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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저 속의 마이너리거 

2. 종합직과 일반직 그리고 화초에서 잡초로

3. 직장의 일그러진 엘리트들

4. 크게 나쁜 일은 혼자서 못한다, 크게 좋은 일처럼

5. 상처뿐인 승리

6. 리더의 자세와 사내 불륜이 미치는 영향

7. 20년 다닌 직장을 관뒀다

8. 퇴사 후 느끼는 것들

 

9. 나쁘기만 하거나, 좋기만 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1.

 

퇴사 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얼굴 한 번 보자고 연락해 왔다. 호의에서 비롯된 제안인 걸 알고 있지만 영 내키지 않아 대부분 좋은 핑계를 찾아 거절했고, 간혹 예의가 아닌 것 같은 자리는 마지못해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꼭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왔다. 왜냐면 이들은 전부 나를 위해 내 '적들'을 함께 욕해 주고, 그들의 최근 근황까지 친절하게 업데이트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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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그들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그들 얘기를 듣고 온 다음 날, 거짓말처럼 온몸에 시뻘건 부스럼이 일었고 밤새 가려운 데를 찾아 긁으며 생각했다. 수녀님 말마따나 남을 미워하는 건 내가 마시는 독이구나, 그렇구나, 그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독배를 마셨구나.

 

퇴사하기 전부터 취미 삼아 하던 팟캐스트에 얼마 전, 딴지일보 필진 '춘심애비'님을 게스트로 모셨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처럼 환담을 나누고 헤어졌고, 집에 와 그날 녹음한 음성 파일을 편집하는데 돌연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정서나 감정에 의해 일을 처리한다. 사람들 대부분 어떤 일을 대할 때 옳고 그름을 떠나, 좋다 싫다는 취향의 문제로 접근한다는 이야기다. 그 취향이라는 건, 유시민 작가가 말했듯 근거를 댈 필요조차 없는 거라고. 편집하느라 반복해 듣고 있자니 희한하게 오래도록 품고 있던 의문이 풀렸다. 그렇다. 내가 다니던 회사 사람들은 여태 나를 순전히 정서적인 문제로 싫어했던 거다. 그러니까, 단순히 취향의 문제다. 한데 나는 것도 모르고 계속 그들에게, 대체 왜들 그러는 거냐고 묻고 또 물은 거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미친년이 따로 없다. 취향 차를 탓했으니 이것 참. 

 

다음날 온몸에 연고를 바르며 다짐했다. 남은 생, 더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두 번 다시 누굴 미워하고 살지 말아야지. 며칠 지나자 부스럼은 오른쪽 손목 부근에 옅은 손톱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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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공부 좀 한다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이 사람들은 애초에 기업에서 일을 시키기 좋게 맞춤 설계된 인재들이고 그걸 증명하는 건 이들의 성적이다. 학생 시절, 부모님과 교사에게 순종했고, 그 대가로 좋은 대학에 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취직한다.

 

나는 이들에 비해 질서도 규율도 잘 안 지키고, 어른들(임원등)도 무서워 않고 제멋대로다. 이런 연유에서 나는 이들의 감정을 건드렸지 않았을까. 조직에선 다수의 정서에 소수가 따르는 법인데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최근 노동법이 개정되어 '직장 내 따돌림 방지법' 항목이 추가되었다. 이 일을 두고, 주변 사람들이 한 달만 더 참고, 그 법을 적용받고 나오지 그랬냐 했다. 나도 그 얘기에 혹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로 내 경우는 직장 내 괴롭힘 항목에 들어 있었다. 한 달 더 다닌다고 해서 내가 과연 회사에 공론화해 일을 문제 삼아 퇴사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안 했을거다. 만약 내가 개정된 법을 운운한다면, 전에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나를 대놓고 미워해도 되는 명분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할 거다. '거 봐라, 내 여러 번 경고하지 않았냐, 쟤 위험하다고, 결국 일을 치지 않느냐고'. 그래서 싫다. 나는 아마 7월 16일 이후에 퇴사했어도 내 방식대로 싸우고 조용히 짐을 챙겨 나왔을 거다. 짧지 않은 생 살아 보니, 다른 건 몰라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만에 하나 내 퇴사가 산재처리 된다 해도 나는 그렇게 받는 알량한 합의금 대신, 말할 수 없는 정서적 고통을 치렀을 거다. 받은 거 없으니 이렇게 떠들 수 있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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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백수가 되고 만나는 한낮의 시간은 여전히 낯설다. 진짜 백수가 되고 보니, 계속 회사에 다녔다면 몰랐을 생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그래서 생각한다. 생의 어떤 일이든 나쁘기만 하거나 좋기만 하거나 하지는 않은 거 같다고.

 

 

3.

