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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부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그곳에 이르니, 러시아 고관과 군인들이 많이 나와 이토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찻집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나는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 

 

‘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

 

하며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오니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용솟음치고 3천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 일이 이같이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이같이 천지를 횡행하고 다니는데 어질고 약한 우리 민족은 왜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울분을 참으며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니,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사람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있었다.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그를 향해 4발을 쏜 다음, 생각해보니 그 자가 정말 이토인지 의심이 났다. 나는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다시 뒤쪽을 보니 일본인 무리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가는 자를 향해 다시 3발을 이어 쏘았다. 만일 무관한 사람을 쏘았다면 일을 어찌하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이 나를 체포하니 그때가 1909년 10월 26일(음력 9월 13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헌병대로 붙잡혀갔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옥중자서전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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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900 사격재현을 위해 수많은 자료를 확인했다. 주변 상황을 다 배제하고 오로지 사격과 ‘표적제거’에 한정해서 나온 결론은 세 가지였다. 

 

첫째, 죽음을 각오한 경우엔 표적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더 많아지고, 확실해진다.

둘째, 이토 히로부미라는 ‘캐릭터’가 있어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 

셋째, 안중근 의사는 명사수다.

 

'죽음을 각오한'이라는 표현 때문에 자살공격을 떠올릴 수도 있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퇴로’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다음 탈출하려고 했다면 M1900으로는 사살이 어려웠을 것이다. 살아서 돌아간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면, 원거리 저격 혹은 시한폭탄과 같은 '실행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원거리 저격에 한정한다면 경호하는 쪽에서도 저격 예상 포인트를 확인하고 이쪽에 병력을 배치하거나 예방책을 강구할 것이기에 사격 포인트는 한정된다. (대통령 행사 때 주변의 높은 건물에 괜히 저격병을 배치하는 게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기에 이토 히로부미 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실제 사격 거리는 7.25미터라는데, 팔 길이 등을 감안한다면 7미터 정도라고 볼 수 있다. 

 

M1900에 들어가는 7.65미리 탄, 그러니까 32ACP탄은 위력이 강한 군용탄이라기 보다는 호신용 권총탄이다(위력이 약한 대신 반동이 적어서 한 손 사격을 해도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이 32ACP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려면 상당히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4발을 발사했다. 이중 3발이 이토의 몸에 박혔다. 

 

범용한 사람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퇴로를 찾아 도망칠 생각을 했을텐데 안중근 의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인원 3명에게도 각각 1발씩 발사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의 총격에 죽지만, 수행원 3명은 천수를 다 누렸다)

 

처음부터 퇴로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거사였다. 만약 M1900을 들고 ‘생환’을 전제로 한 작전을 펼쳤다면 '맞으면 맞고, 아니면 말고'식으로 허공에 난사하는 형태로 몇 발 쏘고 끝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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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캐릭터도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토는 오늘날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정치’를 했던 인물이다.

 

하얼빈에서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이 결정됐을 때 러시아 쪽에서 경호문제를 두고 협의를 했다. 자신들 관할에서의 회담이었기에 러시아도 상당히 공을 들였다. 이토도 그렇지만, 코코프체프 또한 러시아의 재무장관이었다. 러시아 정치권에서 소위 말하는 ‘실세’로 불렸다. 러시아는 자국 장관을 생각해서라도 경호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최소한의 경호만을 말했다. 자신을 보러 온 일본인을 고려했던 거다. 과시욕이었다. 덕분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사까지 무사히 접근할 수 있었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와 동지는 하얼빈 일대를 다 구역을 나눠서 각자 담당구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오면 사살할 것을 약속했다. 이 때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채가구 역을 지나 하얼빈 역에 도착했고(우덕순 의사의 담당 채가구(蔡家溝) 역은 검문이 철저했고, 우덕순 의사는 체포되었다), 하얼빈 역을 담당했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만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일을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하니 그대는 여기 머물러 기회를 기다려 행동하고, 나는 오늘 하얼빈으로 돌아가 두 곳에서 일을 치르면 더욱 확실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일을 성공하지 못하면 내가 성공할 것이요.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대가 성공해야 할 것이다. 두 곳에서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시 활동비를 마련해 다음에 거사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일 것이다.”

