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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았다. 영화평은 생략하기로 한다. 한국까지 건너 와서 출연해 준 일본 배우들에게 무안할 지경이라는 말로 대신하겠다. <명량>도 그랬지만 영화 이상의 소재를 배달의 기수 아이템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나는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어려서 할머니가 찔끔찔끔 들려 주시던 1920년대 만주 이야기들이 스크린 속에 문득 묻어나오는 걸 여러 번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 만주 지역에 살던 수많은 조선 청년들 거개가 그랬듯, 할아버지도 독립군의 일원이 됐는데 할아버지가 따라다닌 대장 이름이 홍범도였다. “홍 장군은 총을 참 잘 쐈다 했다. 졸병들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장군님 총 솜씨 한 번 보여 주기다 졸랐더니 총알 아깝다고 한 번도 아이하더니 하루는 뭔 기분이 좋았능가 수백보 바깥에 매달린 솔방울을 보기요 하더이마는 그걸 탕 하고 떨어뜨렸다는 거야.”

 

하필이면 <명량>의 이순신이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로 막판 등장해서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우상같이 떠받들었다는 홍범도 장군의 이름 석 자는 책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때렸다.

 

영화 내용은 그저 초라하지만 정의로운 독립군과 악독한데 어리석은 (영화상으로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유인한 걸로 돼 있는데 내 보기에는 그냥 일본군이 죽여 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식으로 연출해 놨다) 일본군의 대결로 초지일관이다. 당연히 스테레오 타입으로 일본군의 양민 학살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지겨운 클리셰 앞에서도 나는 하품을 하지 못했다. 목이 찢어지는 일본군의 고함과 가슴이 찢어지는 조선인의 비명 사이로 할머니가 해 주신 이야기가 겹쳐 들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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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소년 삼국지를 읽으면서 ‘목을 벤다’는 표현을 접할 때였으니 초등학교 3학년쯤 됐을까. 호랑이도 직접 본 적이 있으시고 곰과 늑대와 맞닥뜨린 얘기를 실감나게 해 주시는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이 목을 베면 어떻게 돼요? 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선연하게 기억나는 잔혹한 얘기를 해 주셨다.

 

“일본놈들이 사람 죽이는 걸 봤었다. 작두 (나는 작두란 걸 한참 뒤에 알았다. 그 전엔 망나니 같은 사람인 줄로 착각했다) 가져다 놓고 무 써는 것처럼 사람 목을 쳤지. 그런데 보통 사람은 목이 떨어지면 픽 엎어져 죽는데 한 사람이 세상에 목 없는 몸뚱이로 팔딱팔딱 뛰는 거야. 일본 놈들도 놀랐는지 담요로 그 몸뚱이를 누르고 기름 끼얹고 불을 질렀다.”

 

할머니의 기억은 아마도 경신대참변 때의 일일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뒤에 일본놈들이 악에 받쳐 저지른 일이라고 했으니까.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에서 쓴맛을 본 일본군들은 독립군들과 고기와 물 관계라 할 간도 지역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학살을 전개했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의심 가는 사람들을 죄 죽였고 그 죽이는 방식도 당시 칠십 노인이었던 할머니가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라고 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래서 영화 성격상 뻔히 예상되는 학살 장면에서 태연하기가 참 어려웠다.

 

영화에 일본군과 조선인의 대화 중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정보를 캐려는 일본군이 조선인에게 독립군이 어딘가로 간다는 게 맞나? 하고 확인하려 들자 조선인이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냐고 받아친다. 그러자 일본군은 이런 대사를 날린다. “조센징의 정보는 조센징에게서 듣는다.” 그다지 비상할 것도 없고, 특이할 것 없는 한 마디였지만 또 다른 의미의 말화살이 돼 귀에 꽂혔다.

