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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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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전쟁(THE WAR)이라는 다큐를 보고 있었다. 2차 대전에 관한 내용이다. 몇 편 보았다고 캔 번스에서 만드는 전쟁 다큐의 얼개가 읽힌다. 거대한 서사인 전쟁을 특정 인물 몇몇의 관점에서 따라가며 시청자와 연결감을 갖게 한다. 주변인들의 인터뷰로 묘사되는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돌아와서 회한을 이야기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다만 시신들의 사진과 영상에 너무 익숙해져서 무감각해지는 느낌이 있다.

 

2차 대전에 정관사를 붙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그들이 참전한 첫 번째 세계대전이다. 베트남 전쟁을 볼 무렵 다큐멘터리 목록에서 장진호전투를 보고 다시 찾아보려 했는데 삭제되었다. 좀 아쉽다.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전과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국인들이 만든 한국전이야기는 어느 한쪽의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보는 나도 어느 한쪽 편에 감정이입을 막을 수 없다.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면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 사회조직의 발달이나 역사는 진화에서 거론하는 생명의 나뭇가지를 닮았다. 전쟁은 역사의 분기점이 되곤 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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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에서 추축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다. 아무래도 일본과의 전쟁에 할애된 부분에 더 눈길이 간다. 일본이 진주만에 기습폭격을 하면서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다. 미국에 이민 온 일본인들의 처지가 묘해진다. 정치인들은 수많은 사상자들을 보고 분노한 국민들의 감정을 외면할 수도 없다. 합당한 조치로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가둔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미국의 역사 다큐는 미국의 관점에서 미국인의 시각으로 미국인을 위해 만들어진다. 수용소에 갇힌 일본인들은 미국에 충성맹세를 하고 납작 엎드린다. 살아남은 이들은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혈통이 일본에서 기인했지만 정신이 이미 미국인임을 주장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미국인들의 희생이 커지자 흑인들을 징집한다. 권리와 의무의 관계는 동전의 다른 한쪽 면과 같다. 흑인들이 미국을 위해 피를 흘린 만큼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남자들이 총을 들고 전쟁터로 간 공장에서 여자들이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결국 수용소에 갇힌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도 참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이 흘린 피로 일본계 미국인들도 미국인으로 받아드려진다. 책과 영상은 차이가 있다. 사진과 영상으로 이미지를 받아드리는 것과 글로 받아드리는 것은 다르다. 받아들인 정보를 분석하는 최적의 속도도 개인차가 있다. 독서야 자신의 시간에 속도를 맞추면 되니 별일은 아니지만 영상은 다수에게 무난한 속도로 영상과 소리의 속도를 맞춘다. 그래서인지 영상을 보다 보면 생각하는 것과 텀이 생긴다. 중간에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책을 읽을 때와 달리 흐름을 놓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생각 없이 보는 오락영화와 달리 진도가 좀 안 나가는 것 같다.

 

미국인에게 자부심을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편집된 영상기록을 보면서 일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화면에서 나오지 않는 조선인의 입장이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이제 죽었지만 기억을 이은 사람들이 각자의 땅에서 살아간다. 미국인의 시각으로 본 기록에서는 당연히 누락되었다. 누락된 역사의 기록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증오심을 학습시킬 필요는 없지만 가르쳐야 할 역사다. 관련된 역사의 기록에서 불편할 누군가가 일부러 물길을 돌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사회의 요직에 참여하고 있다. 자신들의 근원이 블편한 기록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당연하다.

 

베트남과 필리핀에서의 일본군의 잔학성은 묘사되지만 조선에서의 일본군은 나오지 않는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미국과 대립하는 일본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부하들을 버리고 필리핀을 벗어난 멕아더와 남은 부하들의 운명이 갈린다. 수용소로 행군하는 미군포로들을 달리는 트럭에서 칼을 휘둘러 목을 베는 일본군의 잔학성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다, 그러니 미국인들에게 포로가 되면 산채로 잡아먹히리라고 생각한 민간인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집단으로 자살했다. 보급로가 끊긴 일본군이 포로를 잡아먹고 동족을 먹은 기록을 보면 그들의 두려움은 합리적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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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살던 사회는 오래전부터 전란의 시대를 살았다. 강자는 약자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갖는다. 단순히 재미나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기 위해 목을 벨 수도 있다. 새로 구한 칼의 날을 시험해보기 위한 이유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품성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항복한 포로를 사람으로 대할 수도 있다. 흔치 않은 사례지만 괜찮은 일본인도 있었다고 들었다. 적어도 미국인들 중 정치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 과거다. 그리고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국 사회에서 좀 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전범국이자 적국이었던 독일 이민자 후손인 트럼프가 성장기에 느꼈을 미묘한 곤혹스러움이 이해된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느꼈을 미묘한 적의와 차별을 트럼프도 받았을 것이다. 공개석상에서 2차 대전 시기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발언하는 것에는 개인적인 삶이 배경이 된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나라를 공개석상에서 비난하기는 좀 그렇고 피부색과 명백한 적국이자 악이었던 일본제국주의를 비난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미국인이라는 것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느껴진다.

