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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Screen)

 

80년대 영화 중에서 혹시 기억나는 영화가 있는가? 그 시절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라면 전봇대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뽕’이나, ‘애마부인’ 포스터를 기억에서 끄집어낼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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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수 10위 내에 있는 영화들을 손 꼽아 보면, ‘깊고 푸른 밤’,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 ‘매춘’, ‘애마부인’ 등등이었다. 낯설지 않은 제목일 것이다.

 

1980년대 한국 영화계는 ‘에로’의 시대였고, 퇴보의 시기였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1980년대 영화의 핵심은 ‘통금 해제’와 ‘검열 완화’ 두 개의 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1982년 1월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사람들이 찾았던 전두환 시대 ‘첫 번째 블록버스터’가 바로 ‘애마부인’이었다. 1982년 2월 전국은 애마부인 열풍에 휩싸이게 됐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심야 영화 붐이 일어나게 됐다. 밤에 볼만한 영화가 꼭 ‘헐벗은’ 영화여만 하는 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과 사회 분위기, 산업적 측면에서 에로영화는 대세였다. 

 

검열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이때도 여전히 검열의 가위질을 피해갈 수 없었으나, ‘이런 쪽’에 있어서는 상당한 재량을 주었다. 그 결과 한국 영화판은 ‘에로판’이 돼 버렸다. 

 

1982년 개봉된 영화 56편 중 35편이 에로 영화였다. 무려 62.5%가 헐벗은 영화였다는 거다. 물론, 에로 영화를 폄하하자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 만듬세다.

 

똑같은 군사정권, 아니, 그 보다 더 엄혹했던 유신 시절에 만들어진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라. 그 엄혹했던 197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에로영화의 탈을 쓴 사회고발 영화였다. 원작 각색에 참여했던 김승옥이 원작의 사회비판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 가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문학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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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에 파병됐다 돌아와 목욕탕 때밀이를 하고, 식모살이를 하다 사장집 아들에게 겁탈당하고, 호스티스를 전전하는 모습은 70년대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에로 영화는 목적 자체가 벗는 거였다. 국민들에 대한 우민화 정책이었다. 

 

 

그리고 섹스(sex)

 

에로 영화의 번창을 보면 알겠지만, 80년대는 우리나라의 욕망이 폭발한 시절이었다. 결정타는 바로 통금시간 해제였다.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난 ‘다음’의 일을 생각할 여유가 생기게 됐다. 

 

대한민국 성매매의 역사는 1982년 1월이 하나의 분기점이 돼 주었다. 오늘날 고급 유흥가로 자리 잡은 테헤란로와 강남 지역. 이 지역은 1970년대 강남 개발과 동시에 ‘유흥거리’가 먼저 자리를 잡게 됐고, 1980년대가 되면 완성된다. 수많은 숙박업소들과 ‘여자’와 관계되는 술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통금 해제로 사람들은 40여 년 간 옥죄어 왔던 ‘욕망’을 풀어 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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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대해서는 잠깐 설명을 해야겠는데,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해방 이후 1989년까지 대한민국의 ‘문화’는 빗장을 걸어 잠그고 억눌린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1989년 이후에도 문화산업은 억압받았고, 빗장을 열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1990년대까지 때만 되면 Y로 시작되는 단체에서 만화책을 모아다 불살랐고, 검열이 있었으며, 일본 문화는 김대중 정부가 돼서야 개방이 됐다. 

 

그럼에도 내가 1989년까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는 표현을 쓴 건 해외여행 자유화 때문이다. 지금의 기준으론 이해가 안 가겠지만, 1983년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나가지 못했다. 1983년이 돼서야 겨우, 

 

“50세 이상에 한해서 해외여행 자유화를 하겠다.”

 

라고 정부에서 발표를 하게 된다. 다 늙어서(당시 기준으론 중늙은이였다) 이제 인생을 정리해야겠다고 하는 시절이 돼서야 겨우 해외여행을 할 ‘권리’를 얻게 되는 나라. 

