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6

 

사격시간 6초. 그 앞에서 우리는 고민했다. 고민의 대목은 크게  가지였다.

 

- 6초라는 시간 동안 경호인력은  하고 있었던 걸까?

- 6초라는 시간 동안 7발을 발사해 4명의 사람에게 6발을 명중시켰다.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99C37E3E5BD250E730.jpeg

 

 명의 전문가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경찰특공대 지원자와 특수부대 지원자에게 사격 훈련을 시켜주는 사격선수 출신의 사격 전문가, 모처에서 VIP 경호를 맡았던(외곽 경호지만) 인물, 그리고 안중근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역사 전문가였다.

 

 

사격 전문가 (안중근 의사의 의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인터뷰)

 

“6? 6 동안 7발을 쏘게 내버려뒀다고?”

 

그럼 지금이라면 어떻게 ?”

 

초탄까지는... 아니, 백보 양보해서  번째 탄까지는 양보해도, 나머지 다섯 발이 나갔다는  명백한 경호 실수지.”

 

어째서?”

 

총소리가 나자마자 VIP 덮쳐야지.”

 

(이때부터 안중근 의사의 의거란  말하고,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 . 전문적인 경호 훈련을 받지 않았다면 몸으로 덮친다는  생각하기 어렵지. 어깨에 모신나강 소총메고 있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기 보다는  말대로 의장병이야. 이런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을 거야.”

 

 

경호원 출신(안중근 의사의 의거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인터뷰)

 

기본적으로 차 이후의 탄이 나갔다는  사수를 제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수를 제압했다면 이후 발사는 제지됐고, 더 이상 피해는 없었을 겁니다.”

 

“실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경호대상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죠. 그리고 사수를 제압해야죠. 그래야 재탄, 삼탄이  나가게   있죠.”

 

 

안중근 연구자

 

안중근 의사가 6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을   있었던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로 확인할  있다.”

 

첫째, 일본  경호 인력이 없었다.  때문에 급작스런 상황에서 대응을 못했다.

 

둘째, 러시아  병력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경호의 축소를 원했고, 러시아 의장대는 ‘부동자세’로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사열을 시작하는 상황이라 의장대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타이밍에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성공시켰. 그리고 러시아 측에서는 자신들의 VIP 코코프체프를 먼저 챙기는  순서였다.

 

셋째, 소음도 생각해봐야 한다.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라는 내용이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나온다이토를 환영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환영인파가 내는 소리, 군악대의 연주 등이 뒤섞여 있어서 상황파악이 힘들었을 거다.

 

35316_70122_5326.jpg

 

이렇게 '6 동안 안중근 의사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사격을   있었던 이유'를 확인할  있었다.

 

 

다음 문제는 6초라는 사격시간이다. 6 동안 4명에게 7발을 발사해 6발을 명중시켰다. 1초당 1발이라면 어렵지만 불가능한  아니다. 다만 여기에 제약조건이 붙는다. 

 

표적이 시속 2km 걷고 있고, 사수도 똑같은 속도로 걷는다.

 

시야가 제한됐다. 도열했던 사람들에 의한 ‘인의 장막이다. 특히 러시아 의장대에 이르렀을 때에는 시야가  제한됐다. 하얼빈엔 얇은 서리 같은 눈이 내린 상태였고, 러시아 병사들은 두꺼운 코트와 우샨카(방한모) 쓰고 있었다. 사수의 키는 163cm고, 러시아 병사들 건너편에 있었던 표적의 키는 156cm였다.

 

사수는 10 23일부터 의거를 준비했다. 3 전에 하얼빈  1 플랫폼을 동쪽에서 바라보는  고작이었다.

 

사수는 표적의 얼굴을 몰랐다. 표적을 특정할  없다는  상당한 핸디캡이다. 어찌어찌 사격타이밍을 잡았다 하더라도 목표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사수는 필연적으로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판단할 시간이 필요한 거다(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에 분노한 원태우 열사의 돌팔매질에 부상을 입는다.  때문에 자신의 사진이 퍼지는  극히 꺼렸고,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른  의거에 뛰어들었)

 

표적의 정면이나 배면이 아닌, 측면만이 사수에게 노출되어있다.

 

190d4e57fa9641ff161254f4ac969b14.jpg

 

제약조건을 대입해서 사격의 순간을 정리하면,

 

① 사격 지점 확보  1 정지 : 목표물을 확인하고 판단하는 시간

 

표적의 오른쪽 상박에 2 명중, 관통의 반동으로 표적의 몸이 사수의 정면으로 돌아설  표적의 윗배를 향해 3발째 명중 ( 4 발사)

 

1 표적 제거  2 정지 : 1 사격 직후, 1 표적이 아닐 경우를 대비 2 표적 탐색

 

표적 2, 3, 4 향해 각기 1발씩 발사, 명중.

