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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이저 속의 마이너리거 

2. 종합직과 일반직 그리고 화초에서 잡초로

3. 직장의 일그러진 엘리트들

4. 크게 나쁜 일은 혼자서 못한다, 크게 좋은 일처럼

5. 상처뿐인 승리

6. 리더의 자세와 사내 불륜이 미치는 영향

7. 20년 다닌 직장을 관뒀다

8. 퇴사 후 느끼는 것들

9. 나쁘기만 하거나, 좋기만 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10. 퇴사 후, 트라우마 - 불행을 나누면 약점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질투가 되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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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극심한 우울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나마 여럿이 하는 팟캐스트는 약속을 깰 수 없어, 마지못해 했고 대부분의 일은 고의적으로 하지 않았다. 일종의 대인기피다.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전부 만나기 싫었다. 오래 다닌 회사를 돌연 그만둔 걸 남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고, 내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올여름은 방구석에 들어앉아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상급자가 시키는대로 공무원 앞에서 거짓 증언 하고 온 날, 그날 그곳에서 봤던 다른 무고하고 선한 사람의 간절한 얼굴. 그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 2주 정도 이러고 있었다. 지금 그때 기분을 느끼는 건, 상황은 다르지만 '이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라는, 같은 맥락의 무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

이 와중에 고용보험 신청을 하러 갔다. 원칙적으로 난 고용보험 수급대상자가 아니다. ' 권고사직' 형태로 퇴사를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사정을 전해 들은 담당 공무원은 퇴사 경위서를 써서, 심사를 한 번 넣어보자 했다. 그렇게 심사가 끝나면 실업급여 수급대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눈물이 났다. 그러자 공무원은 책상 위 휴지를 두어 장 뽑아주시며 "요즘 같은 세상, 이렇게 마음 약해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마음 단단히 먹어요." 라고 했다.

 

며칠 뒤 퇴사 경위서를 써서 찾아가자, 공무원은 그 글을 한 번에 끝까지 읽지 못하고 여러 번 " 세상에", "어떻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반복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류심사는 통과했고, 이달부터 나는 실업급여를 수급하게 되었다.

 

가뭄에 단비였다.

 

3.

돈도 돈이지만, 일단 이 시간 동안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앞서 밝혔다시피 나는 학창시절 삼풍사고(저는 삼풍백화점 생존자입니다1-12<링크>)를 겪었고, 사고 이전의 일들로도 이미, 망가질 데로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살고 있다. 덕분에 살아오는 내내 수없이 많은 밤, 내가 나를 괴롭혔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며 살아왔다. 증세가 심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길 가다 주저앉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가급적 그때 일은 잊고 살자 하는데 이게 맘처럼 쉽지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전처럼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거다. 꾸준히 받은 정신과 치료 덕분이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이 병은 내가 아는 한 완치가 없다. 해서 요즘은 심각하게 정신과 폐쇄병동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있다. 또다시 그 지옥 같은 날들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히 힘들면 달려가 누울 거다. 

 

4. 

말이 나온 김에 내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 얘기하자면 내 병 중 주된 증상은 불안 장애다. 내게는 여러 성격장애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아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유년시절 정서적 신체적 학대가 이 병의 근원이리라, 전에 나는 이 병을 이기지 못해 말 그대로 미친년처럼 살았다. 한 겨울 대낮에 잠옷을 입고 아파트 옥상 문을 열고 다니기도 했고, 술을 마시다 컵을 깨 유리조각으로 혈관이 지나가는 자리를 찾아 찢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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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심정은 뭐라 해야할까, 가슴에서 곧 풍선이 터질 것 같아 그걸 그냥 내 손으로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다행히 요즘은 많이 나아졌고, 술도 맥주 한 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

 

내가 이러고 사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 당연하다. 완벽하게 속여왔으니까. 날이 밝으면 나는 상처에 메디폼을 붙이고, 손목에 손목 보호대를 하고 구겨진 영혼은 벗어 방안 깊숙이 처박아 놓고 남들이 다 좋아할 것만 같은 밝고 환한 영혼으로 갈아입고 밖에 나가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20년간 사람들과 부대껴가며 살아도 눈치챈 사람이 없으니 대충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짐작들 올 게다.

