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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 사회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자성어는 아무래도 ‘당동벌이(黨同伐異)’지 싶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와 다른 무리는 배격하는 것'을 뜻하는. 조국 사태를 지나 어느 정도 조용해지나 싶더니 한 편의 영화가 다시 광장에 불을 질렀다.

 

우선 영화라는 장르가 가지는 막강한 힘을 부인할 수 없겠다. 동명의 소설보다 더 큰 논쟁을 불러왔으니 말이다. 사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페미니즘적 색채나 주제의식은 소설의 그것보다 훨씬 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더 열을 올리는 것 같다.

 

대관절 어느 부분이 그들의 심금을 울리는지(?) 궁금했다. 정유미의 오랜 팬으로서 그들의 공격이 부디 제대로 된 논리를 갖추길 간절히 바랬다.

 

욕심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저 많은 고난이

존재한다는 게 말이 되나?

 

 

폭력은 개인적인 폭력과 구조적인 폭력으로 나뉜다. 개인적인 폭력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폭력이다. 불법이기도 하다. 반면 구조적 폭력은 이데올로기가 되어 일상생활에서 인지하기 어렵다. 불법의 경계에 서 있지도 않다. 인식할 수 없기에 합법과 불법도 따질 겨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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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구조적 폭력이 경제체제와 정치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드러난다고 말했다.

즉 구조적 폭력은 일상의 한가운데 있다는 뜻.

 

하루 종일 얻어터진 사람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버지한테 맞고 출근길에는 소매치기를 당했으며 직장동료가 그의 작업물을 고의로 삭제했다. 너무 힘들어서 퇴근길에 소주 한잔을 걸쳤다. 계산하고 나올려니 아뿔싸, 지갑이 없다. 그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가게 사장한테 멱살이 잡힌 뒤 길거리로 내팽개쳐진다.

 

자, 그는 아침에 눈 뜨고부터 밤에 집 들어가는 길까지 개인적 폭력에 시달린다. 누군가 이런 내용을 영화로 만든다고 치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까? 아마 드물 것이다. 개인적 폭력, 즉 우리가 지각하고 인지하는 폭력은 서로 간에 인과율로 지배되지 않는다. 아침에 그가 아버지한테 맞은 것과 밤중에 가게 사장에게 붙잡혀 내팽개쳐진 것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

 

여기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는 공수부대에서 군생활을 하다 80년 5월 광주로 차출된다. 거기서 오발로 여학생을 사살한다. 사진사를 꿈꿨던 그의 영혼은 파괴되고 고문 경찰이 된다. 민주화 이후 공안사건을 조작하던 그와 그의 동료들은 사냥 후의 사냥개처럼 버려진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사업을 시작하지만 머지않아 찾아온 IMF에 파산하고 만다. 인생을 되돌리고 싶은 그는 철교 위에 올라가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방금 이야기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 등장하는 주인공 영호(설경구 분)의 이야기다. 고통의 스케일로 보면 앞선 사내의 이야기는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개연성은 후자가 압도적이다.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적 폭력과 달리, 구조적 폭력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많은 시련이 한 사람의 인생에 짬뽕처럼 다 들어있냐고? 그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다.

 

개인의 일상에 얼마나 많은 구조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지 자각하는 순간, 82년생 김지영의 인생에 가득 찬 폭력은 더 이상 82년생 어느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그녀의 일상에 포화상태로 녹아든 구조적 폭력을 보며 내 일상에도 구조적 폭력이 있음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성에게 여성스러울 것을 강요하는 구조적 폭력을 인식한 후에야 남자는 본인에게 남성스러움을 요구하는 구조적 폭력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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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인생에 가득 찬 불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누군가에게 여성스러움의 강요라는 구조적 폭력을 일삼고 있고, 그 때문에 나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정수기 탱크를 교체했고 징병제의 피해자가 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여성에게 여성스러울 것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회가 남성에게만 남성스러움을 강요할 수는 없다. 구조적 폭력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간에 인과율의 법칙으로 지배당한다는 말을 앞서 하지 않았던가?

 

그런 즉 영화 보고 ‘82년생 김철수’ 같은 비아냥이 나온다면 당신은 오히려 스스로를 더 깊은 구조의 폭력 속으로 밀어넣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82년생 김철수’로 고통받았던 이유는, 누군가 ‘82년생 김지영’으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82년생 김철수와 김지영으로 나뉘어 싸울 것이 아니라고, 공고한 가부장 사회를 무너뜨려 서로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저 그 자신이 되어야 할 뿐이라고, 위로가 섞인 연대의 말을 건네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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