-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옥중자서전 中 발췌

 

만약 열차가 채가구 역에 섰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는 우덕순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이토 히로부미의 과시욕 덕분에 안중근 의사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기회를 만든 건 과시욕일지 몰라도 안중근 의사가 사격 솜씨가 없었다면 거사는 성공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단순히 '안중근 의사가 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쏴죽였다'고만 알고 있다. 그러나 사격장면을 확인하면 안중근 의사의 사격 솜씨가 보통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암살’이란 개념으로 접근했을 때 사수는 표적의 표면적이 가장 많은 정면 혹은 배면을 노린다. 표적의 크기도 크기지만, 장기를 바로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맞춘 3발의 탄환 중 1탄과 2탄은 오른쪽 상박, 즉, 어깻죽지에 박혔다(오른쪽 상박 위에 1탄, 그 아래에 2탄이 박혔다. 이 탄들이 팔을 뚫고 들어가 몸통에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 역에 도열해있던 각국 대사, 일본 관료, 청나라 군대, 러시아 의장대 등을 사열했다. 보통 일직선('→'자)의 형태로 이동하는 게 정상인데, 이토는 특이하게 역사 끝까지 가서 유턴(⊃'자)했다(시속 2km 정도로 추정된다). 완보라고 해야 할까? 각국 대사와 악수를 하고, 일본 관료들을 격려하고, 일본 환영 인파에게 손을 흔들고...

 

안중근 의사의 키는 163cm, 이토 히로부미는 156cm.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와 평행하게 걸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인파와 군인들의 장벽이 있었다. 이토가 러시아 의장대와 헌병대의 사열을 받을 때였다. 러시아 의장대 사이의 틈(부대간의 간격. 오와 열을 맞출 때의 틈으로 추정된다)으로 빠져나간 안중근 의사가 이토에게 총격을 가한다. 

 

하얼빈 역에 있는 표지석을 보면 비스듬하게 방향이 잡혀있다. 연구자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안중근 의사의 몸이 12시 방향이라면, 팔은 2시 방향으로 뻗어서 총격을 가했습니다. 7발을 다 발사한 다음의 팔은 3시에 가까운 방향으로 추정됩니다.”

 

이토를 평행하게 쫓아가다 틈을 발견한 후 사격지점 확인. 멈춰선 다음, 왼쪽 양복주머니에서 M1900을 뽑아들고, 표적확인, 조준. 

 

이때까지 이토 히로부미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이동했을 거다. 그래서 팔 방향으로 정면이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2시 방향으로 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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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들과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린 총 사격시간은,

 

'6초'

 

찰나와도 같은 짧은 순간, 하얼빈 하늘에 7발의 총성이 울렸고, 역사는 바뀌었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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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입니다. 2020년 3월 공개 예정입니다. 펀딩 목표 금액 1천만원으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하얼빈 의거 장면을 촬영하려 합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펀딩(링크) 

 

안중근 의사의 사격장면 재현을 위한 물적 토대는 크게 3가지로, M1900 권총과 32ACP 탄, 그리고 발리스틱 젤라틴입니다. 총은 미국 총기 옥션에서 낙찰받아 현재 배송 프로세스를 밟는 중입니다. 펀딩은 32ACP 탄과 당시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십자가 흠집’이 있는 탄의 위력 실험을 위한 발리스틱 젤라틴 구매 비용, 그리고 촬영에 들어갈 기자재 대여와 인건비로 사용 예정입니다.

 

총기 사격 실험에 고속촬영 장비와 인력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아울러 고속촬영을 위한 조명 세팅에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110년 전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어떤 악조건 속에서 의거에 성공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는지를 실물 총을 가지고 실험할 예정입니다.

 

현재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국내 재현 사격을 추진중이며, 만약 국내사격이 여건상 어렵다면 미국 현지에 섭외한 사격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