 

일단 일본의 힘을 보여주고 나면 미국이 일본에게 유리한 협상에 응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것이 좀 등신 같지만 원래 전쟁은 병신 같은 것들이 자신에게만 낙관적인 결과가 주어질 거라고 믿고 벌이는 일이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이 점령하고 방어하는 태평양 섬들을 미국이 점령하며 본토로 다가가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섬들에 있는 비행장과 지하화한 요새들을 건설하는 것은 조선인 징용노무자들의 몫이다. 팔라우섬에 있는 한 다리를 원주민들은 아이고 다리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일본인과 일본인에 협조적인 조선인 군속들에게 맞아가며 다리를 건설하던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하던 말이 그들의 기억에 남아서 아이고 다리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단지 의학적 호기심충족이라는 명목으로 산사람의 배를 가르고 팔을 얼려 부숴버리던 족속들이 군사기지에 대한 지형적 기밀을 알고 있는 노무자들을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운 좋게 돌아온 분들도 있지만 집단학살의 기록이 참혹하다. 다시 말하지만 모성애의 한계를 알아본다는 명목으로 사람이 타죽도록 온도를 올린 방에 어미와 간난아이를 집어넣고 죽음 직전에 어미가 행하는 행동을 관찰기록 하던 집단이었다. 어미가 조금이라도 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방바닥의 열기를 자신이 감당하면서 죽어갈지 아이를 밟고 조금 더 삶을 추구할지가 궁금한 사회집단이 발전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진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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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은 조금 자랐다고 생각하지만 판단을 하는 기본재료인 정보는 적고 늦다. 불확실한 추측만으로 세상일을 재단하기도 그렇고 개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일정부분 기여한다는 마음도 있었다. 막상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했던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걸 문재인 정부를 보며 느꼈다. 솔직히 뽑아놓으면서도 미안하고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정부 9년 동안 기득권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도 나라를 아주 말아먹지는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5년이라는 시간, 차기 대선을 생각해 1년을 레임덕으로 생각하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문재인을 마뜩치 않아하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며 그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는데도 부족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묵인 방조 협조했던 이들이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들이 문재인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기회가 된다면 노무현에게 했던 일들을 그대로 재현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을 막는 일은 무척 버거울 것이다. 겨우 그 정도 판단력이었다. 그가 등용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서도 우려를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스스로의 판단력이 부끄러워진다. 섯불리 단정하고 판단하고 우려하는 일들을 주저한다.

 

일본이 예고 없이 진주만을 침공했던 것처럼 경제전쟁을 걸어왔다. 운 좋게 돌아왔던 징용노동자들이 배상 재판을 걸었다. 국가의 청구권은 박정희의 한일협정으로 소멸했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법관들이 법리를 합법적으로 왜곡하는 선에서 기득권의 편의를 보아주지만 명백하게 법리를 넘어서는 판결은 주저한다, 수치의 기록으로 남는 이름이 자신이 되는 것은 꺼리는 탓이다.

 

일본자금이 한국 경제 구석구석에 침투해 이익을 송출해가는 시점에서 반도체 핵심 자재의 수출을 금지했다. 뉴스를 접하고 당하는 사람에게는 급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진주만 습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했던 것처럼 일본 경제 관련 관료들의 의견을 취합해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공격을 했다. 관련 직종에 있는 사람들이나 정보를 취급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조가 보였을 것이다. 대비를 한 모습이 보여 흡족하다. 이재용과 문재인 대통령의 몇 번의 만남에서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이재용이 일본을 방문한 후 소득 없이 귀국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피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던 모습이 확신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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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해가는 과정에서 일본의 무력 침탈과 경제 침공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자신들 일족의 부귀와 영화만 보장된다면 민중들을 기꺼이 일본인들에게 내어 주었다. 사람에 따라 주가 되는 요인이 다르겠지만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조선을 망하게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10억 엔에 위안부 합의를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국민을 보는 시선이 구한말의 집권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계속 그들이 집권했으면 조금씩 얽메이고 잘려나가고 팔려나가서 그 전과 같은 역사를 반복했을 수도 있었다. 이자가 백프로라도 빌려주는 데가 있다는 걸 감사히 생각하라는 대통령과 사채이자의 상한선을 줄여가는 대통령이 추구하는 정치가 같을 수가 없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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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습적인 선공으로 경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지면 일본인들은 특유의 민족성대로 한국인들 대할 것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무슨 짓을 해도 용납이 되는 일베와 결을 같이하는 특유의 습성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대할 것이다. 일본이 시작한 경제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한다면 점령군으로 들어온 멕아더를 신의 반열에 올리고 극진히 영접한 것처럼 한국인을 대할 것이다. 그때 한국인이 일본인을 승리한 일본인이 한국인을 대하는 것처럼은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일종의 민족성이다. 한국인의 평등 지향은 약자를 존중하고 강자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 민족이라는 것이 허상에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감성은 이성과 다르게 작동한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피가 가까운 이들이 좋지 않은 역사적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은 이웃 국가에게 천대받지 않기를 바란다.

