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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 이야기를 했는데 어느새 베르사유 조약이 파기된 이야기로 빠지는 것 같다. 그래도 국제정치학적으로 한 번쯤 살펴볼 만한 이야기이니 잘 따라와주길 바란다. (마지노선 이야기 하다 괜히 흥이 났다. 후회된다)



독일에 대한 압박의 연속


독일과 소련이 손을 잡고 서유럽 세계에 한 방 먹인 라팔로 조약 이후 프랑스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독일을 지켜봤다.


“독일이 언제 다시 전쟁을 일으킬지 모른다.”


영국은 프랑스의 강박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겪었던 악몽 같은 기억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던 프랑스에게는 가볍게 보아 넘길 성질이 아니었다. 이는 프랑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는데, 벨기에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공유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 이탈리아, 벨기에를 끌어들였다.


“다시 한 번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구속력 있는 압박을 가하자.”


압박이라기보다는 베르사유 조약을 다시 한 번 상기 시키는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에 의해 맺어진 게 바로 ‘로카르노 조약(Pact of Locarno)’이다.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1925년 10월 16일 체결된 이 조약은 한 마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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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르노 조약의 주역들.

(왼쪽부터) 구스타프 슈트레제만(독일) , 오스틴 체임벌린(영국), 아리스티드 브리앙(프랑스)


독일을 믿지 못해서 다시 한 번 베르사유 조약을 상기시키는 조약


이다. 몇 가지 의제가 거론됐지만, 핵심은 두 가지였다.


첫째,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결정된 독일 서부 국경지역의 현상유지와 불가침. 라인란트 지역의 영구 비무장화.
둘째, 독일, 프랑스, 벨기에의 상호불가침과 분쟁의 평화적 처리


프랑스는 불안했다. 독일이 다시 부활한다면 프랑스를 침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확보한 알자스 로렌지방과 서부 접경지역의 국경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라인란트 지역을 영구히 비무장화 시켜 독일이 아예 전쟁을 생각지도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라인란트 지역에 독일군이 진주한다는 건 그 자체로 프랑스와 벨기에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다. 말 그대로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라인란트 지방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안해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독일, 벨기에가 서로 침략하지 않는 불가침 조약까지 체결했다. 당시 프랑스와 벨기에는 순망치한의 관계였기에 결국 프랑스-벨기에 VS 독일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벨기에는 독일이 부상하면서 중립을 포기하고 프랑스에 붙었다). 의미 있는 것은 이 상호불가침 조약의 보증인으로 영국과 이탈리아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보기엔 일방적으로 독일에게 불리해 보이지만, 외교란 언제나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는 것이다(베르사유 조약 같은 경우에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강화’조약이라 일방적이었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 발효 직후인 1926년, 국제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허울뿐인 국제연맹이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그림자를 지우고 독일이 국제사회에 복귀했다는(정확히 말하자면 서유럽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독일의 뛰어난 외교 감각이다.


로카르노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한 독일을 동쪽에 있는 소련이 서운해 할 수도 있었다. 독일로서는 국제사회로의 복귀지만, 소련으로서는 ‘겨우 만든 친구가 떠나는 모양새’였다. 아직까지 소련이 필요했던 독일에겐 소련을 안심시켜야 할 숙제가 남아있었다.


그런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되고 5개월도 안 된 1926년 4월, 소련과 ‘독-소 중립조약’을 체결한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에 갑자기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어 독일과 소련이 협력했던 게 아니라(히틀러 집권 직후 독-소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긴 하지만), 히틀러 집권 이전부터 독일과 소련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가까워졌다. 독소 양국은 서로를 이용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처지를 타개해 보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그들이 손을 잡은 게 ‘1922년’이라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던 존재가 이제 서로를 부둥켜안은 것이다. 국제정치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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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은 히틀러에게 기회였다. 대공황 직전인 1928년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2.6%의 지지율을 얻었을 뿐이지만, 대공황 직후에 치러진 1930년 총선에서 나치당은 18.3%의 지지율을 얻어 제2당으로 도약한다.


1932년의 대선에서 힌덴부르크가 53%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히틀러도 36.7%라는 엄청난(!) 지지율을 얻었다. 이후 1932년 7월 총선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37.4%라는 지지율로 230석을 얻는다. 드디어 원내 1당이 된 것이다(의회 해산 후에도 다시 한 번 33.1%의 지지율로 196석을 획득해 원내 1당을 고수한다).


그리고 대망의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집권한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우파 세력들을 규합했고, 의사당 방화사건을 핑계로 공산당을 때려잡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이 등장한다. 소위 말하는 ‘수권법(授權法)’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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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법에 서명한 당시 정부 요인들의 서명

두 번째의 'Der Reichskanzler(수상): Adolf Hitler'가 눈에 띈다.


이 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비상사태 시 입법부의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법


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법률인데, 말도 안 되는 법률이기에 통과방식도 말이 안됐다. 투표는 나치 친위대와 돌격대가 독일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진행됐다. 이미 독일 공산당 의원 81명은 전원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한 상태라 투표에 참석할 수 없었다(기권표를 만들기 위한 나치당의 계산이었다).


웃기는 게 당시 나치당은 196석으로 제1당임에도 전체 의석수의 1/3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법이 통과됐던 것은 독일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포기(혹은 너무 안일했던)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히틀러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생각 자체를 포기한 것이던가.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존중하겠다며 군소 정당들의 표를 끌어 모았고, 처음부터 반대가 예상됐던 공산당 의원들은 국회의사당 밖으로 다 쫓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개정을 위한 의원 정족수인 ‘2/3 출석에 2/3찬성’을 맞출 수 없어서 결석 의원 모두를 기권 처리해 겨우 통과시켰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은 죽은 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건 카뮈에게 한 말이지만)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아니,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이 더 적합할 것이다.