 

물론 당신도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5.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성격 좋다고, 인상 좋다고. ... ... 웃지말자! 뻥 아니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도 그랬다. 삼풍 사고 생존자의 글을 받고 싶어 불렀는데 폭발적으로 명랑해서 되려 이상했다고. 물론 그러고 집에 오면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후우. 이러니 내가 아픈 걸 주변 사람은 잘 모른다(그렇다.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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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나누면 절반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게 아니다. 보통, 불행을 나누면 약점이 되고 행복을 나누면 질투가 된다. 내겐 세상이 그랬다. 어려서도 용기 내어 누추한 집으로 친구를 초대하면, 그 친구는 다음날 온 학교에 우리 집에서 얻어먹은 맛있는 떡볶이 대신 내 방의 더러운 인형 얘기를 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겠지만 나 또한 여태 살면서 믿고 보여준 선의들이 참 많이도 짓밟혔다. 지난해 내가 병에 대해 세상에 말하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제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니 괜찮겠지, 하는 착각도 한몫 단단히 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약점을 공격포인트로 삼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아프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은 여태 살면서 했던 행동 중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해 사고가 터졌을 때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그냥 퇴사할 걸 그랬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다. 내가 오래 아팠다는 소식이 사내에 퍼지자, 익명의 게시판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 매일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뭐야 정신병자였어?"

 

"약쟁이라며?"

 

딴지일보가 아닌 다른 곳에서 글을 썼다면 이런 반응을 받았을지 모른다. 

 

"뭐야 정신병자였어?"

 

"약쟁이라며?"

 

6. 

최근에 병세가 다시 좋지 않아, 어딜 가든 혼자 지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생각이 많아지니 자꾸 열패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 싸움이 생각나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졌으니까, 결국 그 싸움에서 링 위로 흰 수건을 던진 건 나니까, 들것에 실려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초주검이 되어 나온 건 나니까.

 

그러자 자꾸 나를 쫓아낸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다. 눈엣가시 빠지는 기분이 어떤 걸까, 요즘은 두 다리 쭉 뻗고 자겠구나. 아니 전부터 잘 잤겠지 하며 계속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기는 게 선이고 지는 게 불의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내가 졌으니 틀렸다. 나빴다. 그 생각을 하자 내 신세가 허탈해져 더욱더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사이 퇴사했다는 소식이 수많은 YB, OB 모임에 전해진 모양이다. 오래도록 연락 없던 사람들이 전화를 해 안부를 물어왔다. 대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들의 단순한 호기심을 채워줄 마음의 여유가 내겐 없다.

 

살면서 오랜 기간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애썼고, 어지간하면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항상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상황들을 전부 꺼내어 재구성하며 되짚어보고, 사람이 나쁜 게 아니라 상황이 나빴던 거다, 마음을 다 잡았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고. 그들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거라고. 수없이 많은 밤낮을 달랬다. 그렇게 힘들게 나는 세상과 화해하며 살았다.

 

한데, 지난 일 년간 내가 겪은 직장 내 갈등, 행동은 어떻게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보수 기득권같았다 할까? 적어도 내게 있어 그들은 김기춘이고 우병우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혐오하게 만들고, 필요하면 희생물을 마련해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내부 결속을 다지는 사람들. 

 

지나친 비유 아니냐고?  천만에. 대기업에서 20년쯤 있으면 본질적으로 회사나 정치판의 구조가 매우 비슷하단 걸 안다. 단,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이번이 처음이라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외부에서 유능한 인재가 회사에 영입되어도 노무현 정권 때  경검이 그랬던 것 처럼, 재임 기간 동안 아무것도 협조하지 않아, 사람 하나를 순식간에 바보로 만든다. 그중 누군가, 바른 목소리를 내면 협박하고 겁준다. 이 조직에서 누가 더 오래갈 거 같으냐고, 말 들으라고, 그렇게 철저하게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7. 