 

하필이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3.1운동이 근시안적으로 보면 피만 흘리고 실패한 민중운동이지만 조선 민중의 의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존경한다는 김구를 보자. 뭐 존경만 하지 그 삶을 따라 산다고는 안했다. 말로 존경하는 것이 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이해는 한다. 김구는 동학군이었다. 동학은 임금을 보위하고 외적을 물리친다는 기치를 들었다. 미천한 신분으로 사회적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 사상에 동조했으니 동학군으로 참전했을 것이다.

 

사회체제와 신분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를 토벌하려는 보수집단의 반작용도 있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진사도 토벌군으로 참가했다. 동학 잔당인 김구를 발견하고 처벌하지 않고 거둔다. 잘 가르쳐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파수꾼으로 길러낼 작정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살려준 은인의 가르침을 충실히 배우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구가 안중근의 시신을 찾아 고국에 안치하려던 마음 한 구석에 개인적인 인연도 많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 가르침에 깊게 감화된 그는 민비를 살해한 일본인들의 만행에 분노해 품속에 칼을 숨긴 일본인을 주막에서 때려죽인다. 밀정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시절 조선을 배회하던 일본인이 순수한 민간인은 아니라고 본다.

 

분노한 일본인들이 사형판결을 내렸다. 고종이 전화를 걸어 집행을 막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왕에게 갖고 있던 충성심을 비견하자면 종교적 신심일 것이다. 태생적 반골이 아닌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왕을 대하는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그 믿음이 3.1운동으로 깨어진다. 이름을 날리려던 민족지도자들은 민중을 버리고 일본 경찰에 자수했고 일본군의 충 칼 앞에 맨몸으로 만세를 부르다 죽어가는 백성들을 왕은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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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허울 좋은 제국이나 왕국이 아닌 민국이다. 특권을 누리던 왕과 귀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행사하지 않았기에 침략자에게 쏟아야 할 분노를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백성이 주인인 나라가 수립된다. 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들은 왕과 기득권들에 대한 마음을 버렸다.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 정통성 있는 왕정복고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 조선은 3.1운동을 외면할 때 백성들의 마음에서 지워졌다. 아직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아 있지만 백 년 전 그때와 같다. 민중과 숨결을 함께 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대통령이 문재인이라는 것이 참 다행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삶의 이력이나 여타지만 잘난 능력을 갖고 자신들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사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정적들이 흠결을 짚어내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인 나라에 살고 있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눈꼽 만큼의 기여가 있었다는 것은 자랑스럽다. 아베를 수장으로 둔 일본인들에 느끼는 상대적 우월감이다.

 

정당한 명분이 있는 싸움이 두려울 것이 없다. 손익을 계산하는 이들은 생각이 다르겠지만 일본과의 관계 정립을 새롭게 할 좋은 기회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이기는 것이 더 좋다. 일본이 중국의 징용노무자에게 배상한 액수와 비교해 보면 된다. 순간순간 생존에 급급해 수치라는 감정을 모르게 된 일본인들에게 사과와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본이 시작한 경제전쟁은 후세에 또 다른 역사의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승리의 순간을 지켜보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파카한일유압의 부당한 정리해고 이후, 대법원의 판결이 나기까지 1334일이 걸렸다.

세상에 큰 뉴스 많아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딴지 필진 범우는 이에 맞서 투쟁한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본인의 성격처럼 꾸준히, 그리고 묵묵하게.

 

그와 그의 가족에게 참으로 무거운 날들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재화를 생산하던 노예의 다른 이름이다.

근로자는 착한 노예. 노동자는 불순한 노예.

 

 

이 시대 노예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려고 때론 발버둥치고, 때론 포기하고,

때론 관조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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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일기(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