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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국 방송사의 산 증인이라 할 유호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세. 거의 한 세기를 채운 그의 삶은 방송작가로서, 문필가로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최근 낸 <역사를 바꾼 환상의 짝>에서 나는 작곡가 박시춘과 콤비를 이룬 작사가 유호의 면모를 들춰 보았다. 그 내용을 줄여 소개하며 고인을 기려본다.

 

 

 

해방이 왔다.

 

미군정 치하에서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은 새로운 나라, 당당한 독립국을 건설하는 노력에 매진한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전파를 쏘았던 조선 경성방송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이 떠나 버린 방송국을 조선인들이 떠맡아야 했고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 방송을 준비해야 했다. 1945년 10월 편성과장 김진섭은 꽤 재능 있다는 젊은이를 만난다.

 

“동양극장 미술부와 문예부에서 일했다고?”

 

“네. 간판하고 포스터를 그리면서 연극을 계속 봤고 대필(代筆)로 두 편 정도 썼습니다.”

 

“이름이 유호(兪湖)라고? 본명은 아닌 것 같은데.”

 

“본명은 유해준(海濬)입니다. 유(兪)라는 성에 ‘맑다’라는 뜻이 있어서 맑은 호수라는 뜻으로 필명을 지어 본 겁니다.”

 

‘맑은 호수’ 유호는 경성방송국으로 직장을 옮겨 낭독 소설 <기다리는 마음>과 연속극 대본을 쓰면서 우리나라 방송작가 1호로 첫발을 내딛는다. 이후 근 반세기 동안 수백 편의 드라마 대본을 써낸 한국 방송 역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었거니와, 또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굵고 진하게 남겨 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작사가(作詞家)로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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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의 타이틀을 달게 된 것은 경성방송국 경음악단장으로 있던 박시춘(朴是春, 1913~1996) 때문이었다. 트럼펫부터 아코디언까지 악기들을 오로지 혼자 힘으로 마스터했고 <애수의 소야곡> 등 공전의 히트곡을 내놓은, ‘가요계의 보물’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았던 인물. 이 박시춘이 유호를 알아보았다.

 

어느 날 박시춘이 유호를 찾았다. 요청인 즉 “레코드 취입을 하겠다며 곡과 제목을 지어왔으니 거기에 맞춰 여러 곡을 한꺼번에 작사해 달라.”(문화일보 2011년 1월 28일자)는 것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넣어 국수 뽑는 기계도 아니고 여러 곡을 단번에 내놓으라니 유호도 어안이 벙벙했을 테지만, 박시춘은 막무가내였다.

 

“해방도 됐으니, 응? 이제 우리 옛것을 찾아 노래해 보면 어떨까? 응?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지어봤소. <신라의 달밤>. 한 번 노랫말 써봐요."

 

“신라면 경주인데... 저는 경주에 수학여행 때 딱 한 번 가봤는데요.”

 

“뭐 꼭 서울 가봐야 서울 얘기 쓰나. 한번 써봐요.”

 

수학여행 때 가 본 불국사 정도나 어른거릴 뿐 경주나 신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지식도 없었던 유호의 선택은 ‘여행안내도서’였다. 그걸 뒤적이며 <신라의 달밤> 가사는 얼키설키 모양을 갖춰 갔다. 그래서일까 가사가 약간 어색한 부분도 있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오산 기슭 위에서 노래를 불러 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여기서 금오산이 왜 나올까. 토함산이면 몰라도. 물론 경북 구미의 금오산도 신라 땅은 맞겠지만 대구보다 북쪽이고 불국사와도 수백 리 떨어져 있는데. (작가가 이 내용의 농담하며 웃었다는 얘길 사적인 채널을 통해 전해 들어서 적었는데 ' 금오산은 경주 남산의 원래 이름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여기서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 지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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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현인(왼쪽)과 유호 작가(오른쪽)

 

이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가수 현인이 부른 <신라의 달밤>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관중들의 엉덩이를 찌르는 것처럼 사람들을 격동시켰다.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듣는 이의 몸도 떨릴 듯한 바이브레이션과 그에 걸맞게 잘생긴 외모 앞에서 관중들은 열광했다.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고 앙코르도 몇 번인지 몰랐다. 무대를 지켜보던 유호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래란 게 이런 거구나. 가수란 게 이런 거구나. 어쩌면 그 환호와 열광이 유호의 영감에 불을 붙였으리라.

