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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는 운이 좋았다. 다른 곳으로 전이된 곳이 없어 예정된 수술을 끝냈다. 얼마간 죽음이 유예되었다. 수술 직전의 긴장과 성공적으로 끝난 후의 안도가 표정에서 읽힌다. 막내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5년 혹은 10년 만이다. 아버지의 수술 경과를 물었다. 경과가 좋다고 말했다. 다행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인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 삶이 조금 더 연장되는 것이 다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누구에게 다행인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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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고 지친 표정으로 승강기를 기다리는 젊은 병원 직원의 모습을 본다. 의료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일에 인정욕구가 작용했겠지만 다른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한다. 죄와 벌에서 살해당한 노파도 누군가에게 자본주의의 전령이었다. 아버지는 수술을 집도하거나 간호의 역할을 맡은 의료인들에게 미미한 성취감으로 나마 남을 것이다. 타인에게 선을 행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인도의 거지들의 당당함이 겹친다.

 

병원으로 오가는 길은 버스를 탄다. 창밖을 보면 풍경이 바뀐다. 수원역에서 환승해 영동시장을 지나면 가로수가 바뀐다. 도로를 따라 가로수가 심어져 있고 가로수 사이로 전신주가 서 있다. 수종이 바뀌지는 않았다. 여전히 은행나무다. 나뭇가지가 자라 전깃줄에 부하가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가로수 가지치기를 한다. 가로수로 심어지는 나무의 기본 조건이 있다. 청소하기 쉽게 잎이 넓어야 하고 차량 매연 같은 공해에 강해야 하며 성장이 좋아야 한다. 아마 성장을 따지는 조건은 가지치기를 염두에 둔 것 같다.

 

가지치기의 방법이 바뀌어 있었다. 보통 가로수의 가지치기를 보면 일률적인 높이에서 효율적으로 절단된다. 효율은 작업 시간을 줄이고 인건비와 장비 사용료의 절감을 의미한다. 접은 우산처럼 자라는 은행나무가 둥근 모양이다. 느티나무와 바오밥나무의 중간 형태다. 드물게 성장이 빈약한 나무가 보이지만 대부분 생장점을 절단당하고 새롭게 뻗은 잔가지가 풍성하다. 여러 해를 가꾼 흔적이다. 본격적으로 잎이 돋아나면 보도를 걷는 사람들에게 드리우는 그늘이 짙을 것이다. 구획을 담당한 사람의 의도가 보이고 실행한 실무자가 여러 해 의지를 꺾지 않았다.

 

나무의 입장에서야 깍둑썰기를 당하는 것이나 원형 이발을 하는 것이나 달라지는 것이 없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차이가 보인다. 생계를 위해 업으로 선택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기왕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읽힌다. 그리고 더 잘 하려는 마음은 이익과 효율을 넘어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작업 관리자의 미적 취향인지 담당 공무원의 의지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에서 진정한 타인은 없다. 어떻게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고 닿는다. 누군지 모르는 상대방이 어딘가에 남겨진 내 삶의 흔적과 닿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 동정이나 불쾌감은 아니었으면 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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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의 겸애에 대해 확고한 정의가 없었다. 천웨이런의 '묵자가 필요한 시간'을 읽었다. 어떤 위대한 철학가나 사상가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현실이나 집단의식을 벗어날 수는 없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조금 불합리한 점들은 그렇게 이해한다. 겸애는 기독교의 박애나 불교의 자비와 통한다. 인간이 궁극적인 선으로 인식하는 것들은 그렇다. 현실적인 욕망의 충돌로 닿기는 어렵지만 도덕적인 이상을 비슷하게 그리고 추구한다. 그리고 그에 근접한 사람을 추앙한다. 그들의 언행이 사회의 방향성을 만든다.

 

향상성은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간이 만든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사람이 살면서 세상 모든 일에 의미를 분석하고 살 수는 없다. 복잡한 일들은 패턴 인식을 통해 단순화해서 인식한다. 그러다 보니 종종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단순히 보통 사람의 상태를 초월하는 자를 리더로 인식하기도 한다. 대중은 슈퍼리치를 구원자로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이코패스를 냉정한 판단력의 리더로 인지하기도 한다. 리더를 잘못 선택하는 건 종종 일어나는 실수다. 권력에 취해 변해 버리는 리더도 있다. 집단을 이끄는 것은 리더만의 역할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지지와 제어도 적지 않은 힘을 갖는다.

 

사상가들이나 철학가들이 하는 일은 개인의 생각이 모일 구심점을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도덕의 기준을 세우고 사회가 작동할 방향을 제시한다. 묵자의 철학은 하층민들을 목적으로 한다. 정수리가 뒤꿈치까지 닳을 때까지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강령은 원수가 뺨을 치면 반대 뺨을 내주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처럼 현실성이 없다. 사람은 현실에 살지만 이상에 경도되고 끌린다.

