박고 일을 열심히 해도 어쩐지 나를 대하는 조직 내 시선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 어째서 동료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미워할까 고민하다가 최근 동료들이 보여주는 행동을 보고 어떤 확신을 갖게 됐다. 이들은 내가 그런 사고를 쳐서 싫은 게 아니라, 애초에 싫었던 거다. 평소에도 싫었는데 대놓고 미워할 수 있는 구실이 없었을 뿐이다.

왜냐면 새로 온 부서에서 외국에 나갈 기술 자료를 편집하느라, 영어로 된 문서를 보고 있자니 팀원 중 하나가 내게 와 아주 오묘한 미소를 입에 물고 페이퍼 한 번, 나 한 번, 페이퍼 한 번, 번갈아 보면서 뭘 알기나 하고 그걸 보고 있는 거냐는 식으로 눈으로 물었고,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는 회의 도중 대놓고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내 의견을 비웃었다. 그때 알았다. 이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는 '대기업에서 실력도 없이 운으로 이 자리에 왔으면, 조용히 짜져 있다 사라질 일이지 주제를 모르고 나대더니 꼴좋다' 하는 심산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렇다. 나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마이너리거다. 이들처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이 구단에 들어온 게 아니다.

손이 모자라던 시절 공이나 줍고 락커나 치우라고 들였더니, 어느덧 같은 팀 유니폼을 입고 분수를 모르고 나대다 끝내 팀의 명예까지 실추 시킨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애는 당장 팀에서, 아니 이 구단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저들이 단체 행동을 하는 거다. 하지만, 우리 팀 코치나 감독은 날 내보낼 생각이 없다. 장타는 못쳐도 출루율도 높은 데다 끈질긴 데가 있어 상대 투수의 공을 스무 개든 서른 개든 파울로 걷어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값도 싸서 메이저리거들이 받는 연봉의 반만 줘도 재계약이 가능하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팀에 두고 싶다. 하지만 같은 팀 사람들은 이런 감독의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 나 같은 애랑 여전히 같은 구단에서 뛰어야 한다니,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니 이 경기를 졌으면 졌지 나 같은 애랑 같은 훈련을 받는 게 싫다. 그래서 이들은 틈만 나면 내게 빈볼을 던져 시비를 걸고, 라커룸에서 야지를 놓는 거다.

한때 정말로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다쳐가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대기업 기준으론 은퇴를 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다, 딸린 식구도 없으니 어디 가서 뭘 해도 나 하나 먹고살면 되는데 이깟 게 뭐라고, 참고 산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졌다. 너희들이 이겼다. 나는 이 싸움 안 한다. 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무래도 이렇게는 못 나가겠다 싶었다.

내가 이들이 하는대로 당하고 나자빠지면 이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 같은 사람한테 이러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갈 때 나가더라도 이들의 바짓가랑이라도 물고 뜯어놓고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온종일 나 미워하느라 연습도 게을리하는 너희들 앞에서 이번엔 홈런까지 쳐 보리라. 그래서 요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사실 싸움이라면 살면서 질리게 했다. 이골이 난다. 이번엔 싸움을 해야 돼서 할 거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들도 있으니까, 그래서 할 거다.

아무튼, 그런 연유에서 나는 앞으로 20번에 걸쳐 내가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현상들, 그리고 이 싸움에 대해 연재를 해 나갈 생각이다. 또 이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어떻게 나 같은 사람들을 배제했는지, 그들이 지은 세상은 어떤지 적어 나갈 생각이다. 아마도 이 연재를 마칠 때는 이 싸움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 있을 것 같다. 오해할까 짚고 넘어가는데, 내 목적은 승리에 있지 않다. 메시지를 전하는 데 있다. 덮어놓고, 상대 얕잡아 보지 말라고, 그러는 거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앞으로 기대하시라. 

필자 주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어디까지 모르는지 모릅니다.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모르는 줄 몰라서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배워나가는 건 의외로 쉬운데, 내가 어디까지 모르고 살았는지 확인 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해서, 본 방송을 기획했습니다.

저 포함, 4명의 친구들이 모여 자기가 경험해서 알거나, 혹은 재밌어서 찾아 본 이야기들 공유하는 형식으로 앞으로 진행 해 나갈 예정 입니다. 저는 1화 "몰라서 못 죽은 이야기"를 맡았고, 지난 삼풍백화점 연재에서 마저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용기내어 제작했으니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