전에 나는 같은 내용의 기술 회의를 두 번 한 적 있다. 앞에는 진짜 정보가 오고 가는 진짜 회의, 뒤에는 외부 인사가 배석해서 그에게 주는 가짜 정보가 도배된 회의. 회의 장소를 일부러 실수인 척, 틀리게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물으니 설비가 보고한 기간 안에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시간을 벌려 그랬단다. 이 와중에도 몇몇 양심 있는 사람들이 소신대로 원칙 지켜가며 산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은 얼마 못 가 부러진다. 아무리 강해도 다수의 견제를 어떻게 버티나. 다구리에 장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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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왜 그럴까. 결국 돈이다. 그런 세상이니 개 돼지들이나 여물통에 주둥이 쳐 박는 순서 따지고, 도덕 챙기는 거다. 이들의 술상에 애저녁에 사라진 게 '정의'다. 

 

대기업에서 한 자리 잘 차지하고 있다가 투자 하나 제대로 해, 뒤로 크게 한탕 해 먹고 나가려 한다. 어찌 됐든, 대기업이라는 곳에선 꽤 큰 금액의 투자가 종종 일어나니 돈의 맛을 볼 기회가 그만큼 많다. 해서 이들은 자기들이 거사를 치르기 전까지만 회사가 '현상 유지' 되면 된다. 

 

자, 이쯤 되면 다들 대단히 상식적인 의문이 들 거다. 이 조직엔 장님과 벙이리만 있는가, 하는. 아니, 내가 보니, 작정하고 속이고 작정하고 시스템을 꼬아 놓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내가 몸담았던 곳도 해마다 천문학적 돈을 써 내부감사, 외부감사를 했다. 조직문화를 개선하려 하고 청와대국민청원 게시판 같은 것도 운영하여 내부고발을 독려했으며 윤리경영 캠페인도 지속적으로 했다. 아마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일 게다.

 

이 모든 건 역부족이었다. 진짜 명분을 가리기 위한 가짜 명분만 보았을 뿐이다. 사람을 속이기로 작정한 이들이 마음을 먹으면 그 재능이 얼마나 무섭게 빛나는지 똑똑히 보았을 뿐이다.  

 

8. 

퇴사 후, 나는 이런 생각들로 침대와 붙어 종일 떨어지지 못하다 얼마 전, 마음을 다잡고 운동화를 신고 집 앞에 있는 야트막한 산에 올랐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하필 비가왔다. 하지만 그냥 갔다.

 

등산길 초입에서 오가며 마주친 사람들이 우산도 쓰지 않고 걷는 나를 보고 자꾸 되돌아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숨을 쉴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산 중턱에 올라 한참을 벤치에 앉아 안개가 자욱한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신기하게도 팔팔 끓어넘치던 마음이 한숨 누그러졌다. 불현듯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머나, 세상에나. 결국 내가 이 꼴을 하려고 그 모진 세월 감내하고 살았는가, 하고 말이다. 그제야 다시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이렇게는 안 될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 내게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다. 

 

9. 

퇴사는 세상의 무수한 입발린 소리들처럼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나는 그런 약을 팔면서 돈을 벌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번에 20년 직장을 나와봐서 더 잘 안다. 힘들고 괴롭고 생존을 위협하는 일들이 순식간에 몰려온다.

 

해도, 언제나처럼 우리는 방법을 찾을 거다. 나는 어떤 방법을 찾을지 기대해 주시길. 

 

그리고 모든 퇴사자들이여, 포스가 함께 하길.    

 

 

 


 

 

필자 주

 

http://www.podbbang.com/ch/1770326

 

안녕하세요산만언니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 불행에 대해  다르게 고민했고우연히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말로   있는  글로  하지 못해 <삼풍 생존자가 말합니다>라는 지난 연재글의 연장 선상에서 팟캐스트를 시작했습니다주변에 독특한 캐릭터성을 가진 친구들을 섭외해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한 패널들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다보니내용에 대한 전문성도 떨어지고,  밝은(?) 목소리 탓에 더러 ' 본의' 오해 받곤 하지만이를 통해 성장하고 싶고전에 제가 글을 올리며 독자분들께 받았던 진심어린 위로와 감동에 보답하고자 기획한 팟캐스트니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봐 주세요나름의 감동과 재미가 있습니다!

 

질문있으시면 molaseo99@gmail.com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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