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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나무하고 농사짓고 살던 더벅머리 청년이 갑자기 왕이 됐다. 조선 제 25대 왕 철종이다. 귀양가 있던 왕족의 후예로 왕이 될 생각은 꿈에도 없는 이였지만 왕통이 끊기면서 어쨌건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꼽힌 것이다. 원래 그는 선왕 헌종과 같은 항렬로 왕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 항렬 때문에 후일 대원군이 아니라 그 아들 명복이 왕이 되는 것이다) 안동 김씨들은 밀어부쳤다. “어차피 우리가 맘대로 할 건데 뭐.”

 

그 시대를 독점적으로 빨아먹었던 적폐는 다름아닌 안동 김씨였다. 이때는 당파가 의미가 없었다. 노론이고 소론이고 남인이고 북인이고 따질 필요가 없이 안동 김씨냐 아니냐, 안동 김씨에 붙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일생을 결정했고 출세의 가도를 규정했다. 

 

영화 <군도>의 배경이 바로 이 시기거니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백성들은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탐관오리들을 물리치기 위해 민란을 일으켰고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봉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기 위해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데 그 책임을 맡은 자 역시 안동 김씨 김좌근이었다. 

 

하지만 삼정의 문란으로 배불리는 것도 안동 김씨였고 탐관오리들에게 뇌물받고 관직을 주는 것도 안동 김씨였으니 고양이에게 어물전 감독을 시킨 셈이었다. 김좌근은 개혁 시늉만 했고 삼정이정청은 슬그머니 없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1천만 조선 백성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나 안동 김씨와 그 일족에 들러붙은 양반 찌꺼기들만 행복하던 시대. 그 시대 안동 김씨의 영수가 김좌근이었다. 

 

그런데 김좌근은 첩 하나에 미쳐 있었다. 전라도 나주 영산포 태생의 기생이었다. 성은 양씨라고 전해지는데 미모가 출중했다고 한다. 영산포 근처 어장촌에서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그녀가 지나가면 뭇 사내들이 넋을 잃고 보았다 전한다. 여러 동네 사람 홀리고 애닳게 했던 그녀는 기생이 된 뒤 소리와 가락을 익히고 춤을 배우면서 높으신 양반들도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안동 김씨의 수장 김좌근도 예외가 아니었다. 

 

1853년부터 10년 동안 세 임금 아래에서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노회한 김좌근이었으나 양씨에게 미치다시피 했다. 소문에는 양씨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글씨 잘쓰니 달필이고 너는 노래 잘하니 달창이로구나" 입을 헤 벌리고선 당장 수레를 보내 양씨를 한양으로 데려가 살림을 차렸다고 야사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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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의 수장 김좌근의 첩은 그냥 첩이 아니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한양을 내려다보고 싶사옵니다.” 청하자 김좌근은 대청에서 시야를 가리는 아래채 건물의 기둥을 깎아내 지붕을 낮췄고 집 앞의 민가들을 사들여 헐어 버렸다. 사람들은 양씨를 ‘합부인’으로 불렸다. 대원군이나 정1품 고관들에게 ‘합하’(閤下)라는 호칭을 썼거니와 그 정도의 위세를 부린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고향이 나주인지라 사람들은 ‘나합’이라고 불렀다.

 

나합은 기고만장했다. 김좌근의 권세를 자기 것인양 사용해서 벼슬을 사고 파니 양반님네들이 떼로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고 관찰사며 지방 사또 직을 거래했다. 나라의 창고도 제것 보듯 했고 자신의 창고는 그득그득 재물로 채웠다. 남자 욕심도 많았던지 맘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몰래 끌어들여 정을 통했다고 하고 심지어 김좌근의 아들 김병기와도 썸싱이 있었다는 소문까지 있으니 가히 갈 데까지 갔다고 보아야겠다.

 

하루는 집에 물 길어 주던 북청 물장수에게 북청 군수 자리를 선물하니 물장수는 별안간 사또가 돼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은 뒤에서 ‘물장수는 무슨 물을 팔아서 사또를 샀나.’ 투덜거렸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좌근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난리가 났고 심지어 뺨을 때린 적도 있다고 했다. 정상적인 나라 같으면 당장 물고를 내거나 고향으로 쫓겨났어야 할 일이지만 끄덕없었다. 정신 나간 김좌근이 나합을 품에서 내놓지 않은 탓이다. 

 

안동 김씨 세도가 물러간 뒤에도 나합은 김좌근 옆에 붙어 있었다. 보다못한 신정왕후 조씨 (헌종의 어머니, 당시 대왕대비)가 나합을 불러들여 죄를 물었다. “천한 기생 주제에 관직을 사고 팔며 권력을 휘두른 죄, 기생 주제에 정1품 호칭 ‘합’을 남용한 죄, 김좌근이 다른 여자 본다고 뺨을 때린 죄”였다.

 

그러면서 닷새 안에 한양을 떠나라 명하니 은퇴한 김좌근이 살던 청수동 별장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이고 데이고 이를 어찌한단 말이오.” 김좌근도 울고 나합도 울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나서서 경복궁 중건 비용을 두둑히 받아내는 것으로 나합 추방령을 거두게 하였다고 전한다.

 

김좌근의 공덕비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전라도 나주다. 나주에 흉년이 들자 나합이 김좌근을 졸라 구휼미를 나주에 집중적으로 풀게 했고 그 때문에 세워진 공덕비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 세도가 끝난 뒤 한 선비가 도끼를 들고 외쳤다.

 

“저 사악한 년이 이곳이 자기의 고향이고 이곳을 도운 김좌근의 성스러운 뜻을 받드는 성지(聖地)로 공덕비를 세우라 했다. 우리 먹은 쌀이 김좌근의 것도 아니고 덜떨어진 기생의 선심으로 얻은 것도 아닌 나라와 백성의 것이니 공덕비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하니 나주 읍내 사람들이 몰려와 공덕비를 반으로 쪼개 길거리에 버렸다.

 

후일 이것을 복원한 것이 현재도 나주 경내에 보관돼 있다. 어느 선비 탄식하여 가로되 나주가 나합같은 사악하고도 나라 망칠 여자를 낳았으니 반드시 나주의 대성 나주 나씨의 후손 가운데 비슷한 이가 나올 것이라 예언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그 심경을 남긴 한시가 전하는데 작자는 역시 미상이다. 사진은 왜 자꾸 잘못 들어가는 거냐.

 

達唱打鈴輿便來 달창타령여편내 

노래 잘 부르고 방울 두드리니 (한양에서) 수레가 왔네.

 

翫錢戱彌稱巨宰 완전희미칭거재 

돈 가지고 노는 놀음으로 두루 큰 재상 칭하고

 

謨漏庫悍搔利濫 모루고한소리람 

꾀는 나라 창고로 스며들어 이문을 사납게도 긁어 펑펑

 

諸里議羅蛤泆世 제이의나합일세 

여러 마을들이 나주 계집 해도 너무한다 쑥덕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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