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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나는 한강의 기적을 이뤘네 어쩌네 하는 영어 교과서 ‘아티클’을 보면서 영어 단어 miracle을 암기하던 중학생이었다. 잘 살아 보세의 물결을 따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혀서 ‘중진국’을 넘어선 선진국 국민은 이래야 한다고 ‘선진 국민의 기본 자세’를 암기하여 교장 선생님을 흡족케 하던 시절이었다.

 

동시에 한국 축구팀이 세계 수준의 대회에서 8강 이상의 성적을 올린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길 바라렴”이라는 악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나날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티브이 앞으로 집결했다가 역시나 하며 자리를 박차기를 반복하고 있던 세월이었다. 세계의 벽이 높은지 낮은지 댈 것도 없이 아시아의 벽조차 안나푸르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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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비록 청소년 대표일망정,그리고 북한이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편파판정 심판을 혁명적으로 두들겨 패 버려 출장 금지를 당해 어부지리로 얻은 대타 출전이었을망정 오랜 숙적 호주와, 세상에나 개최국 멕시코(이 경기도 정말 명승부였다)를 메다꽂고 당당히 8강에 진출했다는 사실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북한의 월드컵 8강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가마모도가 이끈 일본의 멕시코 올림픽 동메달이 얼마나 배 아팠던가. 8강전의 상대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우루과이가 어디라고 우리가 감히 어깨를 나란히 할 존재였던가. 7년 뒤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뿐 아니라 세계적인 스타로 이름 드높을 루벤 소사도 바로 그 팀에서 뛰고 있었다.

 

월드컵 첫 우승국에 빛나고, 자타공인 축구의 나라 브라질이 우승컵 한 번 쥐어 보겠다고 자국에서 개최했던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보기 좋게 역전승을 거두어, 마라카나 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20만 관중을 통곡하게 만들었던 ‘브라질의 호적수’ 우루과이 대 아시아의 자칭 호랑이 한국.

 

이 운명의 경기가 벌어진 것은 기독교인들이 주일이라 부르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우리 아들까지로 치면 5대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는 집안이고, 나름 주일 성수를 하고 있었던지라 나는 대망의 8강전을 놓치게 될까 다소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아침 먹다가 오늘 교회는 가는 거지요?라고 조심스럽게 여쭈었을 때 아버지의 대답은 실로 명료하고 핵심을 관통하는 한 마디였다.

 

“오늘 축구하는 날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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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야구하는 날은 아니죠. 후일 로봇 축구라는 비아냥을 듣긴 했지만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의 패스웍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뻥 축구와 어거지 골에 익숙해 있던 내 눈에 이건 기존의 한국팀이 아니라 어디 실미도 쯤에서 특수 훈련을 받고 나온 특공대로 보였다. 전반전이 얼마간 흘러가면서 우루과이 선수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고 한국 선수들의 몸에 넘치는 자신감이 화면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그건 수십 년 동안 주눅 든 한국 축구에 질릴 대로 질리면서도 익숙할 대로 익숙했던 우리 아버지한테도 전염됐다.

 

“우루과이 별 거 아니다! 밀어라.”

 

얼마가 지났을까 우루과이 문전을 위협하던 김종부가 통렬한 슛을 날렸다. 골키퍼가 가장 막기 어렵다는 무릎 아래 골문 모서리로 빨려 들어가던 공을 우루과이 골키퍼가 동물 같은 반사 신경을 발휘하여 펀칭해 냈을 때는 온 동네에 아이고 소리가 드높았지만 잠시 뒤 천둥 같은 함성이 일렁였다. 멋진 다이빙 펀칭의 주인공이 우루과이 골키퍼가 아니라 수비수였던 것이다. 페널티킥이었다.

 

브라질도 한 수 접어 준다는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에게 선제골을 먹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언감생심 어찌 해 볼까 마음을 졸이는 아가씨로부터 “오늘 시간 되세요?”라고 은근한 데이트 신청을 받은 기분이랄까, 온 나라가 조용하지 않았다. 반 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툭 차 넣기만 하면 나머지 반 골이 완성된다.

 

키커는 멕시코 전에서 환상적인 터닝슛을 성공시켰던 주장 노인우. 그런데 슬프게도 공은 우루과이의 골대를 정통으로 맞추고 튀어나왔다. 망연자실... 아이고오오오 소리도 차마 나오지 못했다. 때 빼고 광 내고 현금 지급기에서 두둑히 빼서 데이트 장소에 나갔더니 “꼭 인사 시키고 싶었어요. 제 애인이에요.”라고 화사하게 웃는 아가씨를 마주하는 심경이랄까.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어허허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하면서 속 편한 체 해야 할 밖에. 아나운서도 그랬다.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빨리 잊어야 합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안정환은 “미친듯이” 뛰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83년의 노인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페널티킥을 못 넣은 그는 짖궂은 카메라에 계속 잡혔고 그때마다 푸르륵거리는 황소처럼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그가 빚을 갚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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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전이 시작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격적으로 나오던 우루과이 선수들 사이로 노인우가 우루과이 선수의 가랑이 사이를 뚫고 깊숙한 패스를 찔러 넣었고 그것이 신연호 선수에게 노마크 찬스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신연호가 마침내 골을 넣었다. 요즘은 멋있게 “골!!!!~”을 외치지만 그때는 아나운서도 즐겨 “꼬링”이라고 발음했었다. 꼬링의 절규가 태평양을 건너올 듯 아나운서는 꼬링을 외쳤다. 이춘제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그분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하지만 우루과이가 그렇게 쉽게 주저앉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한 골을 먹은 후 우루과이는 더욱 공격적으로 나왔고 한국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남미 특유의 개인기는 눈에 띄게 둔해진 한국의 스피드를 눌렀고 공격의 칼끝은 한국팀의 심장을 여러 번 스쳤다. 한 번 한국 골문이 뚫렸지만 다행히 반칙이 선언되어서 가슴을 쓸어 내렸는데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결국 한 골을 먹고 말았다.

