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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욕타임스(링크)

 

첫 글은 지난 7월 8일 세상을 떠난 마이클 세이든버그(Michael Seidenberg)를 추모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세이든버그는 1970년대 말부터 맨해튼 이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비밀 서점이자 문학 살롱 '브레이즌헤드 북스(Brazenhead Books)'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이른 64세의 나이에 책 애호가들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애도 속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뉴욕 토박이인 그가 처음 브루클린에 열었던 중고서점은 벌이가 영 시원찮았던 모양입니다.  임차료 조차 내기에도 버거웠던 세이든버그는 결국 자신의 북 컬렉션(다수의 퍼스트 에디션과 저자 서명본 포함)을 수백 개의 박스에 나눠 들쳐 매고 맨해튼 아파트로 옮기게 됩니다.

 

이후 십 년 가까이 가판과 이벤트 판매를 전전하던 중 마침내 다시 서점을 열기로 결심합니다. 이곳 누추하고 좁아터진 이스트 84번가 아파트에서, 집주인도 모르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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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디언(링크)

 

투 베드룸 아파트에는 소설, 에세이, 시집 등 수 천 권에 달하는 세심한 컬렉션이 책장 이곳저곳 무심하게 꽂히고, 그것도 모자라 어깨높이의 책 무더기가 층층이 쌓여 갔습니다.  약간은 괴짜이자 자연인 포스가 느껴지는 주인장은 친구들과 함께 스카치위스키(그가 가장 사랑하던 'The Famous Grouse')를 홀짝이며 노만 러시의 단편집을 논했고, 때로는 한가로운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말주변 좋은 주인장과 그의 컬렉션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곳이 책 애호가들과 문학인들의 아지트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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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브레이즌헤드 북스 인스타그램

 

덕커 키노 팬츠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리고 올드패션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이 백발의 사나이는 흡사 아바나에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헤밍웨이 노년의 모습을 연상시켰습니다. 일부는 그의 컬렉션에, 일부는 재치 넘친 입담에, 또는 뭔지 모를 서점의 분위기(무료 제공되는 주류)에 매료되어 몰려들려 들기 시작했고, 호기심 어린 일반 방문객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생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Slow Bookseller'라고 소개한 세이든버그는 "내가 소장한 책들과 나는 수많은 사연을 나누고 있지요"라고 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컬렉션에 대한 고객의 감동과 열정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계산대에 책을 올려놓곤 했습니다.

 

이 비밀의 서점이자 북살롱이 유명해지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결국  2015년, 비밀영업을 눈치챈 집주인이 아파트를 비워줄 것으로 요구했고, 이어진 퇴거 조치 소송에서 세이든버그는 패소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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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뉴욕타임스

 

2015년 10월 어느 날, 퇴거 집행을 앞두고 열린 고별 파티에는 세이든버그를 사랑하고, 그의 컬렉션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책 애호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문학 평론가, 언론들이 모여 브레이즌헤드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세이든버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네 책방은 결국 생존에 실패했습니다. 이 도시에 그것을 위한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우리는 전투에서 패배한 루저가 되고 말았네요. 그래도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뭐라도 조금 더 해보고 싶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퇴거 후 일 년쯤 지나 세이든버그는 인근 아파트 공간을 빌려 조용히 브레이즌헤드를 다시 열었고, 숨지기 전까지 그 속에서 자신의 컬렉션과 함께 먹고, 마시고, 놀고, 얘기하고, 사색했다고 합니다.

 

뉴욕과 멀어진 탓에 새로 오픈한 브레이즌헤드에는 미처 가 보지 못해서, 제가 기억하는 브레이즌헤드는 과거 거기까지입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란스러운 관광객과 이곳을 '바(Bar)'로 여기는 애주가들이 몰리는 바람에 이후 예약제로만 운영됐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브레이즌헤드 북스 웹사이트에 들어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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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브레이즌헤드 홈페이지

 

 

"브레이즌헤드 북스… 시간이 멈추는 작은 가게"

 

그리고 홈페이지 소개글 위에 붉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더군요.

 

"We're sorry to say – Brazenhead is indefinitely closed."

(브레이즌헤드가 무기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해 죄송합니다.)

 

브레이즌헤드도 주인장 세이든버그와 함께 영면에 들어갈 건가 봅니다.

 

누군가가 이 주인 잃은 책들과 새로운 사연을 쌓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패배한 전투에서조차 뭐라도 좀 더 해 보려는 제2의 세이든버그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부 주

 

위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진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바,

톡자투고 및 자유게시판(그 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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