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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학 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어쩌다가 대학에 오게 되셨어요?”

 

‘어쩌다가’나 ‘왜’라는 질문 사이에는,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결심을 했는지에 대한 물음이 숨어있다.

 

스무 살에겐 대학 입결, 수능 성적, 지망 대학 순서별 원서, 부모님과의 상의, 뭐 이런 것들을 들을 수 있겠지만, 서른 살쯤 되면 직업이나 직장, 혹은 가치관 같은 것들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한다.

 

“집이 절이고 직장은 편의점 점장이었지만, 취미로 글을 쓰면서 전공 분야를 깊이 공부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장환경, 거쳐온 직업, 취미와 가치관을 한 큐에 담는 포괄적인 설명이 되시겠다. 솔직히 말하면 인생에 관한 토론과 사회 생활의 쓴맛 단맛을 다 털어놓고 싶지만, 갓 스무 살이 된 친구들에겐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답하려고 노력한다. 꼰대의 패시브 스킬이 TMI이 아니던가.

 

상대가 교직원분이나 교수님이면 사정이 다르다. 절은 어디에 있냐, 종단은 어디냐, 어느 편의점이었냐, 글은 어디서 썼냐.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딴지일보 커밍아웃을 할 수밖에 없는데, 꽤 괜찮은 디자인의 명함을 건네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참 오래된 일이다.

 

사실 내가 하는, 혹은 하지 못하는 많은 행위는 부끄러움에 기인한다. 10년 전 출가하지 않은 까닭은 승려로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기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건 나의 뒷바라지를 위해 근심 걱정이 가득할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어정쩡한’ 대학 생활을 영위하는 나를 마주할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딴지에 글을 쓰는 것도 부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한 행위였다. 친일 문제를 파고들었던 까닭은 조상님 중 거물급 친일파가 있기 때문이었고, 사대강 답사기를 쓴 것은 정작 눈앞에서 강바닥이 파헤쳐질 땐 아무것도 안 하고 고개만 절레절레 짓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선량해서가 아니라 쫄보라서 그렇다. 어떤 이는 부끄러움을 특별한 요식 행위 없이 잘 극복하며 균형감 있는 삶을 살지만, 어떤 이는 부끄러움을 해소하지 못해 자기 자신을 들들 볶으며 산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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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불교학과였다. 역사도 철학도 좋아하고, 뭐 하나 뾰족하게 아는 건 없지만 사회, 예술, 문학, 심리학 등도 두루두루 좋아하긴 한다. 그 중에서 나를 가장 부끄럽게 하는 분야가 불교였다.

 

’절밥 먹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는 표현이 있다. 사찰 운영은 전적으로 아프고, 괴롭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혹은 스님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기부한 돈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사찰은 운영이 어려워지더라도 쉽게 폐업할 수가 없다. 입적(승려가 세상을 떠날 때는 '작고' 대신 '입적'이란 표현을 쓴다)하신 양아버지께서는 내가 그 인연을 이어가길 바라셨지만 나는 포기했다(어머니가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출가하여 그 인연을 받아 이어가고 있다).

 

제자를 양성하지 못한 승려가 세상을 떠나면, 종종 그 자식들에 의해 절이 팔리는 일이 심심찮게 있다. 나는 ’절밥‘ 먹고 자란 사람으로서, 신자들이 기부한 돈으로 학교에 다니고 밥을 먹은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절간과의 인연을 이어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한때 그 의무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꼭 절에 오신 분들이 나의 근황을 묻거나, 출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부끄러움은 색깔이 조금 다르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노잼 이야기라서 간략히 말하자면, 나는 수학을 졸라게 못해서 항상 답지를 펴며 숙제를 했다(풀이과정을 1도 모르니 시험만 보면 개털렸다). 답지를 보며 숙제를 내는 것처럼, 절에 오시는 분들에게도 그게 왜 답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앵무새처럼 말을 전했다. 학부 4년 과정에서 배우면 또 얼마나 배울 수 있겠나. 실마리라도 안다면 다행이다 싶지만 좌우간 최소한의 기본적인 소양도 쌓지 않은 채 타인에게 전하는 위로나 조언은 완벽한 위선이 될 것이었다. 써놓고 보니 양심적인 닝겐 같은 데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정색하고 일단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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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질문으론 주로 이런 것이 온다.

 

“왜 서른이에요?”

