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마사오 추천42 비추천0

 

 

 

그동안 격조했다. 4월 마지막 주 <이슈vs이빨>을 시작한다.

 

 

쫄보가 또!

 

20180927220259210bads.jpg

 

지난 21일, 유시민 작가가 예능프로에 출연해 옛일을 회상했다. 80년 민주화운동 당시 소위 ‘서울역 회군’이라 일컫는 때의 분위기와 감상,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받으며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자술서를 하루 100장씩 썼던 일화들이었다.

 

그러자 22일, 심재철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80년 합수부에서 쓴 A4 용지 90쪽 분량에 이르는 상세한 운동권 내부 동향 자백진술서는 사실상 그가 진술서에서 언급한 77명의 민주화운동 인사를 겨눈 칼이 됐다”며 “그중 3명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공동피의자 24인에 포함되는 등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핵심 증거로 활용됐고, 유시민의 진술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판결문에서 증거의 요지로 판시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자신의 재판에 핵심 증거물로 제출돼 유죄 선고 증거로 채택됐다며 “역사적 진실을 예능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아... 심재철. 39년이나 흘러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에겐 80년이 ‘버튼’이다.

 

그걸 유시민이 환히 웃으며 TV에 나와 말하니 ‘울컥’했을 게다. 안쓰러움을 넘어 애틋하기까지 하다.

 

1980년 5월 15일 약 10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서울의 봄’을 찍어누르는 전두환 신군부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 집결했다.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시위대 해산 여부를 두고 지도부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총학회장이었던 심재철은 해산을 주장하는 온건파,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이었던 이해찬은 해산을 반대하는 강경파였단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을 결정한다. 그 이틀 후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된다.

 

1thumb_00712863_0001.jpg

 

역사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서울역에서 회군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광주를 고립시키고 학살을 자행한 신군부는, 역시 서울역에서도 10만 군중을 향해 발포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회군 자체를 두고 잘했느니, 못했느니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 후 유시민도, 심재철도, 이해찬도 잡혀간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당한다. 심재철과 이해찬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정에 나란히 서게 된다. 자술서에 '이거 다 그 사람이 시킨 거예요! 내가 봤어요.' 라고 썼다. 고문이란 게 그런 거다.

 

난 돌 몇 번 던져본 적 없고 경찰에 잡혀가 고문 당해본 적은 더더욱 없다. 술 먹고 새벽에 기어들어 왔다고 다음날 마누라에게 효자손으로 혹독하게 고문 당해 본 게 전부다. 누구랑 어디서 술 마셨냐고 시작된 고문은, 내가 베란다에 있는 공구통 전동드라이버 박스 안에 숨겨둔 5만 원 권 지폐 4장의 존재를 불고 나서야 겨우 끝난다. 얘기가 잠깐 샜는데, 어, 잠깐 눈물 좀 닦고...

 

여튼, 고문이란 게 그런 거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극단의 공포를 심어준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선택’이 갈린다. 대부분의 이들은 그 순간을 모면키 위해 거짓 진술서를 썼다 해도, 법정에서는 ‘고문’ 사실을 폭로하며 진술을 뒤집는다. 그리고 심재철은, 이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 공소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이해찬은 법정에서 “너 미쳤어? 너 왜 그래?” 라고 울부짖었지만 김대중은 “심동지, 고생 많았지?” 라며 손을 내밀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선택’은 오롯이 심재철의 몫이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어쨌든 그는 그 자리에서 빤스를 내렸고 ‘똥’을 쌌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e0021049_5b484202b0ff6.png

어떤 사실들은 역사에 박제되어 아프게 남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 걸까. 결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기회는 주어지게 마련이다. 끝끝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자숙하며 겸손하게 남은 생을 살면 된다. 허나 심재철은 그러지 않았다. 심재철은 MBC 기자를 거쳐 1995년 신한국당 부대변인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당시 그가 민주당에 입당하고 싶어 했는데 거절  당했다는 풍문이 돌았다고 한다. 사실여부는 나도 모르겠다만, 상식적으로 민주당에 수두룩한 옛동지들이 품 넓게 안아줬다면, 민주당을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면서 질질 우는 슬램덩크 정대만 짤처럼 말이다.  

 

기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그래, 앞서 얘기했듯 서울역 회군을 심재철 탓으로만 모는 것은 문제다. 그리고 모진 고문에 나가떨어진 것도 일견 이해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파를 달리한 이후, 그가 쏟아낸 증오의 언어들은 어떻게 생각해도 여지가 없다. 공안몰이엔 단골 감별사로 활약했다. 망언 퍼레이드도 이어졌다. “이념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이 민주투사로 위장하고 있다”거나 “국가유공자보다 몇 배나 더 좋은 대우를 해달라는 게 세월호 특별법”이라거나. 

 

가장 최근에 그가 도드라지게 똥볼을 찼던 건 ‘청와대 업무추진비 유용 의혹’이었다. 작년 10월경, 한국재정정보원의 취약한 보안을 뚫고 정부부처의 업추비 내역을 입수해 폭로, 청와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자 했지만 외려 심재철 본인의 국회부의장 시절 업추비가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서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그 당시 이해찬 민주당대표의 짧은 논평이 인상적이다. 

 

 “심재철 의원은 제가 잘 아는 사람이다. 위법한 사실이 겁이 나서 하는 과잉 행동”

 

아아... 심재철. 39년을 초지일관한 쫄보.

 

39년 전에 본의 아니게 바지에 똥을 싸고 어정쩡하게 어찌할 바를 모르던 쫄보는, 그 후 오만군데를 돌아다니며 똥을 싸지르는 걸 본분으로 여기는 용감한 쫄보가 되었지만 ‘옛 동지’가 TV에 나와 ‘그 시절’을 얘기하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애써 외면하며 잊고 살았던 ‘버튼’이 눌려 또 바지에 똥을 싸며 울고 있다.

 

 

qre.JPG

 

역사학자 전우용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심재철의 주장을 보면) 심재철이 왜 심재철인지를 한 번 더 확인시켜 줄 뿐”이라고 야속하게 평했지만 난 조금 결이 다르다.

 

심 의원 본인은 58년생, 우리 나이로 환갑 넘어 진갑이다. 그동안 싸지른 똥이 솔찮아서 경로 의존성에 의해 유턴이 만만치 않은 거, 이해한다. 굳이 무리하며 유턴할 필요 없다. 그냥 살던 대로 사시라.

 

그저, 이제 그만 39년 전 기억을 내려놓으시라. 열폭도 내려놓으시라. 유시민이 TV에서 떠드는 게 싫으면 그냥 채널을 돌리시라. 국회 부의장까지 지내셨으면, ‘버튼’을 끄고 바지춤을 올리실 때도 되었다.

 

심재철 의원의 건강을 빈다. 

 

 

 

Profile
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