히틀러는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괴물은 행동하지 않은 지성, 행동하지 않은 양심들의 무관심을 양분 삼아 커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히틀러가 SS(친위대)와 SA(돌격대)가 총칼을 들고 협박과 테러를 통해, 혹은 히틀러 초창기의 ‘맥주홀 반란(뮌헨 폭동. 히틀러의 미수로 끝난 쿠데타)’과 같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권력을 갈취했을 거라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합법적인(비록 형식적이 정당성만 확보한 것이지만) 방법으로 권력을 확보했다.


다시 말해, 히틀러는 폭주기관차의 모습 그대로였음에도 독일 국민들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히틀러에게 권력을 양도한 것이다. 그래도 이때의 히틀러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타이밍을 아는 듯 보였다.


수권법을 기반으로 히틀러는 차곡차곡 독일을 접수했고, 독일 안에서 히틀러를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법부의 입법권한을 행정부로 넘긴다? 민주주의 기본인 삼권분립이 무너진 순간, 권력은 너무도 손쉽게 사유화 된다. 법 제정이란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민주주의 기본이 왜 ‘감시와 견제’인지 알 수 있다.


독일은 프랑스가 걱정했던 ‘전쟁의 길’로 가고 있었다.



소련, 폴란드 그리고 프랑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독일과 소련은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우방국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 세계에서 완벽하게 소외됐던 독일과 소련은 서로를 의지하며 국제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헤쳐 나갔다. 그러나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이 모든 관계가 정지됐다. 상식적으로도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치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겸상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들은 1939년에 서로의 필요에 따라 다시 한 번 손을 잡는다. 이것이 국제정치의 비정함이다. 스탈린은 소련으로 망명한 독일 공산당 인사들을 독일에 넘길 정도로 성의를 보였다)


이에 프랑스는 한마디로 ‘전전긍긍’했다. 히틀러의 등장으로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그 시기였다. 이때 걸린 게 폴란드였다. 만약 193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가장 위험한 곳이 폴란드였다. 폴란드와 독일은 언제 전쟁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독일인이 사는 곳은 모두 독일 영토가 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선동을 위한 구호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오스트리아와의 통합, 뒤이은 뮌헨협정을 통한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통합 등을 보면, 폴란드의 단치히(Danzig)회랑도 히틀러의 ‘구매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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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단치히 회랑


이 단치히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연합국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폴란드를 부활시키는 걸로 결론을 낸다. 덕분에 폴란드는 무려 120년 만에 독립하는데, 문제는 이 폴란드 땅에 바다로 연결되는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드로 윌슨의 ‘이상주의적 모습’이 등장한다.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우리에게는 민족자결주의로 더 잘 알려진)’ 중 13번째 항목에서 폴란드에게 ‘바닷길’을 내줘야 한다고 결의한다. 이 13번째 항목의 전문을 보면,


“독립된 폴란드 국가가 수립돼야 합니다. 그 영토에는 이론의 여지없이 폴란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포함돼야 하며, 자유롭고 안전하게 해상에 접근할 권리도 보장돼야 합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과 영토 보전도 국제 협약으로 보장해줘야 합니다.”


우드로 윌슨이 폴란드에게 바다를 챙겨주겠다고 오지랖을 부린 것이다. 문제는 누가 바다를 내주느냐였는데, 연합국의 누구도 자신의 땅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게 단치히였다. 단치히는 우드로 윌슨과 연합국이 보기에 가장 적합한 땅이었다. 원래부터 폴란드 영토였다가 프로이센에게 넘어간 땅이었고, 인구의 60%가 폴란드 사람이란 점,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영토라는 점 등 구색이 맞아떨어지는 지역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독일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히틀러 이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독일인들은 단치히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난다면, 독일과 폴란드가 제일 먼저 포문을 열 것이란 관측이 나오던 그때, 전혀 의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1934년, 독일-폴란드 간에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이다.


명백한 히틀러의 ‘페이크’였다. 유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럽의 화약고가 불이 붙기 전에 소화(消火)된 것이다. 유럽의 많은 국가 지도자들은 히틀러가 생각 없는 폭주기관차가 아니라, 나름 합리적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고(특히나 영국이), 독일을 조금 더 지켜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건 다음해를 위한 히틀러의 포석일 뿐이었다.


1935년 3월 16일.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독일재군비를 선언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프랑스는 즉각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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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재군비 선언을 한 지 한 달 만인 1935년 4월 11일 이탈리아의 소도시 스트레사(Stresa)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모여 삼국회의를 가진다. 이른바 ‘스트레사 전선’이라 불리는 삼국의 ‘대독(對獨)합의’였다. 솔직히 말하면, 별 소득이 없는 회담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에 대해 의례적인(?!) 항의를 했고, 로카르노 조약의 준수를 외쳤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떠한 구속력 있는 행동이 없었던, 구호에 그쳤던 모임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미 이때부터 각자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다급했지만 영국은 이미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유럽 대륙 밖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영국은 프랑스의 등에 칼을 꽂는다. 아니, 전 세계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게 맞을 것이다.


영국이 배신을 했다. 이 배신이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다. 만약 이때 영국이 프랑스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분명한 사실은 만약 영국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다음 회에는 영국의 명백한 배신행위라 할 수 있는 ‘영-독 해군 조약’에 관해 이야기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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