 

언젠가 대학을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었고, 일을 하며 돈을 시원하게 번 것도 아니라 언제든지 기회는 열려 있었다. 가끔 그런 얘기가 떠돌지 않는가? 서른 살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라던가 '인생의 2막을 찾아 나서는 용기 있는 도전을 하다' 기타 등등.

 

이런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현실적인 게 가장 컸다. 내 남동생은 복잡한 법적 문제로 인해 국가장학금을 하나도 받을 수 없다. 공부라도 잘했다면야 걱정이라도 덜하겠지만, 성적이 개판. 몸소 겪은 바로는 일단 전문대라도 나와야 20대 초반에 방황을 덜 할 거라고 생각했다. 괴롭고 짜증나더라도 스케줄이 짜여진 교육기관에 16년을 속해 오다가 갑자기 해방되니까 광야를 맴돌게 되더라(녀석은 특히나 별 생각 없는 녀석이라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대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200% 방황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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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내기 생활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겠다.

 

’불교대학을 간다.‘는 말을 했을 때 편집부 코코아 기자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스님 되시는 거예요?”였다. 다른 사람들도 거진 그랬다. 그만큼 '불교대학'이란 곳의 정체성이 불투명하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누누이 말했듯 난 출가할 맘이 없다. 대머리 되기도 싫어서 발모에 좋다는 맥주 효모를 매일 먹고 있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우리나라에서 불교학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불교 대학은 총 여섯 곳이 있다. 내가 진학한 학교는 지방의 G대인데, G대를 택한 까닭은 심플하다. 돈이 가장 적게 든다. 최소 학점만 유지하면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타 대학과 비교했을 때 기숙사비, 식비 등 추가 비용도 현저히 적었다. 교육부 대학평가에서 안 좋은 성적을 받아 국가장학금 혜택을 받는 건 다소 무리가 있지만, 국가장학금이란 게 소득분위 랜덤게임인데다가 학교 내의 장학금 제도가 워낙 탄탄해서 큰 걱정이 안 됐다. 수많은 신앙인의 힘을 모아 세운 학교를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란 믿음도 있다. ‘절밥’ 먹은 사람의 근자감이랄까.

 

영 좋지 않은 기사들만 보이는 점이 오히려 설렜다. 고작 30년의 인생 경험으로 뭘 알겠냐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내 경험상 ’정상적인 조직‘이란 곳은 없었다. 오히려 말 많고 탈 많은 조직보다,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이는 고요한 조직이 더 위험한 곳이란 것을 깨달았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은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랭이 굴로 가라”라는 땡삼이형 같은 말을 했는데(그렇다고 소송비용을 내준다는 말도 안 했다), 아쉽게도 난 내부에서 구성원으로만 참여할 생각이다. 사실 모른다.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려워지면 그땐 또 뭐라도 하게 되겠지.

 

’어른의 사정‘이나 대학 존립의 위기보다 더 걱정한 건, 스무 살 새내기들에게 민폐가 되진 않을까 하는 것들이었다. 신입생 OT를 갈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가긴 갔다. 나이 서른에 스무 살 파릇파릇 친구들과 트와이스 <Cheer Up> 춤을 추며 살짝 자괴감이 들 뻔도 했는데, 뭐 그럭저럭 즐거웠다. 몇몇 기업에선 신입사원 연수 때 단체로 얼차려도 주고 율동도 시킨다 카던데 이 정도쯤이야. 과거 대학 풍경처럼 반강제로 술 먹이고, 선배들이 집합시키며 가오를 잡는 일이 벌어졌다면 참지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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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놀랐다. 대학이 터가 좋아서 그런가. 21살, 22살 몇몇 선배들의 눈에는 초롱초롱한 뭔가가 담겨 있었다. 내게는 그 초롱초롱함 따위 없었던 거 같은데 학교 규모가 작고 구성원이 몇 없기 때문인지, 학교마다 이맘때쯤 터지는 학생회비 강요, 과비 강요, 대학교 똥군기, 단톡방 구설수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하나도 없었다. 놀랄만큼 평화롭고 건전한데다 야무지고 열정적인 학생들도 많아서 기사 쓰는 입장에서는 다분히 실망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제발 똥군기 있어줘...!’라는 마음도 없진 않았는데...