 

해외여행 자유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권발급 연령을 차츰 낮춰서 50세에서, 40세로 한 번 더 낮추고, 1988년이 되면 30세 이상으로 낮추고, 해외 관광 여행 횟수 제한도 폐지했다(이때까지만 해도 해외여행은 1년에 2번까지만 허용됐다). 그러다가 1989년이 되면 완전 자유화가 된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여권’은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신분을 보여줬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여권은 해외출장을 나가는 공무원, 기업인, 해외 학교에 유학을 떠나는 이들에게만 발급됐다. 이런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 예를 들자면, “해외여행” 같은 사유는 ‘불온한’ 생각이었다. 왜 그랬던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외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때까지 우리나라 국민들은 해외로 나갈 수가 없는 존재였다. 정권은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아껴야 잘 산다.”

 

“이제 겨우 밥 먹고 살게 됐는데, 다른 걸 생각하는 건 사치다.”

 

가진 게 없으니 아껴야 된다는 논리.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도 성장기 시절. 가진 자들은 가지지 않은 자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했다. 그들은 밤의 장막 저편에서 즐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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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를 요정 정치 시대라 부르는 이유가 뭘까? 이들은 밤마다 기생을 끼고 놀았다. 권력자들은 날마다 기생을 유린했다. 일본 관광객도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는 성장해 나갔다. 그런데 정작 이 여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아니, 이 여인들의 아빠, 동생, 오빠, 엄마의 삶은 어떠했을까? 

 

권력자들은 조금만 더 참으라 말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에게 허용한 ‘위안’은 딱 3가지뿐이었다. 바로 ‘소주’, ‘담배’, ‘여자’였다. 셋 다 돈이 들지 않았다(외화 유출이 없었다). 이를 제외한 문화와 유흥은 죄악시됐다. 왜? 돈이 되지 않고, 돈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현 권력체제에 대해 반감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아니, 반감을 드러냈다. 

 

국가주의 체제였던 70년대(이후 전두환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국기 하강식 때 운행하는 차량과 사람들이 멈춰 서서 경례를 해야 했고, 교련복과 교복에 몸을 감싸야 했으며, 개인의 두발 상태까지 국가가 점검했다. 엄숙주의를 넘어서 사회주의 체제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이 된다면 돼지털까지 밀어서 수출하던 시절이 아닌가?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그러나 기계도 24시간을 계속 돌릴 순 없다. 사람도 쉬어 가야 한다. 그걸 알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는 정권 안보 차원에서 소주값을 지켜냈고, 담뱃값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 

 

즐길 수 있는 문화 자체가 아예 없는 시절. 정부는 술과 담배, 여자를 내놓았고, 이걸로 시름을 달래라 말했다. 이건 외화가 낭비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척박한 겨울이 지나고, 전두환은 전임자와 다른 색깔을 보여주겠다며 규제들을 하나씩 풀었다. 요즘도 1980년대 교복 자율화를 말하며 보여주는 그때 당시의 모습들. 얼마나 어색한가? 옛것이라 어색한 게 아니다. 그 당시 한국 젊은이들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기껏해야 교복과 교련복이 다였던 시절에 갑작스레 맞은 교복 자율화. 결국 파카나 청카바, 청바지가 고작이었다. 

 

통금 해제도 그러했다. 얼떨결에 얻게 된 자유 앞에서 사람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아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즐길 만한 문화 자체가 전무한 시절이었기에 심야 극장으로 가 에로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박차가 나가 술을 마시고, 여자를 찾았다. 

 

밤 시간이 거세된 40여 년을 보낸 한국. 한 세대 이상을 ‘밤’이란 집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만 한다고 배웠던 이들에게 밤은 ‘향락의 시간’이 됐다. 

 

그리고, 성매매 산업이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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