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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추천18 비추천0

 

 

 

 

 

89년 봄이었을 겁니다. 한 주에 두어 번씩은 가투(가두 투쟁)가 있어서 동아리방에 모여 '택'을 받아 나갔지요. 도청장치가 돼 있을 지도 모른다며 선배가 칠판에 '530 세운상가'라고 썼고 우리는 엄숙하게 고개만 끄덕인 후 5시 30분까지 종로4가로 버스를 타고 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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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앞에서 가투가 벌어졌는데 갑자기 백골단이 앞뒤에서 치는 바람에 대열 뒤쪽에 있던 저는 백골단 한 명의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키가 180이 훨씬 넘는 건장한 청년이었죠. 세운상가 계단으로 도망갔는데 계단 아래에서 그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가투 때 잡힌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두드려맞는 건 그렇다 치고 구류라도 받으면 집에서 난리가 날 것이고, 내일 얻어먹기로 한 삼겹살은 또 어떡하나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두어 대 뒤통수 맞고 끌려가는데 갑자기 함성이 들려왔습니다. 세운상가 위에 올라갔던 학생들이 밀고 내려와 기습했던 겁니다. 백골단은 기겁을 해 나를 놓고 도망갔습니다. 이번엔 내가 쫓아갔는데 상대는 좀 빠르더군요.

 

2차는 롯데 앞이었습니다. 최루탄이 터지고 백골단이 덮친 뒤 지하도로 내려왔는데 백골단 1개 소대가 안에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키가 훤칠하게 큰 백골단 하나가 손가락 총으로 정확하게 나를 가리키지 뭡니까. 으악 아까 그 백골단이다.

 

생애 그렇게 빨리 달린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건각(健脚)이었던 칼 루이스도 순간 제 스피드에는 못 미쳤을 겁니다. 그러나 독 오른 백골단은 약 먹은 벤 존슨이었습니다. 을지로3가까지 도망가다가 잡히고 말았습니다. 백골단은 제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지나치게 멀리 왔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을지로입구 쪽에나 있었고 주변에는 백골단을 쳐다보는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으니까요.

 

백골단은 쥐어터지고 도망갔습니다. 저도 헬멧을 잡아챘는데 벗겨진 채로 꽁지가 빠져라 달려가더군요. 기분이 좀 더러웠습니다. 두 번씩이나 이런 봉변을... 학교 돌아가서 술이나 먹을까, 집에나 갈까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89학번 후배와 마주쳤습니다. 재수해서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꼬박꼬박 오빠라 부르던 후배였지요.

 

"오빠. 어디 가요?"

"어, 어? 뭐 그냥..."

"명동성당 가요. 정리집회 한대요."

 

여기서 어느 선배가 "너는 가라. 나는 집에 가겠다"라고 하겠습니까. 후배와 함께 정리집회를 하고 헤어져 버스를 타려고 어두운 밤거리를 걷는데 갑자기 누가 살며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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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하고 돌아봤다가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습니다. 육척 장신의 백골단. 헬멧 없는 방독면. 아까 그 녀석이지 뭡니까. 죽었구나 싶었는데, 녀석의 주먹이 날아오질 않습니다. 갑자기 방독면을 벗더군요.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습니다. 표정이 험악하지 않고 뭔가 간절히 바라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울상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뇌까리더군요.

 

"집에 가. 응? 집에 좀 가."

 

'재수없는 놈'이다 싶었을까요. 이 새끼만 만나면 일이 꼬인다 싶었을까요. 저는 뜻밖의 관용(?)에 90도 인사를 하며 외쳤습니다.

 

"갈게요. 지금 집에 갈게요."

 

그리고 다시 칼 루이스처럼 달려나갔습니다. 왠지 미안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외쳤지요.

 

"고맙습니다."

 

대답은 없었습니다.

 

아마 그 백골단도 쉰이 훨씬 넘은 나이로 어딘가에서 살아가면서, 군 복무 시절 참 오지게 재수 없던 날 자기 눈앞에서 유난히 알짱거리던 잘생긴 대학생을 가끔 추억하며 살고 있겠죠. 제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가끔 그의 손아귀와 뒤통수를 칠 때의 타격감이 살아오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찔함은 세월을 넘어 눈 앞을 스쳐가지요. 아주 빠르게, 아주 서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