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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는 마르세이유의 노래라는 뜻이다. 프랑스 혁명을 뒤엎으려는 주변 국가들의 반혁명 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전국적인 의용군이 조직되는 가운데 마르세이유 청년들이 마르세이유에서 파리까지 행군하며 힘차게 불러제친 노래였다. 그래서 라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원래 이 노래는 마르세이유가 아니라 마르세이유에서 800킬로미터쯤 북동쪽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들어진 <라인강 수비대의 노래>였다.

 

전쟁 발발 직전, 전운이 짙어가던 라인강 수비대의 공병 대위로서 음악적 재질도 얼마간 있던 루제 드 릴은 상관의 부탁을 받고 애국적 열정에 사로잡혀 하룻밤에 노래 하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스트라스부르에서는 그리 큰 반응 없이 묻혀 버렸고 노래를 애써 배우는 사람도 없었다. 

 

어찌어찌 이 노래의 악보가 프랑스 최남단 항구인 마르세이유의 의용병들의 환송자리에까지 흘러갔다. 한 의대생이 왁자지껄한 실내를 침묵시킨 뒤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테판 츠바이크가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쓴 표현에 따르면,

 

마치 그가 화약통에 빠진 듯이 불꽃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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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렴구 ‘병사들이여 시민들이여 그대들의 군대를 만들어라’는 가사는 시민이자 병사들의 가슴을 뒤흔들고 찌르고 폭발시켰다.

 

“전파력은 눈사태처럼 강력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전파력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테판 츠바이크)

 

이 노래는 역사를 바꾸는 노래가 된다. 프랑스의 오합지졸 혁명군을 깔아보던 유럽 최정예 프로이센 군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돌진해 오는 프랑스 군에게 참혹하게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묶는 힘이 있다. 백 명이 한꺼번에 어떤 결의를 복창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노동에 가까운 일이고 운율을 딱딱 맞추기도 어렵다. 하지만 노래는 다르다. 천 명이든 만 명이든 한 노래의 가락과 가사에 영혼이 동시에 흔들리고 무방비 상태로 그 가슴을 털릴 수 있는 것이다.

 

<라 마르세예즈>는 한 노래가 인간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깨우쳐 준 극적인 증거였다. 변화에 둔감했던 사람도, 혁명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몰랐던 사람들도,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번개에 맞듯 혁명의 의미에 감전돼 버렸고, 드라마틱한 역사적 기억의 공유자가 됐다.

 

<우리 승리하리라>, 즉 'We shall overcome'도 그런 노래 중 하나다. 루제 드 릴이라는 명확한 임자를 지닌 <라 마르세예즈>와는 달리 이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결합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여기서 따오고 저기서 다듬어지고 또 누군가 덧대면서 점차 노래 꼴을 갖춰 가는데 1945년 미국 찰스턴의 어느 담배 회사에서 장기 파업이 끝나던 날, 노동자들이 신나게 불러 젖히면서 역사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함께 가만한 당신: 함께 있어 든든했던,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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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를 처음 공식화한 건 포크 가수 피트 시거였다. 그는 이 노래의 가사를 조금 손 봐서 음반을 통해 세상에 내놓는다. 그 이전 사람들은 “I will overcome”을 노래했지만 피트는 “We shall overcome”으로 바꾸어 놓았다. 피트 본인은 발음하기 쉬워서 그랬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개인적 결단이 집단적 결의로 승화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가이 캐러원이라는 이가 멜로디를 약간 다듬어, 우리에게 익숙한 버전의 명곡 We shall overcome, 즉 <우리 승리하리라>가 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은 점차 심각해지는 인종 갈등으로 피멍이 들어가고 있었다. 해방됐다고는 하나 결코 자유롭지 못했고 평등하다고 하나 절대로 동등하지 않았던 미국 내 흑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저항에 나섰다. 백인들만의 학교에 악착같이 머리를 들이밀었고 린치를 당하고 불에 타 죽어가고 나무에 목 매달리면서도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5년 12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법을 어겨 기소된 로사 파크스처럼, 백인 전용 식당이나 공간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버티는 싯 인(Sit in) 운동은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에 체포되고 두들겨 맞고 생명의 위협도 당했지만 흑인들은 ‘엉덩이를 걸칠 자유’를 위해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걸었다. 그중 한 현장에 가이 캐러원이 기타를 들고 나타난다.