 

1 대 1이었다. 우루과이의 맹공은 계속되었고 골키퍼 이문영은 무지하게 바빠졌다. 한 번은 문전쇄도하는 우루과이 선수와 몸싸움 끝에 공을 잡았다. 어어 소리가 터져나올만큼 심하게 부딪친 터라 부상을 염려했는데 나동그라졌던 이문영은 벌떡 일어나 늠름하게 공을 골 에리어에 꽂았다.

 

다행이다 싶은 찰나 이문영은 고꾸라지듯 그라운드에 다시 누워 버리는 게 아닌가. 우리가 리드하고 있었다면 시간 끌기라고 경고를 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이문영이 처음 넘어진 곳은 골라인 안쪽이었고 극심한 통증이 엄습한 상황에서도 이문영은 자신이 골 라인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고 공을 바깥에 내놓은 다음에야 두번째로 길게 누워 버린 것이다. 그는 팀내에서 몇 안되는 고등학생이었다.

 

경기는 연장으로 이어졌다. 일진일퇴의 공방전. 실로 투명한 경기였다. 투명함의 의미는 이렇다. 구만 팔천리 밖에서 벌어지는 경기이며, 위성을 통해 14인치 티브이로 전달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뼈와 뼈 부딪는 소리, 이따금 내지르는 독려의 고함까지도 유채화처럼 진하고 두텁게 펼쳐졌다.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고 보이지 않는 구석도 볼 수 있었던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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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가 개인 돌파를 시도하면 한국은 패스웍으로 우루과이 수비를 위협했다. 연장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한국 축구 사상 최대의 비운의 스트라이커 김종부가 골 라인을 치고 들어가다가 크로스를 올렸고 이것이 문전을 쇄도하던 신연호의 발에 맞고 우루과이 골키퍼가 처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데굴데굴 우루과이 골 네트의 품에 안겼다. 이날의 결승골이었다. 지옥같은 공방전 속에 들어간 골에 환호성이 벼락같이 터졌지만 아주 잠깐 불안한 의아함이 찾아들었다.

 

공을 넣은 신연호는 좋아 날뛰는데 다른 선수들은 어슬렁어슬렁 자기 위치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뭐야 오프사이드인가? 아니었다. 오프사이드가 될 수도 없는 상황이란 건 중딩인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 신연호가 왕따인가? 몇 초 뒤 제풀에 경기장을 뛰어다니던 신연호에게 선수들이 다가서긴 했지만 결승골을 넣은 스트라이커에 대한 대접이 영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아버지의 분석이 뒤따랐다.

 

"지친 거야. 골 넣었다고 뛰어갈 기운조차 아까운 거야."

 

골 하나를 보고 뛰었던 선수들이었지만 막상 골이 났을 때 그를 맘놓고 기뻐할 수도 없을만큼 힘겨운 승부였다. 골 세레머니하겠다고 날뛰는 힘마저도 아까왔을까. 내 큰형 뻘인 선수들이었건만 나는 그들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존경스러웠다. 어떤 목표를 향해서 매진하다가 목표의 달성을 보고도 기뻐할 힘조차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한다는 것, 그만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겠는가.

 

기뻐날뛰며 신연호를 덮치지는 않았지만 그 뒤로도 선수들은 죽을둥살둥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우루과이의 회심의 슛이 한국편으로 돌아선 골대의 여신의 장난에 말려 골대가 흔들리도록 박치기한 뒤 튀어나왔을 때 나는 한국의 믿어지지 않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들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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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강적을 만나든, 무슨 금성철벽에 부딪치든 쉽사리 주눅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나는 우루과이 전에 출격했던 "대한건아"들로부터 배웠었다. 도대체 왜 그들도 나이를 먹으면 백패스나 질질 하고 문전에서 헛발질하는 유전병을 이식받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날 그 대회에서만큼은 그들은 한치도 물러섬없이 남미의 강호와 맞섰고, 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골 라인 안에 들어온 공을 바깥에 내놓고서야 정신을 잃었고, 목표가 이뤄져도 기뻐할 수 없을만큼 몸과 마음을 쥐어짜서 팔다리를 놀렸다. 그리고 그들은 30년 가까운 지금도 툭하면 불려 나와지는 역사를 창조했다.

 

"너 우루과이? 나 한국!"과 같은 배짱으로 뛰는 듯했던 83년의 한국 청소년 국가대표팀처럼 말이다. 니가 개인기 부리면 나도 개인기 부릴 줄 안다며 우루과이 수비수 가랑이 사이로 킬 패스를 날렸던 노인우처럼 말이다.

 

주눅들지 말고 최선을 다해라. 골 세레머니를 할 기력이 없을 만큼 뛴 뒤에야 최선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쉽사리 지치지 마라. 포기하지 말라. 가장 멍청한 짓은 뛰지도 않고 지치는 것이고 끝나기 전에 포기하는 것이다. 83년의 멕시코에서 벌어진 경기는 나에게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U-20 대표팀이 36년만에 4강 신화를 '역대급' 드라마를 쓰며 재현하는데 이어, 결승까지 진출하고야 말았다. 이런 축구, 오랜만에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