 

<신라의 달밤> 히트 이후 박시춘과 유호는 승승장구했다. 박시춘은 아예 럭키레코드를 차려 사장 명함을 박고 사업을 시작했고, 유호는 경향신문 문화부장과 럭키레코드 문예부장 자리를 동시에 꿰찬다. 그러나 희망으로 부풀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점차 굳어져가던 분단의 대지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화산같이 폭발했다. 수도 서울 사수를 주장하던 정부는 일찌감치 도망쳤고 한강 다리마저 끊었다. 유호는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서울이 함락되던 6월 28일, 이미 인민군들이 한강변으로 진격하고 서울 강북이 온통 인공기가 휘날리던 즈음, 한 국군 병사가 청파동 언덕길로 뛰어올라왔다. 철모도 없고 군복은 흙먼지로 그득한 패잔병. 그러나 총을 든 손은 굳건했고 눈초리는 형형하게 빛났다. 인민군을 향해 총을 쏘려 했지만 총알마저 떨어진 것을 안 병사는 총을 팽개치고 오늘날의 효창공원 쪽으로 사라졌다. 이미 기울어진 전황이었으나 퇴로가 끊긴 병사들은 자신의 마지막 위치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유호는 그 최후의 용사 하나를 목격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세상은 또 다시 바뀌었다. 인천 상륙 작전 후 인민군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9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떨어졌던 날로부터 꼭 석 달 뒤 서울에 다시 태극기가 꽂혔다. 경기도 하남에서 숨어 지내던 유호 역시 나는 듯이 서울로 돌아왔다. 자신이 지었던 럭키 서울의 후렴구를 신나게 불렀을 것이다.

 

“너도 나도 부르자 사랑의 노래 다 같이 부르자 희망의 노래 S E O U L S E O U L 럭키 서울~”

 

전쟁 전 살던 동네인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국군 해병대가 기민하게 이동하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석 달 전 남루한 복색의, 그러나 결코 굴하지 않았던 국군 병사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리라. 근무지였던 경향신문에 나가 보니 '문화부 기자는 당장 할 일이 없으니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간만에 자유롭게 명동 거리를 거닐던 유호 앞에 갑자기 나타난 밀짚모자의 사나이가 있었다.

 

“유형 무사했구만!”

 

박시춘이었다. 시골에 피난 갔다가 돌아온 그 역시 예술가들이 즐겨 모여들었던 명동 거리가 그리워서 식구들을 집에 데려다 놓자마자 뛰쳐나왔던 것이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술집을 찾았다. 전쟁통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반가웠던 작사가와 작곡가는 연신 건배하며 술을 들이켰고 술자리는 박시춘의 집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2차’ 자리에서 유호 박시춘 콤비는 또 하나의 즉흥곡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제 살았고... UN군이 북진을 한다니 통일도 이젠 멀지 않은 것 같소. 국군도 38선 돌파해서 북으로 올라가겠지. 우리 군인들 사기를 높일 노래 하나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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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의 제안이었다. 이미 유호의 머리 속에도 여러 풍경들이 엇갈리며 번져가고 있었다. 서울 함락되던 날의 패잔병,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 내팽개쳐진 총, 서울 수복 후 환희에 차서 서울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던 해병대. 가사 한 줄을 읊으면 박시춘은 기타를 튕기며 곡을 만들었다. 못 다루는 악기가 없던 박시춘은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던 <전우야 잘 자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전쟁터를 경험한 병사의 독백보다 더 생생하고 전투현장을 목격한 진중 시인의 노래보다도 더 절절한 가사가 박시춘의 정교한 손놀림이 튕기는 멜로디에 부드럽게 실렸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2절)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모습이 꽃같이 별같이.(3절)"

 

유호는 4절까지의 가사를 거미가 실 뽑아내듯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토해냈고, 박시춘은 가사를 노래에 맞게 조율했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진 노래는 국군 측에 전달됐고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지리산 등에서 국군과 경찰을 괴롭히던 빨치산들까지도 이 노래의 가사를 바꿔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