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original.jpg

 

 

 

1.

1990~1991년에 있었던 사막의 방패, 사막의 폭풍 작전은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훌륭한 평가시험이었다.

 

통합군은  군끼리의 라이벌 의식을 억누르고 같이 뭉쳐서 싸웠다. 걸프전 당시 미국은 수많은 신무기를 선보였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스마트 폭탄, 스텔스 폭격기,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등등  세계는 미국의 신무기를 보고 열광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스커드 미사일 격추는 ‘신화 영역이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였고, 사람들이 열광했던 스마트 폭탄은 전체 폭탄사용량의 5% 남짓이었다. 걸프전 기간 동안 미군이  폭탄의 종류를 보면, 스마트 폭탄이 6,250, 재래식 폭탄이 81,980톤이었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다른 면에서 미국의 모습에 놀랐다.

 

다수의 재래식 군대가 네트워크로 연결된 소수의 첨단군대에게 압도당했다.”

 

100만이 넘어가는 이라크 군을  절반 남짓의 군대로 박살냈다. 압도적인 공군력과 첨단 전자, 정보 자산을 가지고 있다지만 너무 쉽게 무너졌다. 전쟁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라크 군의 전술에 미군의 희생이 엄청날 것이란 비관적인 기사와 미군 내부의 평가가 나돌던 상황에서 너무도 싱겁게 전쟁이 끝났다.

 

( 당시 미군은 이라크와의 ‘격전 예상했다. 아니, 거의 확신했다.  결과 M1A1 전차의 120미리 활강포탄의 예상소요량을 22만발이나 신청했고, 미국 본토에선 부랴부랴 22만발이나 보내줬다. 그러나 걸프전 기간 동안  120미리 활강포탄은 겨우 3,600발이었다. 전사자 숫자에 가면 아예 ‘허탈 진다.  당시 중부군의 예측은 전쟁 개시   20 동안  3 명의 미군이 전사할지도 모른단 계산을 했고, 이에 대비해 전사자들의 유해를 담을 비닐백 16,099개을 따로 준비해뒀다. 그러나 걸프전 내내 희생된 다국적군의 병력은 포로로 잡힌 21명을 포함해서 333명이었다)

 

개전 초기 4 만에 전쟁이 끝났다고 보는  맞을 수도 있다. F-117 전폭기가 1 17 밤에 레이저 유도폭탄을 날리면서 공중우세... 아니, 제공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됐고, 이라크 군을 그대로 주저앉혔다. 개전  일주일 만에 이라크군 레이더 활동의 95% 정지했다.

 

Operation-Desert-Storm-War_1920x1200.jpg

 

 

2.

 당시 이라크군은 이란-이라크 전에서 즐겨 사용했던 ‘대포밥 전술 그대로 활용하려고 했다. 최일선에 대전차호를 파고,  안에 기름을 주입해 불을 지피고,  뒤에 ‘대포밥 배치한다. 2선급 부대들이 총알받이... 아니, 대포받이가 되고, 이들 대포받이를 상대한다고 전력이 소모된 적군에게 2선에 배치된 이라크 정예부대가 상대한다는 전술이다.

 

사막의 기후(엄청난 모래바람은 한치 앞을 분간 못하므로) 믿고, 전술적 요충지를 선점해 놓고 고정진지 안에서 적을 기다리는 전략. 그러나 이라크군은 우선 제공권이 잡혔고, 미군은 엄청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우회 기동전을 선보였다(기동전을 펼칠 ‘이라크군 없었다는  문제였지만... 73 이스팅 전투기 정도가 고작이었다).

 

진짜 놀라운  당시  지상군의 이동이다. 전투 전에 전투 개시선까지 18군단과 7군단을 이동시키는 거였는데, 은밀성과 신속성이 필요한 엄청난  작전이었다. 18군단은 400킬로를, 7군단은 250킬로를 몰래 움직여야 했다.

 

이게 진짜 미군의 힘이었다. 이해가  간다면, 이삿짐 싸는    생각해 보기 바란다.

 

 당시 18군단에는 차량만 23,000대에, 항공기만 1천대나 됐고, 7군단은 차량만 36,000대나 됐다.  이동을 위해 임시로 주유소를 설치하고,  사이 적군(이라크군) 교란시켜야 했다.

 

 엄청난 기동력은 이라크군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군단 단위의 병력이 차량을 활용해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것도 4백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말이다. 물자의 풍부함은 차치하고도, 이런 기동력을 기반으로  작전, 그리고 이를 실행할  있는 ‘기술력 이라크 군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사막의 모래폭풍에 진격로를 잃어버릴 거라 생각했지만, GPS라는 첨단 체계가 미군에게 있었다).

 

iraq-war-british-troops-01.jpg

 

걸프전은  세계 군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재래식 군대의 한계

 

이때까지 숫자만을 신봉했던 그들의 상식이 깨졌다. 하필 이때가 냉전이 해체되던 시기였다. 냉전 시기 동서진영의 대결구도 덕분에 대부분의 군사강국들은 비대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숫자가  군사력이란 신화.

 

그러나  신화가 무너졌다. 냉전이 끝나고 불어온 군축바람과 함께 세계는  개혁에 들어가게 된다.

 

 까놓고 말하자.  당시 군대는 살아남기 위해 군살을 빼야했다.

 

소련과 동구권이라는 거대한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징병제를 통한 병력확충과 청구하는 대로 지급되던 예산은 이제 좋은 시절의  이야기가 됐다 무서운  기껏 구축해놨던 군사력이 쓸모없는 군대였다는 걸 미국이 증명했던 거다. 그러나 이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야기다. 미군의 개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걸프전 이후 미군은 가열  다이어트와  구조개혁에 들어갔다.