 

초롱초롱함과 생기발랄함과는 별개로, 불교학과 특성상 40대, 50대, 심지어 60대 만학도 분들도 계신다. 또 다른 의미의 놀라움이다. 나이 서른에 대학 오는 것도 쉽지 않은데, 40대, 50대, 60대에 대학에서 요구하는 커리큘럼을 준수하며 학교를 다니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종교적 신념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현실적인 고충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다. 특히 가족이 있으면 더더욱. 대학 측과 학과 내 학생들도 그분들을 외면하지 않고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신선했다. 불교학과의 특징인지 학교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좌우간 만학도분들 덕분에 최고령을 면할 수 있었다.

 

이미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에게서 지겹도록 듣던 악명 높은 수강 신청을 하고 한 달 가량 수업을 들으며 느낀 것은, ‘요즘 대학은 정말 살아남기 위해 취업에 목숨을 거는구나.’였다. 아직 정신없이 술자리 나가기에도 바쁜 스무 살 동기들에게 진로 심리검사, 진로 설계, 취업지도 등을 진행하고 참여를 요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공 공부를 하러 들어왔는데, 진로 설계나 NSC와 관련된 과목을 수강해야 하는 것에 약간 당황했다. 그만큼 학교가 학생들의 취업에 목숨을 걸고, 또 뒷받침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거겠지. 대부분의 지방대가 다 그렇듯, 인문학적 강단의 모습은 쪼그라들고 취업 기관으로서의 색깔이 강하다. 대부분의 신입생 역시 과를 막론하고 공무원 시험과 공공기관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학교에서 그만큼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이기도 하다.

 

동아리는 부속 신문사에 들었고, 근로 장학생으로 교직원분들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솔직히 후자가 더 편하다. 동아리에 소속된 선배나 동기 입장에선 갑자기 서른 살짜리가 눈치 없이 훅 들어왔으니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호르몬 왕성한 동기들과 얼굴에 난 여드름 얘기를 할 때는 스무 살 같다가도, 이럴 때는 서른 살인 것이 체감된다. 휴학을 오래 하다 20대 후반에 복학한 한 남학생은, 자신은 아이들과 전혀 말을 섞지 않을 뿐더러 교류하기조차 어렵다는 말을 했는데, 그분에 비하면 나는 꽤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다(같이 밥 먹는 친구들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답정너로 들릴 것 같다).

 

물론 약간 불편한(?) 것도 있다. 같이 과제 준비를 하는 어느 때에 “후배들에게 어떻게 해야 꼰대가 되지 않는 걸까?”라며 고민을 털어놓던 형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동생은 잔소리를 퍼붓는 내게 “형 대학 가서 애들한테 그렇게 잔소리하면 꼰대 소리 들어”라고 화를 냈었는데, 오지랖 부리지 말고 그냥 내 할 것만 열심히 하면 꼰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할 예정이다. 이제 나도 꼰대 소리를 조심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술자리는 무조건 1차만 하고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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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뒤는 모르겠다. 솔직히 대학에 가도 하나도 안 설렐 줄 알았는데, 몇몇은 설레고 심지어 긴장되더라. 겪을 만큼 겪고 느낄 만큼 느껴왔다고 생각했는데, 긴장되고 부끄러워서 준비한 발표에 반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고딩 때처럼, 긴장감은 여전히 남아있다. 어쩌면 학점 3.0을 맞추지 못해 등록금 통지서를 받아들고 중도 포기할지도 모를 일이다. 성적 관리 잘하고 어학 실력도 쌓아 대학원을 가고 싶은 욕심이 있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요즘, 어른들이 “대학 생활 재밌니?”라고 물으면, 별 고민 없이 “재밌다”라고 답하고 있다. 아무리 지루한 수업이라도 나름의 재미가 있고, 아무리 귀찮은 과제라도 하다 보면 즐겁다. 게다가 전공 기초 과목을 들을 때면 옅은 설렘마저 있다. 현실에 대한 짐을 내려놓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얼추 수행해놓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오니 오히려 전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대학을 가지 않겠어’라는 어처구니없는 다짐을 한 스무 살의 빵꾼이가 그럭저럭 옳아 보인다. 물론 4년 뒤의 나, 혹은 중도 포기한 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때는 스무 살 빵꾼이의 다짐이 틀린 것이겠지. 원래 인생이란 일승일패를 반복하며 찔끔 찔끔 나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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