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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본이 낳은 괴물이지만 돈은 없었다. 카드값 상환일을 다가오고 있는데...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뭘 할 줄 알더라. 고민 끝에 떠오른 건 BL(Boys Love)적 사고방식과 일본 BL만화책 보려고 키운 일본어 실력이었다. 전자는 없는 것만 못하지만 후자는 콧구멍 만큼 쓸모가 있어보였다. 

 

이 시국에 일본어라니 싶겠지만, 자본 앞에서 국적을 버리겠다는 게 아니다. 그저 자본이 낳은 괴물이 여기 있다 생각하면 되겠다.

 

 

키보드 두드렸을 뿐인데 워렌버핏

 

일본어 번역봇을 하기로 한다. 당연히 프로 번역가가 해야 하는 일감 말고(나 같은 나부랭이가 전문 번역을 할 수 있을 리가 음슴이다) 초벌번역이나 라이트노벨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번역알바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 수준있고 책임있는 번역이 필요한 경우라면 번역 전문 업체에 의뢰하지 이런 사이트에서 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이트에는 전문적인 일보다는 간단한 일감만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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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레이아웃이 대학 시절 만든 ppt 만큼이나 글씨만 오지게 많고 정신은 없지만 돈에 대한 간절함 앞에선 사소한 건 왠지 신경 쓰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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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를 구한다는 글이 제법 있었다. '간단한' 일 부터 '제품상세페이지' 같이 듣기만 해도 번역하기 힘들어서 벌써 파파고 썼을 법 한 일감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의 글이 제목에도 말머리에도 원하는 언어를 명시해두지 않은 게 수상하긴 했지만, 수상하다고 멈출 사람이 아니란 건 미리 알고 있어야 했다. 되레 일본어 번역은 당연하고 간단한 거라면 영어(못함)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솓구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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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 하지 않으면 글을 볼 수 없다는 말에 자신감이 조금 하락할 뻔 했지만 재빠른 회원가입이라는 것으로 모면했다. 다른 이가 채가기 전에 로그인까지 마치고 다시 글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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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를 기다린 건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낳는 현장이었다. 결제를 하지 않으면 글을 보지 못한다는 것으로, 정보 게재도 열람도 돈을 내야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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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요금은 1만 원에서 10만 원까지 다양했다. 앞으로 마지막 '100년'이라는 터무니 없는 기간이 눈에 밟혔지만, 이미 지갑은 열린 뒤였다. 부모님에게 길거리음식이 먹고 싶다, 로또를 사고 싶다 거짓말을 해가며 모은 돈이 조금 있었기 때문이었다. 15일 정도면 일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15일 정액권(14800원)을 끊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다(이미 14800원 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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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보낸 다음 안내문에 쓰여진 대로 입금완료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 '사이트명/입급일자/입금액/입금자명'을 적으라고 하던데, 굳이 '사이트명'을 적으라는 부분이 조금 수상했지만, 아니, 대놓고 수상했지만 돈을 보냈으니 메일도 보냈다.

 

빨리빨리의 민족이라도 몇 분 안에 일처리가 될 리는 없었다. 하루이틀 걸리는 건 예상했지만, 문제는 이틀사흘이 지나고 15일이 되어도 등업(?)될 기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중간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사이트와 연결된 블로그에 들어가보았다(사이트 운영자의 블로그). 블로그에도 '무통장 입금'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댓글이 4개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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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이 무려 2018년 7월이었다.

 

이렇게 14800원이 영면하셨다. 세간에선 이런 걸 '창조경제' 혹은 '먹버(먹고 버린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글을 두드려보겠어요

 

남은 건 팬픽과 BL(Boys Love)소설을 포X타입에 연재하게 만들었던 BL적 사고방식, 즉 적당한 구라를 담보로 한 창작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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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와 트럼프로 아내의 유혹 미국판도 만들 수 있는 창작력은 의외로 쓸만 한 곳이 있었다. 블로그 포스팅을 하는 부업이 있었다. '방문은커녕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지만 다녀온 척' 블로그 포스팅을 쓰면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검찰도 밑장 빼는 마당에 일개 시민이 블로그 포스팅을 가장한 소설 정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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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오픈카톡방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픈카톡방에 들어가있으면, 아침마다 직원이 오늘의 일을 알려준다('프로젝트'=일). 