내가 사는 곳은 서울 구시가지다. 지난해 집을 구할 때 서울 특유의 번잡이 싫어 일부러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이 동네에는 발달 장애를 겪는 청년이 산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덩치도 좋고 키도 훤칠하게 크다. 이사 오고 얼마 후 나는 그를 퇴근길에 처음 봤다.

 

내가 사는 빌라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데 어둠 속에서 그가 나타나 갑자기 내 차로 성큼성큼 걸어와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겁에 질린 나는 순간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를 할까 하다가 왠지 모를 어떤 오기가 생겨, 그러니까, '더는 생에 미련 없다더니'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차에서 내려 그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고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걸어 집에 왔다. 그는 내 뒤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온 나는 불도 켜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미끄러져 내렸다. 한동안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 후로 나는 집 앞 편의점에서 다시 한 번 그를 봤다. 이번에 그는 어린애들이나 고르는 군것질거리들과 콜라를 사서 허겁지겁 먹더니 봉투는 아무 데나 내팽개치고 갔다. 옷은 더러웠고 행색은 초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무서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백수가 된 어느 날, 대낮에 그를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내가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던 관계로 그를 유심히 봤다(백수의 잠점이다. 뭐든 유심히 볼 수 있다). 가만히 보니 마치 자기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잊은 유아처럼 행동했다. 동네에 차가 들어오면 그게 뭐가 됐든 무조건 쫓아가 반겼다. 배달 트럭이 오면 트럭에 가 이리저리 차를 살피고 운전석을 들여다봤다. 흔하디 흔하고 별다를 게 없는 소형차가 들어오면 그는 달려가 유심히 보았다.

 

그제야 알았다. 그날 그가 왜 내 차에 달려들었는지, 그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주 가는 보육원의 아이들과 행동이 비슷했고 저 친구와 비슷한 처지의 꼬마가 있기 때문이다. 먼 훗날 그 아이가 자라, 혹여 나 같은 이웃을 만날까 두려웠다. 나 같은 이웃이 그 아이를, 아니 이 청년을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하고 의심할 거 아닌가.

 

백수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유심히 볼 수 없었다면 그냥 미친놈이라고 욕하거나 두려워하며 살거나 경찰에 신고하고 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 정말 서로 몰라서 이러고 사는 거 아닐까, 내가 이 친구를 몰랐듯, 전에 다니던 회사 사람들도 나를 잘 몰랐고, 덕분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괴롭히며 살게 된 게 아닐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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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사는 게 속 편하다. 이 무한 경쟁사회에서 서로를 안다고 한들 득될 게 별로 없다.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알면 이렇게 맹렬한 태도로 상대와 싸울 수 없다. 해서 어쩌면 특별한 경우를 빼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른 채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백수가 되니 생각이 많아지는 듯하다.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자본가들에게 맞춰 한평생을 사는 걸까. 국민 소득 3만 불을 넘겼다는데, 어째서 이렇게 힘들게 경쟁하며 사는 걸까. 대기업이 뭐라고, 공무원이 뭐라고, 같은 반 친구 공책을 찢어서라도 시험에서 승리해야 하며 사는 건지. 왜 우리 아이들은 한참 뛰어놀아야 할 시간에 작은 책상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지내는지. 그 일이 과연 누굴 위한 일인지. 왜 자꾸 건물을 높이 올리고 배를 멀리 보내야 하는지, 이제 좀 다 같이 함께 천천히 가면 안 되는지. 크게 다치지 않고 크게 울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그리 힘이 드는 일인지, 의문이 자꾸 든다.

 

5.

그나저나 여름이라는 계절이 새삼스레 덥다.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지난 20년간 여름이라는 계절이 이렇게 더운 줄 몰랐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올해는 작년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주변 사람들 증언이다.

 

나는 지난 여름, 머리 위로 쏟아지는 에어컨 바람에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회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올해는 다르다. 더우면 찬물로 씻고 선풍기 앞에 와 앉는다.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야 할지 조금도 고민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지금으로선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그만 둘 걸 그랬다 싶다. 

 

지난 일 년간 남모르게 애태운 그 마음이 서러우리만치 아깝다.

 

 

 

 

 


 

 

필자 주

 

http://www.podbbang.com/ch/1770326

 

안녕하세요산만언니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 불행에 대해  다르게 고민했고우연히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말로   있는  글로  하지 못해 <삼풍 생존자가 말합니다>라는 지난 연재글의 연장 선상에서 팟캐스트를 시작했습니다주변에 독특한 캐릭터성을 가진 친구들을 섭외해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패널들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다보니내용에 대한 전문성도 떨어지고,  밝은(?) 목소리 탓에 더러 ' 본의' 오해 받곤 하지만이를 통해 성장하고 싶고전에 제가 글을 올리며 독자분들께 받았던 진심어린 위로와 감동에 보답하고자 기획한 팟캐스트니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봐 주세요나름의 감동과 재미가 있습니다!

 

질문있으시면 molaseo99@gmail.com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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