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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2월 19일 김포공항 입국 대기실에서 이화여대 학생 십여 명이 기생 관광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일본 하네다 공항에서도 일본 여성 단체 22개가 한국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시기 여러 한국의 여성단체들이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가로막혔다.

 

박정희 정권은 기생관광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 기관을 독려해 ‘관광객’ 숫자를 늘릴 궁리만 했다.

 

문제는 여기까지는 그나마 양지의 성매매였다는 거다. 7사단이 떠나고 나서 이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일본 기생관광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면, 남은 2사단 즉, 미군과의 관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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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기지촌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1968년 합동위원회에서 미국 측은 오산 지역의 문제를 거론하며 미군들과 오산 지역 여성들(혹은 지역 사회와의 관계)과의 문제가 한미관계 즉, 정치적, 경제적, 안보적으로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인종차별과 성병이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흑인 병사를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기가 너무 커서 성관계가 힘들다는 물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병사들 내의 인종 차별 문제가 더 컸다. 백인 병사들은 흑인 병사를 접대한 여성을 거부했다. 흑인 병사의 수가 백인 병사보다 적었다보니 자연스레 흑인 병사를 기피하게 되었다.

 

가끔 기지촌 여성들의 태도도 문제가 되었다. 미군과 싸우다 술병으로 미군을 가격하기도 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휴가 때 일본에서, 월남전 때엔 월남, 대만, 태국 등에서 유흥을 즐겼던 미군은 한국 기지촌의 '서비스'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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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 정부는 기지촌 문제를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귀중한 ‘달러’를 벌었으니 박정희 정권은 이를 덮어두고 외면하려 했었다.
 

그러다 성병 문제가 걸렸다. 성병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지촌 여성들을 관리해야 성병을 관리할 수 있고, 이들은 한국인이다. 즉, 한국의 공권력을 동원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미군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

 

 

한미공조를 정권의 생명처럼 떠받들던 그들이 왜?

 

1960년대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자신들의 불만을 계속 전달했으나 한국정부는 무시했다. 한미공조가 곧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믿었던 시절에(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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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어깃장을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힘의 원천은 베트남, 바로 월남 파병이었다. 미국의 ‘용병’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오히려 미국 측이 한국 병사들의 전투수당을 보고 ‘용병’이라기엔 너무 싸다고 말했지만)였다.

 

전투가 끝난 뒤 흩어진 탄피를 주워서 몰래 한국으로 보내다 미군 사령부에 걸려 탄피의 ‘법적 소유권’을 두고 옥신각신 촌극을 벌일 정도로 궁했던 시절이다.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 용병으로 나섰고, 월남전을 통해 한국은 경제발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미국은 이 ‘용병’이 가뭄의 단비처럼 고마웠다. 이들이 피를 흘리는 만큼 미군이 흘릴 피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월남 파병을 무기로 미국 정부를 압박했고 외교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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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가 되어 국제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닉슨은 닉슨독트린을 선언하고,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어느새 핑퐁외교로 가까워진 중공과 미국은 수교를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었고, 대만은 UN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 안보 상황은 하루하루 악화되고 있었다. 당장 미 7사단이 철수하고 나머지 미군들도 철수 움직임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은 미군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이 때 눈에 들어온 게 기지촌이었다.

 

1971년 12월 박정희가 한미 1군단 사령부를 순시했을 때다. 부사령관이었던 이재전 장군이 박정희를 수행했고, 이때 미군의 불만을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다음 일정도 미루면서까지 이야기에 집중한다.

 

“기지촌의 불결한 환경과 성병 문제, 결정적으로 인종 차별이 문제입니다. 전세계적으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한 곳이 서독, 일본, 한국이잖습니까? 독일과 일본의 기지촌은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설이 잘 돼있고, 성병도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미군들의 불만이 지금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기지촌은 그 자체로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나 기지촌에서의 흑인차별은 닉슨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다(1960~70년대 흑인민권운동을 생각해보면 대충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71년 8월 31일 닉슨 대통령은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기지촌의 인종 문제를 종식시켜라.”

 

박정희 정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전까지 기지촌 정리가 어느 정도 됐다고 알고 있던 박정희는 청와대로 달려가 관계자들을 소집해 불호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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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타운'이라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었던 백태하가 독일과 일본 오키나와 기지촌을 목표로 만든 것으로,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하나의 도시였다. 미군을 위한 각종 클럽과 식당, 미용실을 비롯한 각종 잡화점, 상점, 환전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나서서 ‘성매매 신도시’를 하나 만들었던 거다.

 

이 아메리카 타운이 문을 연 게 1969년 9월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떠올리며 기지촌 정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재전 장군의 보고는 완전 딴판이었다.

 

박정희는 정무비서관이었던 정종택에게 기지촌 정화 사업을 직접 챙기라고 지시한다(공교롭게도 정종택은 당시 새마을운동 담당관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기지촌 정화 사업은 ‘기지촌 새마을운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71년 12월 31일 청와대에 10여 개 부처의 차관들이 몰려왔다. 이들을 위원으로 하는 청와대 직속의 기지촌 정화위원회가 발족됐다.

 

“중점적으로 다뤄야 할 사안은 기지촌 내의 성병관리, 그리고 흑백 인종차별이다. 이 두 가지는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한다. 더 이상 미군의 불만이 터져나오면 국가안보에도, 외화획득에도 문제가 생긴다.”

 

이제껏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근대 군대에서 가장 신경 썼던 것 중 하나가 병사들의 성병 관리였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성병 확산 비율은 주독미군, 주일미군을 압도했다. (독일과 일본의 ‘성매매 집결지’의 위생상태가 한국에 비해 좋았던 것도 있지만, 주둔하는 미군의 병력 구성 차이도 있다. 한국에 파견된 병사들은 독일, 일본에 주둔한 미군에 비해 자질이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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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명 당 성병 발생 건수가 1970년 389건, 1971년에는 553건, 1972년 692건으로 급증했다. 미군 부대 정문에서는 외출하는 병사들에게 콘돔을 나눠주는 게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 분노를 잠재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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