 

의거에 걸린 시간은 6초지만, 2번의 표적 탐색으로 최소 2~4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가정 하에서 실제 사격 시간은 2~4 사이란 소리가 된다.

 

모든 조건들을 사격 전문가에게 제시했을 때의 반응은 간단했다.

 

굉장히 어려운 사격조건이다.”

 

 정도인가?”

 

그렇다.”

 

 총이 안중근 의사 총인가?”

 

“!”

 

여기서 새로운 조건이 하나  추가 된다. 바로 ‘이다.

 

기록들을 살펴봐도 총의 출처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지원해줬던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자금 지원 등에 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거나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누구에게 뺏었다등으로 표현했다)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의하면,

 

“...이때 동지 우덕순을 만나 계책을 비밀히 약속한 다음 각기 권총을 휴대하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생각하니...”

 

라고만 나와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권총은 ‘누군가 조달해줬다고 판단한다. 우덕순과 각기 M1900  자루씩과 탄창 2개씩을 나눠 가졌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지원을 생각할  있다.

 

가장 유력한 인물은 거부 최재형(崔在亨)이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기 위해 우덕순과 안중근의 동행을 주선했고, 유동하와 조도선으로 하여금 통역으로 합류하도록 했다.

 

최재형은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구한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러시아로 넘어가 정착한다. 태어나길 노비의 아들이었지만, 군수업으로  부를 쌓는다.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고 5개의 훈장까지 받는(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 해군 소위로 임관 통역관으로 활약한다). 부와 명예를 얻은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게 된다.

 

그림2.jpg

 

연해주 독립운동의 아버지

 

이 말이 괜히 나온  아니다. 그는 의병들에게 군량과 군자금, 무기를 제공했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총기 제공자로는 최재형이 가장 유력하지만, 이석산, 윤능효, 이강 선생 등이 지원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급하게 지원받은 총으로 거사를 치른다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가급적이면 손에 익은 총으로 사격을 하는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있지 않을까?

 

원래 안중근 의사는 총을  쏘는 것으로 유명했다. 집안에 포군(砲軍) 있어서 사냥을 따라가고, 총을 쏘고, 직접 사냥을 했었다. 김구 선생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는데, 안중근을 '  쏘는 청년'이라 말했다.

 

이미 안중근은 사격 솜씨는 근동에 정평이  있었다. 그런 그가 1908 지린(吉林) 훈춘(琿春)시의  시골 마을에서    사격 훈련을 했다고 한다.  집의 소유주는 안중근 의사의 친척인 안동렬씨였고, 그가 머무르면서 사격했던 기간은 1908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이었다.

 

만약 이때 사용했던 권총이 M1900이었다면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

 

안중근 의사가 총을  쐈다는 .”

3개월  집중적으로 사격을 연습했다는 .”

 

이라는 거다. 최소한 사수가 총을 처음 쏴보거나, 사격의 베테랑이란  확인   있다

 

여러 가지 제약조건을 넘어 표적을 사살   있었던 건 실력이었다.

 

안중근은 준비돼 있었다.

 

 

 


 

 

필자 주

 

 

a1d785103dd5e880ffced28ac9d7093c.jpg

 

2018년 4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입니다. 2020년 3월 공개 예정입니다. 펀딩 목표 금액 1천만원으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하얼빈 의거 장면을 촬영하려 합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펀딩(링크) 

 

안중근 의사의 사격장면 재현을 위한 물적 토대는 크게 3가지로, M1900 권총과 32ACP 탄, 그리고 발리스틱 젤라틴입니다. 총은 미국 총기 옥션에서 낙찰받아 현재 배송 프로세스를 밟는 중입니다. 펀딩은 32ACP 탄과 당시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십자가 흠집’이 있는 탄의 위력 실험을 위한 발리스틱 젤라틴 구매 비용, 그리고 촬영에 들어갈 기자재 대여와 인건비로 사용 예정입니다.

 

총기 사격 실험에 고속촬영 장비와 인력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아울러 고속촬영을 위한 조명 세팅에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110년 전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어떤 악조건 속에서 의거에 성공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는지를 실물 총을 가지고 실험할 예정입니다.

 

현재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국내 재현 사격을 추진중이며, 만약 국내사격이 여건상 어렵다면 미국 현지에 섭외한 사격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