 

일에는 블로그 포스팅(=블로그 소개글)과 원고작성,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블로그 포스팅은 말 그대로 어디에 다녀온 것처럼 포스팅하는 것이고, 원고작성은 '다녀온 척'하는 글을 어~엄청 길게 쓰는 것이다(1천 자에서 1만 자까지). 블로그 포스팅은 개당 1천 원이고, 원고 작성은 글자 수에 따라 각각 3천 원(3천 자), 5천 원(5천 자), 1만 원(1만 자)이다. 

 

오픈카톡방에 들어와있는 사람들이 '나 오늘 (포스팅 혹은 원고작성) 몇 개 할 수 있다' '몇 개 하고 싶다' 양을 알려준다. 두 가지 일을 다 해도 되고 개수 제한도 없다. 다만 어떤 일을 하는 지는 직원이 정해준다.

 

'챙타쿠 블로그 포스팅 2개'

'챙타쿠 원고작성 1개'

 

챙타쿠가 오늘 이 정도 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담당자가 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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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오픈카톡방으로 준다. '벙커원_2천자_챙타쿠.zip'와 같은 제목으로 압축파일이 오면 내 이름이 쓰여있는 파일만 받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나는 마사지샵 원고 작성(5000자)과 음식집 포스팅 2개를 받았다. 

 

압축파일의 압축을 풀면 가게의 사진과 정보, 지시사항이 담긴 파일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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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지샵 5천 자 원고를 써야 하는 나는 사진 약 20개와 상호, 주소, 전화번호가 들어간 메모장 파일을 받았다. 키워드는 원고에 꼭 들어가야 하는 단어다.

 

이제 남은 건 사진과 정보를 이용해 5천 자, 그것도 공백'제외' 5천 자 원고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팬픽 한 편도 길어야 5천 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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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자도 못 썼던 오후 12시 12분

 

'어디를 다녀왔는데 너무 좋았어요'라는 내용으론 겨우 2천 자나 넘는다. 반 이상이나 남은 글자수를 채우기 위해선 소설을 써야했다. 육하원칙이란 건 괜히 있는 게 아닌지 '누구랑' '왜' '어떻게' 등의 상황설정을 붙이니 글자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해서 남편이 있다는 설정을 붙였다. 여차하면 없는 남편 얘기로 글자를 때우려고 그랬다. 

 

'남편과 함께 너무 예쁘다고 호들갑을 떨다간'

'저도 남편이랑 2인실을 썼어요.'

'매일 같이 보는 남편 자는 얼굴을 여기서도 실컷 보는 불상사는 있었지만'

 

처음 생각한 (가짜)남편은 평면적인 인물이었지만 선전과 선동이 난무함에 따라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왠지 집에 이런 남편이 밥상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남편과 마사지샵을 다녀왔는데 허벌나게 좋았습니다. 다음엔 친정어머니랑도 가려고요'라는 대서사시를 완성한 다음에도 어딘가 잔상처럼 (가짜)남편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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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썼을 땐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키만 빼고 나 닮은 아이도 하나 만들까 했지만 말았다. 부부는 밖에 나와있는데 아이 혼자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죄의식이 생겨서 차마 그럴 수가 없는 탓이었다(이입이 과한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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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포스팅에는 시댁도 등장

 

대서사시를 완성한 뒤 다시 예의 오픈카톡방에 들어갔다. 완성품을 보내주기 위함이었다.

 

업체 쪽에서 나의 소설원고를 확인하더니 알겠다면서 무슨 사이트 주소를 줬다. 개인정보 작성 폼(form)으로 연결되는 주소였는데, 이름, 주민번호, 주소, 핸드폰번호, 계좌번호를 적으라고 했다(세금처리 때문인 것 같다). 여기에 정보를 입력하면 얼마 뒤에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받을 돈은 7천원이었다. 블로그 포스팅 2개(1천 원X2)와 원고작성 5천 자 1개(5000원), 노동시간은 3시간 남짓. 최저시급이 8350원인 2019년에 3시간 넘게 일해서 7천 원 벌었다. (+신상정보 제공)

 

그 사실은 나로 하여금 깡맥주를 들이키게 했다. 는 한 캔 밖에 못 마셨다. 일을 카페에서 했기 때문에 커피 값 5천 원을 빼면 한 캔 이상 먹으면 7천 원보다 마이너스라 그랬다.

 

 

점점 잔고가 0을 넘어 마이너스로 수렴해가는 가운데, 인터넷의 익명성과 편리성에 기대어 돈을 벌어보려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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