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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 정부의 조급함을 엿볼  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넘어간 상황에서 1909 11 13.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이 끝난 9  예심(予審) 받는다.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재판절차는 빠르게 진행됐다.

 

( 당시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일본에게  상당히 예민한 문제였다. 한국과 일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물론,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이라고 밝힌 15개의 죄목은 한국 일본 언론뿐 아니라 해외 언론에 특필 정도였다. 안중근은 재판장을 일본의 침략야욕에 대한 성토장으로 만들었고, 일본 정부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재판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관동지법 1 재판정에서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는데, 방청객이 1천여 명이나 몰리는 바람에 추첨으로 300명만 골라 2 관동고법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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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하얼빈 의거 연루자는 8명이었는데, 조도선(曹道先), 우덕순(徳淳), 유동하(劉東夏)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불기소 처분 시켰다. 그리고 재판은 시작됐다. 주목할 것은  당시 일본 검찰 측의 재판전략이었다.  당시 미조부치(溝淵孝雄) 검사는,

 

안중근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

 

라는 시나리오로 안중근을 심문했다. 안중근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으로 몰아가려는 전략이. 정치적 이유가 부각되는 게 싫었던 거다.  재판의 핵심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는가. 어떤 이유가 나오느냐에 따라 재판의 성격이 결정되고, 이후 일본 정부의 정책방향에도 영향을 끼칠  있었.

 

미조부치는 끈질기게 안중근 의사의 역사관, 항일활동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안중근의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개인적 동기에 의한 ‘살인으로 바꾸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이토의 죄상 15가지와 동양평화론, 그리고 스스로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를 척살했다는 논리였다(이토의 죄상 15가지를  글자도 틀리지 않고, 논리정연하게 말할  있었다는 , 그것도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재판장에서 말했다는  안중근 의사의 담력을 확인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놀라운 부분은, 미조부치가 안중근의 의견에 수긍한다는 대목이다. 공판이 진행되면서, 안중근의 인물됨과 논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일본 검찰의 ‘개인의 원한에 의한 살인이란 시나리오를 밀어붙이고 있을  안중근 의사의 변호인들은 재판 자체의 성격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전략을 내놨다.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군은 안중근의 사진 5장을 가지고 엽서를 만들었다. 이걸 가지고 모금에 나섰던 거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들어간 엽서는 불티나게 팔렸고, 당시 돈으로 1만엔의 성금이 모였다.  돈으로 영국인 변호사 더글라스를 고용하지만, 미나베(真鍋) 재판장이 영국인 변호사 선임을 각하(却下)시켰다. 대신 2명의 일본인 관선변호사를 붙여줬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 관선변호사도 일본이 법치국가란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다.”

 

라고 지레짐작할  같은데, 카마타 쇼지(鎌田正治) 미즈노 키치타로(水野吉太郎)  변호사는 나름의 활약을 한다(변호인으로서 최소한의 몫은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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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카마타 쇼지의 변론 방향인데,

 

안중근은 한국 사람이다. 이곳은 청나라 땅이다. 청나라에서 한국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다. 한청통상조약(清通商条約) 의해 치외법권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한국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  법정에서 일본제국 형법으로 재판을 한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물론,  주장은 일본 판사에 의해 거부됐다. 안중근 의사 역시도  논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안중근은 재판을 받고 싶어 했다. 이미 생과 사의 문제를 초월했기에 남은  일본의 죄상을 알리는 거였고, 법정투쟁을 하는  목표였다.

 

(안중근은 법정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사형을 각오한 상태였다. 1 재판이 끝난  5 안에 항소할  있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도, 추가적으로  의견을 말하려면 항소하지 않으면  되는 거냐고 되물을 정도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카마타 쇼지가 재판 자체를 부정했다면, 미즈노 키치타로(水野吉太郎) 안중근을 ‘의사(義士)’ 규정해 ‘형량싸움으로 몰고 가려 했다.  부분을 눈여겨봐야 하는데,

 

이번 사건은 사쿠라다몬(櫻田門) 밖의 사변에 비교할  있다.”