 

미군은 변화된 안보환경에 대응하고, 보다 효율적인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 사단 단위의 제대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거의 20년에 걸쳐 미군은 장비와 시스템을 표준화 시켰고, 부대 단위를 축소했다.

 

나폴레옹 이후 ‘사단이란 전투단위는 전장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사단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옛날에는 모르겠는데, 요즘 전장환경을 보면... 사단 단위체계가 너무 크지 않냐?”

 

그렇지? 여단급 이상의 전투 제대는 지휘관  명이 컨트롤하기도 어렵고, 부대 단위가 커지면 느려지잖아.”

 

글치, 요즘 세상은 작고 빠른 애들이 대세야.”

 

이스라엘 봐봐. 걔들은 기본이 여단 단위고, 필요하면 여단 묶어서 임시 사단 편성하잖아.”

 

예전에는 보병들이 걸어가고, 차량이 있다고 해도 기동력이나 정찰능력 면에서 떨어졌지.”

 

화력은 지금하고는 비교   없을 정도로 약했고...”

 

그런데 지금은 여단 단위로도 사단 단위 작전지역을 커버하고도 남지.”

 

기동력이란 정찰력, 화력면에서 밀리지 않지. 아니, 능가하지.”

 

병사들에게 쥐어주는 장비 값도 올라서, 예전처럼 무식하게 병력 몰아 넣어서 사단단위로 편제했다간...”

 

군사비 감당 못해. 1 대전 때처럼 참호전 하자는 것도 아니고, 현대전은 움직여야 사는 세상인데... 대단위 상비군? 평시에 군사비 어떻게 감당하려고? 작고 빠른 애들로 바꿔야 .”

 

걸프전 당시 미군은 10 사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20  미군은 이들을 여단 체제로  바꿨다. 이제  지상군은 30여개의 여단이 핵심 전력이 됐다(에릭 신세키가 참모총장 시절 가열차게 추진했던 ‘스트라이커 여단 국내서도 유명하지 않은가?)

 

U.S. Army Heavy Brigade Combat Team organization.jpeg

개편된 기계화사단 예하 여단전투단의 편제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아는가? 우리가 맹신하던 작계 5027 이제 껍데기만 남은 작전이란 의미가 된다. 작계 5027 핵심은 우리가 동두천, 포천, 춘천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어떻게든 막고 있는 사이  본토에서  1군단과, 3군단이 순차적으로 증원해 오면,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작전에 들어가는 거였다. 이를 위한 훈련이 바로  스피릿(Team Spirit) 훈련이다. 미국의 육・해・ 전력이 시차별로 한반도로 증원해 들어오는  핵심인데, 1980년대 냉전의 끝물에는 참가 병력 20만에 훈련 기간만 90일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훈련이었다.

 

그러던게 어느순간  스피릿은 사라지고,  리졸브(Key Resolve) 대체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미군 증원과 지원에 관한 절차는 빠지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미국이 주도했다면, 전시작전권 이양을 대비해 미군은 한국군의 지원역할을 맡는 형태로 빠지게 된다.  결과 주로 항공전력과 미군 여단급 부대들의 신속 전개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3.

문제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한국군은... 아니, 한국의  통수권자는 1990년부터 알고 있었고,  변화된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기 위한 시도를 했다는 거다냉전체제의 붕괴, 뒤이은 걸프전의 충격을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 당시 노태우가 대통령이었다)  개혁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보수인사들이나 보수 매체들은  개혁이나 전시작전권 환수가 ‘좌파정권 정책이라며,

 

대한민국 군대를 해체하고, 북한에 나라를 갖다 바치려는 행위!”

 

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건 전후사정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전시작전권 환수는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시절의 공약이었다.

 

한국적인 작전지휘체제를 확립하고, 미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받기 위해 노력하겠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지키지도   약속을 내뱉은 걸까? 아니다.  당시 노태우는 시대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냉전도 끝났으니, 병력도  감축해야 하지 않겠어? 당장 해외 주둔 미군 숫자부터 줄이자고... 이건  소련이랑 전쟁하겠다고,  천지사방에 우리 애들을 흩뿌려놨으니...”

foreign-us-military-bases-map-6360929210861091371302718500-us20military.jpg

 

1989  의회에서 -워너 수정안(The Nunn-Warner Amendment Bill)이란  통과된다. 이게 뭐냐고?

 

네들 냉전 시대에 미친 듯이  쓰고, 병력 양성했지? 이제 냉전도 끝났으니까 국방비는 자동 삭감이다. 국방비 삭감하려면 뭐부터 해야 할까? 그래, 인건비부터 줄여야지. 그럼 병력도 줄어들겠네? 네들 행정부... 아마 주무부처는 국방부가   같은데, 국방비 삭감이랑, 병력 감축안을 준비해서 의회에 보고해라 알았지?”

 

이게 -워너 수정안의 핵심이다.  결과 국방부는 주한미군 주둔 병력  1차로 7천명을 빼겠다는 계획과 함께 전시작전권에 관한 문제도 협의하게 된다.

 

노태우 정부가 하기 싫어도, 한국군 개혁에 들어가야 했던 거다.

 

결국 노태우는  지휘구조 개편에 대한 테스크 포스팀을 꾸리게 된다.

 

앞으로 한국군의  지휘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네들이   연구해 .”

 

급한 겁니까?”

 

당장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같아. 네들이 고생  하자.”

 

대한민국 군대가 1953 7 27 이후 처음으로 ‘개혁이란  ‘시도하게 됐다.

 

 

htm_2010062101574120002010-002.gif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