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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의 연속

 

R&D는 '시행착오'로 표현해도 될 만한 업무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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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이어 딴지일보의 '국민불판'을 이야기하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판이라면 고기를 구울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국민불판'의 시제품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고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80도에서 구워보고, 90도에서 구워보고, 100도에서, 150도에서, 200도에서, 400도에서도 구워봅니다. 이 때 굽는 고기의 부위와 중량, 지방 함량 등은 모두 동일해야 합니다.

 

고기를 굽고 난 뒤엔 각각의 고기를 연구원들이 조금씩 잘라서 먹어보고, 총수에게도 먹어보라고 합니다. 제일 맛있었던 곳에 스티커도 붙이게 합니다.

 

이번엔 온도는 똑같이 두고 고기의 품질을 바꿉니다. 지방함량 10%, 30%, 50%, 80%. 그 다음엔 소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등으로 고기의 종류를 바꿉니다. 또 스테이크로 굽고, 불고기로 굽고, 숯불처럼 굽고, 오븐처럼 굽는 등 방식을 바꿔 굽습니다. 

 

이처럼 조건을 바꿔가며 계속 굽는 작업이 시행착오(Trial & Error)업무입니다. 사람들은 “국민불판”이 총수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생각하지만, 제품이 나오기까지는 연구원들의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있지요. (시행착오 중 적용한 굽는 방식의 변화나 아이디어가 제품을 차별화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의 성격 급한 총수가 “시제품을 일주일 안에 만들어!”라고 지시했다면 어찌될까요? 최종적으로 확인을 해야 하는 Yoda는 직원들에게 '6일 안에 만들라'고 지시하고 연구원들은 그때부터 바빠집니다.

 

어느 시장에 가야 질 좋은 고기를 싸게 살 수 있는지, 시장에서 구입할 고기는 총 몇 개인지, 각각 지방함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알아가다 보면 실제 고기 구울 시간은 3일 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출근해서부터 야근하면서까지 고기 굽고, 타면 또 굽는 작업을 3일 밤새 해야 한다는 겁니다.

 

겨우 고기를 다 구웠더니 이번엔 성격 안 좋은 총수가 이렇게 말합니다. 

 

“프랑스에서 먹던 고기맛이 아니야! 다시 만들어!”

 

...이런 작업이 애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 연구소와 애플의 개발과정이 다르니 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분명 애플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무튼 극단적일지 현실적일지 모르는 이 사례가 연구소의 일반적인 업무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티브 잡스는 연구원들의 땀과 노력을 고스란히 자기의 창의적 결과물로 인식하게 만드는 혁신적인(?) 프리젠테이션을 한 사람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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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 업무와 동반되는 것이 '분석' 업무입니다. 분석이란 나온 결과와 조건들을 매칭하는 작업으로, 기업과 기술과 제품의 질을 결정하게 되죠. 매칭 작업이 고도로 숙련되어야만 상위 응용기술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기술'이 어느 창의적인 사람의 반짝이는(만화에서 볼 수 있는 머리 위에 백열등 켜지는 그런) 아이디어로 만들어진다는 건 경기도 오산입니다. 일반적인 산업 기술들은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한 (시행착오를 거친) 데이터에 기반해서 만들어집니다. 이게 연구소 업무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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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착오 같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업무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는 제품 개발의 원시자료가 됩니다. 원시자료는 개발과정, 출시 이후에 생기는 각종 문제들을 개선할 근거가 되기 때문에 잘 보관해야 합니다.

 

연구원들이 수행한 시행착오와 그 상황에서 발생한 결과 데이터, 분석 데이터 모두를 세밀하게 기술해서 사규처럼 지킬 수 있게 만든 것이 “개발 프로세스”입니다. 이 개발 프로세스를 웹이나 데이터전송장치(Digital Data System)로 만든 것이 제품 수명 주기 관리(PLM, Product Lifecycle Management) 시스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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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프로세스와 함께 이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PLM가 연구소가 갖추고 있어야 할 중요한 인프라이기 때문입니다. 연구원들을 밤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요. 

 

회사는 절대 헛된 곳에 돈을 지출하지 않습니다. 제품을 개발하는데 소요되는 모든 비용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예를 든 '국민불판'의 샘플을 만들 때에도 그렇습니다. 샘플을 하나 만들었는데, 혹여 최고결정권자에 의해 다시 샘플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왔다고 하죠.