 

일본 근대사를 공부한 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흑선이 등장한 이후 일본은 요동친다. 이때 에도막부의 대로(大老)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노중(老中, 국가정사를 통솔하는 직책, 대로보단 낮은 등급)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 등이 '덴노'의 윤허를 받지 않았음에도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하고, 14 쇼군 후계자로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 밀어붙이게 된다. 이런 정책에 반발한 반대파들을 탄압한 사건이 안세이 대옥(安政の大獄)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 말하거나 이에모치의 경쟁자였던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 : 훗날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된다) 밀었던 정치적 반대파들을 척결했다.  숫자는 대략 100여명이 넘어갔다.

 

이에 반발한 과격파들이 대로였던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 암살한 사건이 바로 사쿠라다몬 밖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일본 역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인데, 에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었고, 이로 인해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격화됐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는 토대가  주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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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키치타로는 하얼빈 의거를 사쿠라다몬 사건과 비교하면서, 안중근은 의사임을 강조했다. 그리곤, 3 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각본이 짜여져 있던 재판은 안중근의 사형으로 귀결됐고, 의례적으로 신속하게 형을 집행했다(보통 사형 판결이   최소한 2~3개월의 유예기간을 주고 형을 집행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미즈노 키치타로가 주장했던 것처럼  사건이 사쿠라다몬 사건처럼  여파가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안중근 의사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사형 판결 직후에 있었던 조치들로 확인할  있다.

 

물리력을 행사해 안중근을 감옥에서 빼내려는 시도가 있을  있다. 간수를 증원하고, 감옥의 순회경비를 강화하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형을 집행하라!”

 

사형판결 직후 간수가 증원됐고, 뤼순 감옥에 대한 경비가 강화됐다. 안중근이 독립운동의 상징이  것이 두려웠던 거다.

 

1910 2 19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한다. 형이 확정된 거다.

 

 사이 안중근은 자신의 옥중 자서전을 탈고하고(3 15일이다),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하지만, 일본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인 기일(26) 절명한 시간에 맞춰 사형이 집행됐다.

 

1910 3 26 9 4분에 안중근 의사는 교수대에 올라갔다. 마지막 기도를 끝낸  15  안중근 의사는 절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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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자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으레 문명한 시대로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잘난이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없이, 각자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며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함께 태평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선진 사회의 선진국 인물들은 생각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랴.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정상의 일들이 발생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의 이치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어려움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한방으로 늙은 도적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벌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 1909 11 6 일본 관헌에게    발췌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목숨으로 세상에 경종을 울렸다. 일본의 침략 야욕 앞에서 동양 평화를 위해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우려 했던 거다. 안중근 의사의 영향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것이다. 다만, 강조하고 싶은  가지는 있다.

 

 당시 일본은 안중근이란 존재를 두려워했다.”

 

그의 재판, 수감 당시의 상황, 이례적으로 빠른 사형 선고와 집행을 보면 일본은 안중근이란  남자에 대한 상당한 두려움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죽음을 각오한 거사. 죽음을 예감하고 재판장을 자신의 정치투쟁의 장으로 활용한 모습은 장부(丈夫) 모습  자체였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워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분개히   가면은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토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를  헤아렸스리요 사세가 고연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만세여,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여,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丈夫歌)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당시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뤼순을 관할하던 곳은 관동도독부(関東都督府)였다.  당시 관동도독부 도독(都督) 자리에 앉아 있었던 인물이 바로 오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였다. 직간접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재판에 관여했던  인물의 후손은 훗날 한국에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민다.

 

 후손의 이름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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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입니다. 2020년 3월 공개 예정입니다. 펀딩 목표 금액 1천만원으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하얼빈 의거 장면을 촬영하려 합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펀딩(링크) 

 

안중근 의사의 사격장면 재현을 위한 물적 토대는 크게 3가지로, M1900 권총과 32ACP 탄, 그리고 발리스틱 젤라틴입니다. 총은 미국 총기 옥션에서 낙찰받아 현재 배송 프로세스를 밟는 중입니다. 펀딩은 32ACP 탄과 당시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십자가 흠집’이 있는 탄의 위력 실험을 위한 발리스틱 젤라틴 구매 비용, 그리고 촬영에 들어갈 기자재 대여와 인건비로 사용 예정입니다.

 

총기 사격 실험에 고속촬영 장비와 인력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아울러 고속촬영을 위한 조명 세팅에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110년 전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어떤 악조건 속에서 의거에 성공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는지를 실물 총을 가지고 실험할 예정입니다.

 

현재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국내 재현 사격을 추진중이며, 만약 국내사격이 여건상 어렵다면 미국 현지에 섭외한 사격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