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초동. 도착은 오후 4시. 혼자라 심심했기에 일대를 어슬렁거렸다. 행사는 6시였는데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 있다.
지방에서 단체로 온 분들의 깃발도 많이 보인다. 서초역 사거리는 금세 들어찼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검찰개혁 언론개혁' 피켓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그랬다. 민주주의는 장미 대선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서초 사거리에서 우연히 딴게이 분들을 뵀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니 "얼굴 안 나오게 찍어달라" 고 주문하셨다. 옆에 계시던 분이 "야, 아무도 네 얼굴 안 찍어"라고 했고, 그 결에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저 삼풍백화점 생존자 연재한 딴지 필진입니다, 라고 커밍아웃 하려다 행여 '그게 누구...' 라는 답변이 들려올까 두려운 마음(관종인 나로서는 누가 몰라보면 정말 두렵다)에 돌아서 나와 터미널 쪽으로 향했다.
서초 사거리를 지나 법원에서 고속 터미널까지는 박사모 등의 우익 단체가 점령하고 있다. 평소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던 터라, 적진으로 향했다. 때마침 군복으로 무장한 어버이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곧 반역자가 돼서 감방에 갈 텐데, 것도 모르고 다들 좋단다"
그렇다. 그들에겐 '반역'이다. 그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은 내란을 도모해 박근혜 정권을 끌어내린 반정부 세력이다. 내 기억에 합법적인 절차를 걸쳐 탄핵하고,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을 뽑았는데, 이 무슨 참신한 사고방식인가. 홍준표가 당선됐으면 반역이 아니었을까.
...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선글라스 너머로 감지된 그들의 분노 에네르기는 그 속에 함께 있으면 조금 쫄린다.
우리 공화당, 어쩌구하는 막사를 지나가는데 또 말들이 귀에 들어온다.
"저짝에 있는 촛불들 일당이 십오만 원이라더라고, 전 세계 빨갱이들이 뒷돈을 댄다니, 그걸 어떻게 감당해"
두뇌를 풀가동해 현재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를 떠올려 본다. 한국은 전 세계 빨갱이들의 메카였다.
무대에 선 진행자가 마이크를 잡고 멘트한다.
"본래 나라에서 어떤 행사를 하면, 행사가 크든 작든 본 식에 앞서 애국가를 제창하고 호국보훈의 영령들을 위해 묵념을 하는 게 원칙입니다. 한데 저 빨갱이들을 보십시오. 저것들은 그런 것도 안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니 저희는 애국가 먼저 제창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순간 나는 카메라를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이들이 전부 윈터솔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것도 아니라면 이들의 시계는 1979년 10월 26일에 멈춰있는 걸까.
성모병원 앞에는 이런 것도 있다. 보수의 아이돌은 다르다. 나도 한 장 쓰고 싶다 생각이 들어 뭐라고 쓸까, 고민하다 "지난번에 힐링캠프에서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고 하셨는데, 히나도 안 바쁘셨잖아요 그런 말 왜 했어요?" 라고 쓰려는데... ... 관계자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뭐여? 촛불이여?"
, 라고 외친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아차차, 내 손에는 서초동에서 받아 온 양초가 떡하니 들려 있었다. 군중 속에서 당당하게 그래, "내가 촛불이다", 라고 외치며 숨은 관종끼를 드러내고 싶었지만, 내가 키도 크고 기골이 장대해서 엉, 17:1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여자지만, 엉, 절대 쫄은 건 아니고,엉, 갑자기 마이클 잭슨이 생각나서, 엉, 조오오온나 빠르게 백스텝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쫄아서 그런 거 아니다. 내가 행여 다치기라도 하면 딴지에선 병원비를 내야할 테고 안 그래도 서버비, 원고료 후달릴 딴지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그렇다.
도로 한복판으로 반포대교를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가두시위대가 나타난다. 진행자는 연신 "청년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다들 간격 유지하세요" 라고 한다. 서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다들 정말, '애쓴다'.
그리고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튿날, 조카의 생일이라 함께 경복궁 나들이를 갔다. 조카와 조카 친구에게는 한복을 입혀 경복궁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호젓하게 적선동 스타벅스에 가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책을 꺼냈다.
대림미술관이 가까운 곳이라 전부터 자주 가는 곳이었다. 광화문과 다르게 늘 한가했다. 한데 이날은 근처에서 보수단체 시위가 있었는지 문전성시다. 덕분에 나는 내게 주어질 뻔 한 두어 시간의 고요를 빼앗겼지만 그 대가로 옆자리에 계신 중년 여성들의 대화를 통해 뜻밖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시작은 전교조야, 전교조가 애들을 세뇌했지, 머리가 굳은 어른들은 세뇌가 안 되지만 애들은 선생이 가르쳐 주는 대로 믿잖아, 그러니 젊은애들이 전부 빨갱이가 돼버린 거야. 이러다 큰 일 나는 거지. 지금이 딱 중국 문화혁명하고 똑같잖아. 모택동이 어린애들 선동해서 홍위병 만든 거랑 문재인이 젊은 애들 촛불로 모은 거랑 똑같잖아. 결국 피바람이 불 거야. 그러니 우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일천한 삶의 경험에 미루어 볼 때, 한국에선, 진실이 승리하는 경우가 제법 존재한다. 놀랍게도 엘리트나 지식인,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다만 아쉽게도, 그렇게 되기 전까진 제법 스펙타클한 광경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조국 장관과 그 일가족은 검찰은 물론, 나경원, 장제원, 김성태 의원에게 장관 자격과 가족 비리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마나 훌륭한 자녀를 두고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리 당당히 비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이 대목에서 노덕술이 김원봉의 따귀를 때린 이야기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참, 스펙타클하다.
그간 우리는 고장난 저울을 가지고 살았다. 이 저울은 잘 맞을 때도 있다. 힘 없는 사람에게는 정확한 저울이고 힘 있는 사람 만나면 왠지 고장나는 저울이다.
사회는 우째우째 굴러 돌아갔다. 헌데 그냥 굴러 돌아간다고 계속 써야 하나. 우마차가 좋다고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세상에 주구장창 우마차만 타고 다닐 수 없듯, 286 컴퓨터가 잘 돌아간다고 계속 286 컴퓨터 쓸 수 없듯, 세상이 바뀌면 저울도 고쳐 쓰든지 새로 사야지.
나는 고장난 저울 고치러 내일도 집회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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