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대공황의 미국 어딘가에서
1. 이슈, 볼륨, 코믹스
2. 빅뱅과 골든 에이지 : 2차대전
3. 냉전과 실버 에이지 : 냉전, SF, 민권 운동, 베트남전
4. 중간기 혹은 브론즈 에이지 : 오리엔탈리즘, 탄압에서의 탈출, 안티 히어로
5. 모던 에이지 혹은 현재 : 영상화, 시빌 워, 9.11테러, 애국법, 소수자
6. 누구보다 빠른
0. 대공황의 미국 어딘가에서
우리는 출퇴근과 같이 어딘가로 오래 이동하는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내려 한다. 잠을 잘 수도 있고, 핸드폰을 열어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음악이나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듣는 것도 선택지에 있다. 뉴스나 소설이나 만화를 읽는 것도 그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인간의 역사에서 심심함을 이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으니까.
한 100년 정도만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20세기 초중반, 서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를 상상해보자. 공업과 상업이 발달해서 대도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공장이나 사무실로 출근한다. 차를 몰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현재와 같다. 라디오가 있긴 하지만 현재의 우리와 달리 그들에게는 스마트폰이 없다. 자기 자동차로 이동한다 해도 이동식 라디오는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이동 시간의 무료함을 채울 도구는 대화가 아니라면 시각매체가 유일했다. 그래서 100여 년 전의 우리는 거리의 가판대로 걸어갔을 것이다.
Berenice Abbott, 맨해튼 32번 스트리트와 3번 애버뉴의 가판대, 1935년
100여 년 전이라고 대충 잡기보다는 대략적이나마 연도를 정해보자. 1930년대 후반은 어떨까. 장소는 미국의 어느 대도시로 하자. 상공업이 발달하고 이민자 유입이 많았던 동부 해안의 대도시들이라면 딱일 것이고, 서부 해안의 대도시들도 크게 다른 풍경은 아닐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그 풍경에서 우리가 출퇴근을 위해 전철역으로 걸어가고 있다. 길가에 가판대가 보인다. 집이나 직장까지 가는 시간 동안 읽을 짧은 무언가가 필요하다. 가판대를 둘러본다.
그날의 신문이 있을 것이다. 괜찮은 선택이다. 기사도 읽을 수 있고, 연재소설도 기대할 수 있다. 어떤 신문에는 연재만화도 있을 것이다. 시사만평이 더 많긴 하지만 말이다. 주간 시사 잡지도 괜찮은 선택이다. 페이퍼북 소설도 보인다. 두께는 천차만별이지만 하나같이 인쇄 상태와 제철 상태가 조악하다. 어차피 출퇴근 시간에 잠깐잠깐 읽고 얼마 안 가 버리거나 잊어버릴 책이다. 옆에는 만화도 있다. 펄프픽션보다는 인쇄 상태가 좀 낫지만 제철 방식은 더 싸구려다. 인쇄된 종이 8장의 중간을 스테이플러로 찍듯이 철해서 총 16페이지를 만들어놨다. 그 16페이지는 여러 편의 짧은 만화가 실려 있으니 잡지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래도 이게 가장 싼 축에 속한다. 이 얇은 만화잡지 하나에 10센트. 분량도 전철에서 읽기 딱 좋다.
30년대 후반의 우리가 골라들었을 인쇄물은 이 10센트 짜리 만화책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20세기 초의 세계는 대공황에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3년부터 재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는 있었다.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여서 강제로 돈을 돌리고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하지만 30년대 후반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공과금 용지처럼 소불황이 찾아왔다. 여전히 일은 많이 해야 했고, 버는 돈은 늘 적었다. 현재의 우리와 똑같은 도시의 각양각색 노동자들이 심심풀이로 사서 읽었던 거리 가판대의 10센트 만화들. 하잘 것 없이 사소한 삶의 풍경에서도 더욱 사소했던 이 소품 중에는, 20세기 문화사의 몇 페이지를 혼자 채울 캐릭터들이 숨어있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 1938년 6월의 미국으로 시간이동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가판대를 들러 액션 코믹스 1호 Action Comics #1를 사야 한다. 잘 보관만 해두면 2014년에는 이베이에서 320만 달러에 팔 수 있게 된다. 20세기 문화사의 한 페이지를 혼자 장식하게 될 캐릭터, 수퍼맨 Superman이 처음으로 세상에 데뷔한 만화책이었기 때문이다.
액션 코믹스 #1, 1938년 6월
“아저씨, 저 만화책들을 다 사세요. 손주들이 고마워할 겁니다!” - Dial B for Blog
수퍼맨만이 아니다. 이 길거리 가판대는 영웅들의 인큐베이터 혹은 보육원이었다. 여기서 자라난 가상인물들은 후에 유명 배우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이자 1년에 수십 조 달러의 돈을 유통시키는 초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헐크, 스파이더맨, 앤트맨, 닥터 스트레인지, 그린랜턴 등이 모두 이 보육원 출신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미국 수퍼히어로 장르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하게 된다. 30년대 후반 미국 대도시의 길거리 가판대. 그리고 이 장르는 이후 미국의 역사를 실시간에 가깝게 반영하고, 또한 선도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동시대 사람들의 삶과 시대와 밀착해 있었다는 말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판타지, SF의 문법을 사용한 초능력과 마법과 자경단의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이 역설. 당대의 미국을, 혹은 당대의 우리 세계를 보기 좋은 렌즈로서 수퍼히어로는 적절한 도구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공황 말기의 미국 대도시 가판대에서 첫 수퍼맨 만화책을 집어들어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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