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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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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판다컵에서 우승한 우리 U-18 대표팀 선수들이 우승컵을 모욕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선수도 협회도 사과하고 국내 축구팬들도 이구동성으로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네티즌들이 갓 따낸 우승컵을 모욕(?)하는 유럽 선수들의 모습을 잇따라 증거로 내밀자 주말 동안 여론이 바뀌었다. 축구는 유럽, 그것도 영국이 원조가 아닌가.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리버풀 선수단은 우승컵에 발을 올린 사진을 기분 좋게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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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영국, 혹은 한국 선수들과 중국 주최 측. 어느 한 쪽이 옳다면 다른 편은 무조건 잘못한 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사과한 우리 축협도 성난 중국도, 유럽 축구선수들도, 처음에는 우리 대표팀에 실망했다가 이제는 두둔하는 쪽으로 여론을 바꾼 국민들도 잘못한 이는 없다. 우리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필시 마음 속에 영웅으로 모시는 유럽 무대 스타들을 따라한 게 전부였을 것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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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컵'은 트로피의 가장 보편적인 장르다. 트로피란 본래 그리스어로 트로파이온, 라틴어로 트로파에움으로 전리품이란 뜻이다. 고급스레 말하자면 피의 대가로 얻은 보상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약탈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소유물을 어떻게 할지는 어디까지나 소유자의 마음이다.

 

임진왜란 시기 적장의 일본도를 노획한 조선 장수들은 장식이나 칼날을 원하는 대로 개조해 소장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들은 장인의 제작 의도나 이 칼이 원 소유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트로파이온은 전리품인만큼 자신이 죽인 적의 갑옷과 병장기가 흔했다. 이것을 개선하는 길목에서나 귀향하고 나서 나무에 걸어놓고는 했다. 이때 세트구성을 하듯 갑옷, 방패, 검이나 창까지 1인분을 짝지워 걸어두곤 했다(로마제국에서는 규모가 커져서 트로파에움은 승전 기념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한 번 나무에 매달거나 제단에 올라간 함부로 손을 대거나 모욕할 수 없었다. 이미 신에게 바친 제물이므로 신성모독이었다. 제삿상 음식을 먼저 건드리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제물이 아닌 한 소유자의 뜻대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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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는 전쟁에서 스포츠로 배경이 바뀌었을 뿐, 전리품이라는 사실은 그대로다. 우승팀이 트로피에 발을 올리는 행위는 주최 측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패배자, 즉 준우승팀(그리고 우승하기까지 물리친 팀들)에 대한 모욕이다. 축구는 이를 승자의 권리로 친다. 축구(적어도 유럽축구)는 스스로가 전쟁의 대체품이자 유사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한다.

 

스포츠에서 트로피가 대체로 컵의 형태가 된 유래는 17세기 북미 뉴잉글랜드의 두 마을 사이에서 치른 경마대회라고 한다. 우승자에게 양쪽 손잡이가 달린 은제 컵을 수여했단다. 그러나 이건 남아있는 기록에 닿은 첫 사례일 순 있어도 진짜 유래는 아니다. 애초에 그들은 왜 컵의 형태를 생각했단 말인가.

 

컵은 중요한 약탈품이었다. 고대부터 금, 은, 청동으로 주조된 컵은 고가품이었다. 금속제 컵은 바이킹의 중요 약탈품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런 물건은 영주의 성이나 교회, 사원 같은 종교시설에나 있었다. 금속제 그릇은 제의에 쓰이는 만큼 되도록 사치스러웠다.

 

컵은 검보다 상징적이다. 전장을 넘어 적의 심장부까지 타격했다는 증거였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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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시 축구, 영어로 몹 풋볼(Mob Football)이라 불리는 스포츠는 시합이라기보다는 '규칙이 있는' 패싸움, 그것도 심각한 패싸움이었다.

 

두 마을이 축구시합을 결의하면 마을의 모든 장정이 결집해 최대한 전력을 갖춘다. 두 마을의 중간지점에서 만나, 가운데 공을 놓고 시합은 시작된다. 규칙에 따라 공을 터치할 수 있는 범위를 정했다. 돌멩이, 망치 등의 무기도 허용 범위를 정했다. 규칙 안에서는 무차별한 전투였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건 당연했다.

 

보통 서든데스 룰이었는데, 상대편 마을의 교회 안에 공을 먼저 가져가는 쪽이 승리한다. 따라서 모든 시합은 기본적으로 1:0으로 끝났다. 초창기 축구의 골대는 교회였고 많은 경우 골키퍼는 신부님이었다. 평민이 성직자를 함부로 때릴 수 없기에 신부의 실제 전투력은 일반 주민의 몇 배였다. 골키퍼의 신체적 특권은 현대 축구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중세시대 교회는 마을 커뮤니티의 중심이자 주민들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이곳을 침범해 능욕하는 행위야말로 아군에게는 짜릿한 쾌감이요, 적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침략한 다른 동네 교회 안에는 미사를 위한 성배가 있다. 몹 풋볼의 트로피 1순위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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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중세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평민으로부터 지금의 선수와 팬에 이르기까지 축구의 역사를 한 줄기로 체화했다. 자연스레 트로피를 여전히 전리품으로 여긴다.

 

그런데 근대화 이후 축구를 수입한 동아시아인은 트로피를 전리품이 아니라 상(賞)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상금은 마음대로 써도 되지만 상장과 같은 상 자체는 수여자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중국측의 분노는 옳고 그름을 떠나 자연스럽다. 입장을 바꾸면 우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듯.

 

수입했으므로 원조를 기준으로 하면 되는가?

수입한 이들끼리 공유해온 예의범절을 지켜주는 쪽으로 '현지화'하는 편이 좋은가?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나는 축협과 선수단의 사과가 괜찮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의란 상식의 주고받음이다. 상식은 집단적인 경험의 결과이지, 보편타당한 객관성과는 개념이 다르다. 한국 선수들이 한국과 중국이 함께 속한 문명권에서 통용되는 상식의 선을 넘은 건 사실이다.

 

또한 먼저 사과할 줄 아는 태도는 품위다. 우리의 품위를 드러내 나쁠 일은 없다. 중국의 반응이 극성스러운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건 그거고, 우리는 우리의 격을 지킬 일이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그저 해프닝이다. 축구라는 같은 외양 속에서 충돌한 두 세계의 관념이 만든 소동이다. 서양의 태권도, 영춘권 수련자가 정신적인 요소를 찾으며 우아하게 굴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애초에 동양무술은 비열한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영악한 호신술인데 말이다.

 

축구는 원래 그렇게 신사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대놓고 야만인이 될 필요도 없다. 둘 사이의 적당한 지점에 안착하는 일은 때로 지금처럼 복잡미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