 

선민의식과 소명의식을 동시에 갖고 겸허한 성품을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이 이상에 근접한 삶을 살아 낸다. 그런 삶을 살아 낸 사람들은 자손을 통해 유전자를 남기는 사람들과 다른 것을 남긴다. 그렇게 태어난 사상과 철학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동일하지 않다. 여타의 생명처럼 경쟁하기도 하고 진화하기도 한다. 묵학과 경쟁 관계에 있던 유학은 지배층의 도덕을 가르쳤다. 신분제를 옹호하고 사대부의 도리를 말했다. 이익을 수반하지 않은 정의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제왕들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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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학만큼 성하던 묵학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묵자의 삶과 생몰 연대는 역사에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성과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 묵학이 몰락한 이유를 전국시대 진과의 연합에서 보기도 한다. 묵자를 추앙하는 이들은 의를 위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준군사 조직이다. 규율은 법가와도 통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집단의 내부 규율이 걸핏하면 참이다. 참은 목을 베는 형벌이다. 정복욕을 가진 군주에게 이상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군사 조직은 이용당하고 숙청당한다.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도 역사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묵자의 후예들은 중국 역사에 기록되는 민란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필요에 의해 이제서야 그들을 묵자의 후예로 조명하는 것이다. 냉소적인 지식인은 묵자를 종교를 창시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종교는 현실 도피에 이용되기도 하지만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다. 삼국지의 황건적으로 알려진 오두미교나 청말 무장 폭동을 일으킨 의화단의 권사들을 묵자의 후예로 본다. 민중들은 묵자를 따르던 임협을 수호전의 영웅들이나 무협 소설 협객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현대의 노동 운동가들이 묵가의 임협과 비슷하다. 종교에 가까운 신념과 끈끈한 내부 결속, 그들이 이익을 대변하는 노동자 계층을 보면 유사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군사 조직과 유사한 조직 체계도 그렇다. 계급이 대립하던 시대에는 황건적이나 의화단처럼 방향성 없는 분노를 연소시키고 토벌당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요즘은 운동가들이 노동자들의 역동성을 사회 변혁의 에너지로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하층민을 목적으로 삼던 묵학이 역사에서 지워지고 지주 계급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던 유학이 주류가 되었다. 신하의 윤리를 강조하던 유학이 발달해서 군주가 자격이 없으면 폐한다는 논리를 개발했다. 유럽에서도 민주주의를 이뤄낸 건 자본가와 귀족 계급의 권리를 확장시키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발전한 결과다. 동양에서도 자본 축적이 임계점을 넘겼으면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시즘이 묵자학과 결이 통한다. 자본주의 진영의 적대적 행위보다는 내부적 모순 때문에 무너졌다. 실패의 기록 또한 인류의 자산이다. 무지한 군중을 선도하는 엘리트들은 권력에 취했다. 권력은 이상주의자를 변화시킨다. 작은 집단에서도 조그만 권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권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권력 싸움에서 버티지 못한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며 공포와 경외에 찬 시선에 중독된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다.

 

묵자 철학을 압축시키면 남은 없다는 말이다. 사해가 동도라는 말과 통하는 말 같다. 인간이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 같기도 하다. 공감이 극에 달하면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람도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에게서 이기적인 모습들을 보게 되지만 공동체와 타인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헌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아이처럼 순수한 이들의 공감 능력에 결핍과 부족을 깨닫게 된다.

 

스스로 온전히 서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이나 사상을 읽는 것이 자기만족이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기왕 가로수 가지치기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좋도록 자르는 것이 자른 사람에게도 좋은 마음이 든다. 비슷한 마음이다. 당장에야 현실도피 같은 쓸모없는 이야기이지만 생각을 다듬는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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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큰불이 났다. 사람이 죽고 도시가 위험하다는 뉴스를 들었다. 고성에 아이가 살림을 차렸다. 철책에 근무 중이고 새로 가족이 된 아이가 관사에 혼자 있다. 아내가 안부 전화를 했다. 주고받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전국의 소방차들이 불을 끄러 모였다. 해군 함정이 유사시에 주민 대피를 돕기 위해 이동 중이었다. 놀랐을 아이에게 도로 통제가 풀리면 며칠 쉬었다 가라고 문자를 보냈다. 통화는 부담이 된다. 감성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상황에 부합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불길이 잡혔다. 세월호 때와 대한민국의 하드웨어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운영체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조금 다르다. 돈이나 정치적 이익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정부다. 사람에는 이전 정부의 관료들이 개돼지로 인식하는 하층민들도 포함되는 듯하다.

 

안산으로 올라온 아이와 가족으로의 의례적인 일들을 치렀다. 짧은 문자에 먼 길을 혼자 온 아이를 보니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아내와 마중을 나가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룻밤 잠을 자고 가는 길에 다시 배웅을 했다. 터미널에서 떠나는 버스에 손을 흔들었다. 조금은 더 친밀해진 기분이 든다.

 

잠시 쉬었다가 아내와 아버지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간병인의 수발을 받으며 죽을 먹고 있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어머니와 둘째의 생각이 났다. 중간 정산금을 확인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병원비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는 타인에게도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파카한일유압의 부당한 정리해고 이후,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까지 1334일이 걸렸다.

세상에 큰 뉴스 많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딴지 필진 범우는 이에 맞서 투쟁한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본인의 성격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하게.

 

그와 그의 가족에게 참으로 무거운 날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던 노예의 다른 이름이다.

근로자는 착한 노예. 노동자는 불순한 노예.

 

 

이 시대 노예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고 때론 발버둥치고, 때론 포기하고,

때론 관조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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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일기(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