 

이 때 아예 처음부터 다시해야 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디자인만 수정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제반규칙이 개발 프로세스에 녹아있습니다. 쓸데없는 불판 하나를 더 만들어서 생기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함이지요. 불판이야 얼마 안 한다고 쳐도 냉장고, TV, 자동차 본네트라면 어떨까요?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와 실수에 대해 빠르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만듭니다.

 

간단하게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현업종사자가 아니면 건드리지 못할 만큼 복잡합니다. 커다란 4개의 단계와 각 단계별 주요한 과업(task)가 있고, 해당 과업별로 세부적인 사항(activity)이 있습니다. 세부사항에는 누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어떤 산출물을 만들어야 하는 지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개별 산출물을 누가 검토하고 결정하고 하는 식의 거미줄 같은 결재라인들은 덤입니다. 대략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데 약 500여 가지의 세부사항과 120여 개의 과업이 존재합니다. 자동차라면 더 많겠지요. 

 

이 많은 단계를 거치는 걸 소위 '개발 과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500여 개의 세부사항을 하루에 하나씩 수행한다고 하면 물리적으로 500일이 필요하고, 결재하고 회의하는 시간을 약 20일 잡으면 520일 정도 소요됩니다. 주말 빼고 일하는 날 기준으로 제품 하나 만드는데 2년이 걸린다는 말인데, 어디 주변에 신제품 출시기간이 2년이나 되는 물건이 있던가요?

 

삼성 같은 기업들은 개발 기간을 줄이는 것이 비용과 시장 대응에 중요하다는 걸 일찍 파악하고 이런 부분을 정비해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개발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 세부적인 사항들을 최대한 압축하고, 실수를 줄이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만들어 놓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은 밤을 새고, 하루 종일 미팅하고, 1차 협력사를 쥐어짜고, 갑질을 하는 거죠.

 

해외에서는 효율적인 업무와 창의성 도입을 위해 개발 프로세스를 이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국내에서는 철저히 자본주의적 효율 증대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 80시간의 노동(2014년 여름에 제가 계산했던 업무시간입니다)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연구원의 삶은 덤이구요.

 

PLM 시스템으로 인해 연구원은 세부적인 사항을 제때 이걸 끝내지 못하면 인사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아야만 합니다. 연구소의 팀장이나 임원들은 일정 내에 개발을 끝낼 수 있게 연구원들을 닦달, 회유하는 거죠. 쳇바퀴처럼 일하게 하면서 '관리'라고 적는 상황이 지금의 연구소입니다. 

 

삼성의 반도체 소재의 대 한국 수출이 막히니까 어느 삼성 엔지니어가 그렇게 말했다더군요.

 

“좀 귀찮긴 하지만 2~3개월 내에 끝낼 수 있을 거 같다”

 

많은 시민들이 “역시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 같은 실무자는 좀 갑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발 프로세스와 PLS 시스템이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제품을 생산하고 개발하는데 있어 소재나 부품의 변경될 때 '변경점'이라고 통칭하는데, 반도체 개발 공정에 투입되는 소재가 변경되기 때문에 이 부분을 '변경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분명히 삼성의 개발 프로세스 내에 그 시점에 해야될 세부사항이 있을 거고, 이 사항에 따라 대체소재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파악합니다)

 

범국가적인 관심이 쏠려있는데, 재Dragon이 구속될지 말지가 언론의 관심사인데,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가 '대체소재가 문제가 있어서 기간이 더 많이 걸린다'고 말할까요? 삼성 반도체 사업부 담당 임원이 '대체소재의 가능 여부와 적용 여부, 성공 여부에 대해서 천천히 수행하라'고 할까요? 안 봐도 뻔한데 철저히 개발 프로세스에 따르되, 일정은 절반으로 줄이라고 이야기할 겁니다. 그래야 삼성에서 살아남고 재Dragon 구속을 막는데 조금이라도 언론의 도움을 받을 테니 말입니다. 

 

 

 

스타워즈 덕후, 농구 덕후, 애플 덕후.. 라고 생각만하고, 실제로는 잘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