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 영화 <조커>의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서와 자연적 계열, 그의 뇌질환에 대하여

 

제가 이전에 봤던 한 환자분은 멈출 수 없는 웃음 때문에 병원을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터져 나와서 몇 분간 지속됐는데, 이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워 상당한 우울감을 경험하셨었죠. 사실 의학에서는 아직도 이에 대해 명료한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치료도 어려운 편이죠.

 

의학에서는 과거 이를 “거짓숨뇌감정(pseudobulbar affect)”, “감정동요(emotional lability)”, “감정실금(emotional incontinence)”, “불수의적 감정표현장애(involuntary emotional expressiondisorder)” 등으로 불렀지만 최근에는 병적웃음과 울음(pathologic laughing and crying, PLC)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유튜브에 'Pseudobulbar affect'라고 쳐보시면 이런 것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부위의 뇌 손상이 이런 현상을 야기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사실 없습니다. 아서는 어린 시절의 학대에 의해 뇌손상을 당하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멈출 수 없는 웃음에 시달리게 합니다.

 

81c42e7cb2d346ae84e6b3db9c9487b61565003441498.jpg

 

앞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오리지널 코믹스에서는 사실 배트맨의 실수로 조커가 화학약품에 빠지면서 그칠 수 없는 웃음의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1799년에 험프리 데이비라는 화학자가 웃음 가스(나중에 일산화질소로 밝혀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이후로 사람들은 화학약품이라는 것이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어쩌면 조커의 탄생설화의 배경에도 이런 옛날 사람들의 관심과 두려움이 반영된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이런 공포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요즘은 모든 걸 뇌로 설명하고 싶어 하고, 뇌의 질환만큼 사람의 정신과 감정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 뇌질환이라는 자연적 계열은 아서의 발달심리학적 계열과 중첩되면서 그의 분열을 더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서는 그의 신체 조건상,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분열시키고, 진짜 자기 감정을 뒤로 억압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죠.

 

 

아서와 사회적 계열,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대하여

 

아서, 그리고 고담시의 시민들에게 부와 가난이란 삶과 죽음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아서는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당장 오늘 돈을 벌지 않으면 내일의 삶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서의 노트에 적혀있던 "I hope my death makes more cents(sens와 동음) than my life(내 죽음이 내 삶보다 더 의미 있기를(더 벌이가 되기를))"라는 조크는 '삶의 의미'와 '동전 몇 닢'이 교환 가능한 등식 관계에 있다는 것을 폭로함과 동시에 삶 속에서 노동이 벌어들이는 쥐꼬리만 한 급여를 기대하느니 사망보험이나 장기매매 같은 죽음을 기대하겠다는 조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조크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자본가와 자본 자체에 대한 노동자의 강력한 분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2011년 9월 17일, 30여명의 사람들이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뉴욕 한복판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부를 챙기는 월가의 경영자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죠. 신자유주의는 미국 사회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99%의 이익은 소수의 자본가에게로만 쏠리게 되면서, 이는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후 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고 사람들은 극 중 광대 가면을 쓴 시위대처럼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채 월가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서는 어떠한 정치적 이익이나 노선과 상관없이, 단순히 자신의 박탈감에서 야기된 분노로 3명의 화이트 칼라를 살해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서 개인의 계열이죠. 그런데 이 계열이 사회의 계열과 마주치게 되면서 아서의 도발은 일종의 기폭제로 작용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상영되던 <모던 타임즈>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요, 여기서 떠돌이 채플린은 우연히 어떤 트럭에서 빨간 깃발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 차를 향해 소리치며 붉은 깃발을 휘두릅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뒤에 공산주의 시위대들이 몰려 붙기 시작하죠. 굉장한 코미디이자 아이러니인데, 아서의 삶도 비슷한 궤적을 밟게 됩니다.

 

maxresdefault-1.jpg

 

이처럼 아서의 행위는 사회의 계열 자체에 영향을 주지만, 반대로 사회의 계열이 아서의 개인적 계열에 역으로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던 중 처음으로 아서가 진실된 미소를 짓는다고 느꼈던 부분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의 살인 이후 집으로 돌아온 아서는 (망상 속에서) 소피(재지 비츠)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요, 길거리에 나가자 여기 저기 그의 '활극'을 칭송하는 신문기사가 나돌고 광대 가면을 쓴 시민들이 활보합니다. 자신을 똑같이 모방하고 따라 해주는 존재만큼 자신의 존재를 공감해주는 일이 있을까요.

