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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청산리 전투'를 처음 배웠을 때의 일이다. 우리 할머니는 손주가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 것을 노래 듣듯 즐기셨기에 그날도 '청산리 전투'와 '김좌진 장군' 이야기를 배웠다고 종알종알 늘어놨는데, 항상 흥겨운 추임새만 넣으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끊으셨다.

 

"청산리는 홍 장군이야. 청산리 싸움은 홍 장군이 한 거라니깐두루."

 

나는 당연히 학교의 권위를 내세워 김좌진이 맞다고 우겼다. 그런데 평소엔 뭐든 네 말이 옳다 웃으시던 할머니의 결기가 보통이 아니셨다.

 

"네 할아버지가 따라다니던 장군이 홍장군인데 내가 그걸 모르갔니 홍 장군이라니까. 김좌진인가 그 양반도 한몫 했는지는 모르갔지만."

 

이야기인즉슨 1899년생이던 할아버지가 만주에 살던 팔팔한 조선 청년이면 대충 그랬듯 독립군에 가담해서 얼마간 따라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부대가 홍 장군의 부대로 청산리 대첩을 이룬 부대라는 것이다. 나는 김좌진밖에 모르는데.

 

수수께끼는 머지않아 풀렸다. 홍장군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오래된 국정교과서의 지식으로는 그는 '봉오동 전투'의 짝이 되는 인물이다. 교과서 속에서 '청사에 빛날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과 이범석의 훈공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기실 그 공훈의 절반 또는 2/3는 홍범도 부대의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청산리 전투는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던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의 연합 작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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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장군 가운데 가장 일찍 일어났고 가장 늦게까지 싸운 독립군 지휘자 가운데 하나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된 후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평양 감영의 군인이 됐고 거기서 사격술과 군인으로서의 기본 자세를 배웠다. 그런데 하도 꼴같잖게 구는 상관을 피양 박치기로 들이받아 버리고는 군인 노릇을 집어치워 버렸다.

 

이후 머리를 깎고 불제자도 되어 봤으나 역시 무인(武人)의 기운을 떨칠 수가 없었던지 낭림산맥과 개마고원 일대의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즈음 대한제국을 통째로 집어삼키던 일본은 껄끄러운 가시 하나를 발라내려는 시도에 나섰다. 껄끄러운 가시란 홍범도 같은 사냥꾼들이 보유하던 총기였다. 일본은 모든 사냥꾼과 포수들에게 총기 수거령을 내린다. 임진왜란 때 쓰던 조총과 별반 다를 바가 없던 구닥다리 화승총도 못내 보아주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수거령은 화승총 하나로 먹고 살던 포수들에게 이는 청천벽력이었고 그렇잖아도 뻗쳐나가던 반일 감정에 불을 붙였다. 그들을 지휘하며 일어선 것이 홍범도였다. 1907년 11월 15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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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직순 화백 - 봉오동전투

 

홍범도 부대는 일본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콧대를 꺾었던 강원도 포수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떨어질 리 없는 함경도 평안도 산골의 포수부대는 글자 그대로 '스나이퍼' 부대였던 것이다. 홍범도는 그 대장이었다.

 

전설 같은 얘기에 따르면 "동지들 먼저 가오" 해서 부하들을 앞서 보낸 후 혼자 남아서 저격으로만 수십 명의 일본군을 처치하고 휘적휘적 돌아오기도 했다 한다. 적의 공포는 나의 기쁨, 한인들은 노래를 부르며 홍 장군을 찬미했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골머리를 앓던 일본은 그 아내와 장남을 인질로 삼고 홍범도를 무릎 꿇리려 했으나 홍범도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아내와 아들은 고문 끝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전투 중에 죽었다(1920년의 경신대참변 - 일본이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을 대학살한 사건 - 와중에 죽었다고도 한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평안도 함경도라면 조선 왕조 내내 차별받던 지역이다. 거기다 그나마 양반도 아닌 신분이었던 홍범도가 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라고는 쥐뿔의 티눈보다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처자를 잃어가며 악착같이 없어진 나라 위해 싸웠을까. 민간인을 강간한 부대원을 스스로 총살한 후 자신의 옷으로 그를 감싸 묻은 후 사흘 동안 음식을 받지 않고 슬퍼했던 인정 많고 감수성도 풍부했던 남자는 왜 싸움터를 떠나지 않았을까.

 

청산리 전투는 독립운동의 금자탑이자 재앙의 팡파르였다. 일본은 경신대참변을 일으켜 독립군의 뿌리를 뽑으려들었고 그로 인해 수만의 조선인이 죽어다. 독립군은 독립군들대로 안전지대를 찾다가 참혹하게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기가 꺾였다(자유시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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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잉걸불처럼 타오르던 홍 장군도 빛을 잃는다. 한때 레닌에게 권총을 선물받을만큼 투쟁 지도자로 인정받던 그였으나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하던 스탈린에게는 "그놈이 그놈"인 조선인의 일원일 뿐이었다. 그는 소련 영토에 살던 수만 명의 조선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부하를 잃고 조직을 상실하고 자신이 투쟁할 대상마저 잃어버린 홍 장군은 더 이상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극장의 수위로 말년을 보낸다. 파르티잔을 잔뜩 미화하는 영화를 틈틈이 훔쳐보면서 홍 장군은 대관절 어떤 심경이었을까. 소련의 중앙아시아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기에 그는 또 한 번 잊혀진다. 사회주의자인 적도 없었던 그였지만 소련에서 죽은 독립군 지도자의 행적은 남한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릴 적 봤던 위인전에서 그는 '행방불명'으로 처리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1907년 11월 15일 함경도 산골짝에서 한 사내가 일어섰다. 곰 잡고 멧돼지 쏘던 범 같은 포수들에게 그는 소리 높여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이 종간나 쪽바리들이 우리 조선 아니 대한제국에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갔시요? 이 꼴을 당하고 어찌 살갔소. 둑을 땐 둑더라도 찍하고 죽어야지비. 일어나기요. "

 

평안도와 함경도 말투가 반반씩 섞였을 그 말투로. 사냥꾼 홍범도가 아닌 홍범도 장군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