 

독립군 노릇을 하실 때 할아버지는 한 조선인 마을을 방문했다가 마을 동구밖에서 한 나무꾼이 너무도 불쌍하게 두들겨 맞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나뭇꾼은 구슬프게 엉엉 울면서 자기는 밀정이 아니라며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무슨 확신이 있었는지 마을 사람들의 매질에는 살기가 돋아 있었다. 그냥 냅두면 5분도 못가서 송장이 돼서 숲 속에 파묻힐 신세였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꾀죄죄한 복색, 급기야는 덮어놓고 엉엉 울면서 아이쿠 아이쿠 소리만 내뱉는 품이 불쌍하여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죽이지는 맙세. 얼굴 알려져서 밀정 노릇 하지도 못할 것 아님메. 그냥 쫓아 버리기요.” 어쨌건 총 어깨에 맨 독립군의 한 마디는 마을 사람들을 누그러뜨렸고 나무꾼은 코가 땅에 닿는 절을 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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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독립군도 시들해지고 다들 제 살 길 찾아 가는 가운데 10년 뒤 일본은 만주를 아예 먹어치우고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할아버지는 간도 지역의 조선인 소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운동회가 열렸다. 조선인들이 다니던 학교라 영차 영차 소리도 요란하고 청군 만세 홍군 만세도 드높은 운동장에서 이리 저리 아이들을 살피던 할아버지에게 웬 까만 복색에 금술 단 일본 순사가 다가왔다.

 

웬 재수 없는 놈인가 하고 얼굴을 살피는데 갑자기 이 순사가 코가 닿을 정도로 성큼 다가서서는 한 마디를 찍 뿌렸다. “이보오 김.우.용.씨. 당신이 나를 한 번 살려 줬으니까 나도 당신 한 번 살려 주겠음. 내일 이 시간 전에 일도구(당시 지명)에서 떠나기요.” 아뿔싸 그때 나뭇꾼이었다. 그 자는 밀정이 맞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당신의 이름까지 또박또박 말하는 순사 앞에서 할아버지는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고 걸음마 걷는 딸과 갓난 아들과 영문 모르는 아내를 데리고 모든 것을 팽개친 채 두만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의 출생지는 함경북도 온성군의 남양이라는 고장이다.

 

수십 년 뒤 자식들이 당신의 독립 운동 이력을 나라에 신고하면 후손들에게 좋은 게 많으니 보훈 당국에 신고를 하자고 권유했을 때 크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 목사님이시긴 했지만 함경도 욕설을 상당히 잘 구사하셨던 할아버지는 나중에는 고래고래 험악한 호통으로 자식들을 물리치셨다고 했다. “내가 한 게 뭐이 있다고 무슨 상을 받고 훈장을 타니. 일없다. 참말로 훌륭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훈장? 포상? 썅 닥치라. 나는 한 거 아무것도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내가 이런 말을 한다. “국뽕 영화네. 그런데 저분들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돼. 뭐가 있어. 무기가 있어? 미래가 보여?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내고 또 싸우고 그 덕에 우리가 있는 거 아니야.”

 

공감했다. 영화는 실망스러웠지만 영화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상상만 해도 감동적이다. 실제로 독립군들의 전투 전과(戰果)가 꽤 과장돼 있는 면도 있다. 하지만 그 정도 과장은 세계 어느 나라도 한다. 또 한 번 하지만, 세계적 군사 강국에 맞서서 새까만 농사꾼들과 사냥꾼들이 그렇게라도 맞서 싸운 민족도 드물다.

 

“우리 힘으로 해방이 됐나? 일본이 미국에 져서 해방됐지.” 신념의 친일파, 즉 해방 뒤에도 자신의 친일에 대해 후회도 반성도 없이 자신이 옳았다고 믿었던 친일파 박중양의 일갈이다. 상당 부분 사실이다.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운 모습은 나라를 들어먹히는데 그 나라의 정규군이 나라 대 나라의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그냥 생으로 먹혔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일본과 맞장을 끝내 뜨지 못했고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을 ‘도둑같이’ 맞아야 했다.

 

그러나 미국이 할 일 없어서, 한국에 각별한 호의를 베풀어 독립을 시켜 준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카이로 회담 때 장개석이 어디 애인이 한국 사람이어서 한국의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라가 들어먹히던 순간부터 해방될 때까지 조선인들이 투쟁을 멈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물론 먹고 살 사람은 살았고 잘 풀린 사람들은 한 세상 누리다 갔지만,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생애를 던져 가며 자식 새끼 굶겨 죽여가며 독립 두 글자에 목숨 건 사람들은 정말로 많았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게 지천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는 그 사실을 처연하게 일깨운 것으로 만족하련다. 솔직히 영화는 별로였으나 그 안에 담긴 역사는 특별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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