 

“1960년 4월 15일 캐러원은 4월 15일 노스캐롤라이나 쇼(Shaw) 대학에서 열린 ‘학생비폭력조직위원회(SNCC)' 출범식에 초대된다. 그는 행사 막바지에 단상에 올라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 한 곡을 부른다. 낯익은 듯 새로운 가락. 쉽고 장중하지만 가라앉지 않는 리듬과 박자. 그리고 좌절의 순간에도 승리를 예감하게 하는 기품어린 노랫말. ‘We shall overcome’이었다. 200여 명의 학생 대표단은 즉석에서 노래를 익혀 제창한다.” (한국일보 2015.5.23, 최윤필 기자)

 

그 장면을 상상해본다. 노래를 듣는 학생들의 마음에도 불똥이 튀었으리라. 눈앞에서는 자신들이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비참한 잔상들이 스치고 지나갔으리라.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사지가 들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쳐지고, 경찰의 총구가 서늘하게 이마에 와닿고 온갖 저주와 욕설이 천 개의 바늘로 고막을 찌르고, 천 길보다 높은 벽 앞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낙담하던 스스로의 모습과 친구들의 얼굴이 스쳐갔으리라. 그들에게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라는 가사는 글자 그대로 든든한 방패로, 용기로 날을 세운 칼로, 탄력 넘치는 도움닫기로 다가섰으리라.

 

이런 노래는 바짝 가문 논바닥에 물 스며들듯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 흑인들은,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정직한 미국인들은 곳곳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인종차별주의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공권력과 소방대가 뿌리는 물과 경비견에 맞서 나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 노래는 세계사적인 무대에 등단하게 된다.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또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해방을 촉구하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I have a dream”으로 유명한 명연설을 했고 뒤이어 무대에 오른 포크의 전설 조안 바에즈가 We shall overcome을 낭랑하게 노래한다. 수십 만 군중은 울고 웃으며 그 노래를 합창했다. 그건 이미 노래가 아니었다. 유장한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물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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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한국에 처음 번역, 소개한 것은 <아침이슬>의 창조자 김민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대한민국에는 유신의 어둠이 덮쳐왔다. We shall overcome은 <우리 승리하리라>로 바뀌어져 한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효시라 할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되던 날, 전태일이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경찰과 맞섰고, 남성 노동자들로부터 ‘똥물 테러’를 당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입 속에 퍼 넣어진 똥을 내뱉으며, 똥물로 더럽혀진 옷을 벗고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 1976년 3.1 민주구국 선언 후 김대중, 문익환 등 여러 인사들이 유신의 감옥에 갇혔을 때 며칠 전 돌아가신 이희호 여사를 비롯한 구속 인사의 가족들이 굳게 닫힌 감옥 문 앞에서 목메어 불렀던 노래 역시 “참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였다.

 

며칠 전 홍콩 시위에서 홍콩 시민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보았다. 개인적으로 그 영상을 보면서 자발없이 눈물이 치솟는 바람에 일순 당황했다. 중뿔나게 뭘 한 것도 없고, 그 노래 앞에서 당당한 삶을 살고 있지도 않은 주제에 이 무슨 주제넘는 짓인가 스스로 놀란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울컥함은 오만함이나 착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기억과 공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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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시민들은 이전에 경험했던 부르봉 왕가와 귀족 ‘돼지’들의 횡포를 되새기고, 그들 아래에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몸서리치며 곱씹었을 테고 We shall overcome을 부르던 사람들 역시 비슷했으리라. 꼭 어떤 직접적 경험을 보유하지 않았더라도, 이심전심의 역사적 기억은 노래 속에서 풍요로워지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벽은 노래 가락과 가사가 열어주는 공감 속에서 허물어져 갔다. 바로 그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홍콩 시민들은 내 기억의 문을 열었고, 그들의 처지에 직통으로 공감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지난 주말, 나는 그들이 부르는 광동어 가사를 우리 말로 엉성하게나마 옮겨줄 분을 애타게 찾았다. 4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는 대학 동아리 연습장에 가지고 가서 선배들 동기들 붙들고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라도 불러서 유튜브에라도 올려주자고 강요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고 홍콩 사태는 어느덧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홍콩을 한 번도 가 보지 못하고 별 관심도 없던 한국의 한 중년 사내는 그렇게 홍콩 사람들의 열렬한 연대자가 됐다. 노래의 힘이었다.

 

“여긴 모든 것이 스러지고 모든 것들이 시작되네. 용감했던 노래는 언제나 새로운 노래일 것이네.”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선언> 중에서)

 

홍콩에서건 한국에서건, 세계 어디에서건 압제에 굴하지 않고 일어서고, 승리를 다짐하고,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고 외치는 노래가 힘을 잃지 않기를, 항상 새롭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때 나이 아흔 둘의 피트 시거가 We shall overcome을 불렀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