 

우리는 아서의 조커가 광기를 표출하는 이면에서 살인에 대한 짜릿함만을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 동기를 추정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서의 진짜 짜릿함은 바로 이런 공감에 있었을 겁니다.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직장 동료도, 심지어 그를 상담해주던 상담가도 제공해주지 못했던 공감을, 이제는 사회가, 시민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는 필요에 의해 그를 이용하고, 아서는 그런 사회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과대 자기에 대한 공감과 미러링을 받아냅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왔어. 하지만 이제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어"는 정확히 과거에 박탈되었던 어머니의 공감적 시선이 이제서야 사회라는 계열을 거쳐 그에게 제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커와 나르시시즘

 

저는 현재 자기애성 성격이라는 관점에서 배트맨을 분석한 논문을 준비 중인데요, 두 인물의 특성을 관찰하다 보면 상당히 겹치는 데가 많습니다. 배트맨 또한 어린 시절 부모를 상실한 뒤 다양한 이상화 대상(알프레드, 고든 청장, 그리고 <배트맨 비긴즈>의 라즈알굴)들을 추구하면서 부자 도련님이라는 가짜 가면 속에서 강력하고 전능하며 과시적인 배트맨으로서의 환상을 실현하고자 하니까요.

 

흔히들 배트맨과 조커를 거울상으로 다루곤 합니다만, 이는 단순히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만들어냈기 때문(팀 버튼)이라거나, 서로가 법에 대해 상반된 두 개의 짝 개념을 대변하기 때문(크리스토퍼 놀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애적 구조의 두 가지 다른 표현으로써 거울을 구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마스 웨인이 티비에 나와 "비겁하게 가면 뒤에 숨어 진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겁쟁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이 문장은 그의 가짜 아들(아서)을 지칭하면서 동시에 진짜 아들(브루스)를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batman_and_joker_twin_face_by_gomez69-d384ndf.jpg

 

우리는 극 중에서 아서의 엄마인 페니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코헛이 지적했듯이 자기애적인 양육자는 아이에게 공감의 대상이 되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아이를 자신의 공감 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부모의 태도에 맞추어 거짓 자기를 발달시키게 되고, 이것은 그들을 자기애적으로 손상된 상태에 묶어두죠. 이러한 유전적이고도 양육적인 측면과, 생물학적이고도 사회적인 계열은 하나로 만나면서 아서를 정확히 '자기애성 성격'이라는 구조로 향하게 합니다.

 

아서는 분열된 자기 안에서 참된 자기가 억압된 채 우울하고 공허한 삶을 사는 가운데, 미성숙한 과대 환상을 품고 살아갑니다. 열등한 자기 자신에 대해 용납할 수 없는 수치감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는 자신이 최고의 능력자이고 다만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최고의 코미디언, 1등 학생, 유명한 연예인, 국가 영웅 같은 것들은 자기애적인 환자들에게서 단골로 나오는 테마들입니다.

 

<조커>의 개봉을 두고 미국 사회에서 모방범죄에 대한 우려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오로라 총기 난사 사건' 피해자 가족 모임을 이끄는 샌디 필립스 등은 '조커'의 제작사인 워너브라더스에 편지를 보내 "폭력 장면이 불필요하게 많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일각에서는 악당을 미화하는 측면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조커> 말고도 이런 영화들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이 영화는 이토록 논란이 되고 있는 걸까요. 제가 글의 서두에서 밝힌 것 같은 '꿈틀함'에 그 이유가 어느 정도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좌절당하고 억압당한 개인이 그 족쇄를 풀어헤치는 장면들에서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영웅의 초라하고 어설픈 탄생 설화만큼 사람들의 심금을 움직이는 것도 없죠. 어쩌면 <조커>의 공명지점도 그런 곳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서진 경찰차 위에서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두 팔을 벌려 웃음 지어 보이는 아서의 모습 안에서 우리 안의 위축되고 공감받지 못한 자기가, 과대적인 환상을 억압해왔던 자기가 꿈틀거리며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5fb5b20e46b84414979b0f023a694bd1156808215922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