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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회사를 그만뒀다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는 , 글로 써서 내놓을 정도로 그게 그렇게 별일은 아니다. 요즘은 온갖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거나 그만둠을 당하는 세상 아닌가. 또한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회사를 나오는 과정이 그렇게 스펙터클 했던 것도 아니다. 퇴사 회사에 알렸고, 면담을 했고, 출근 마지막  인사하고 챙겨서 나왔다.

 

이전까지의 퇴사와 다른 점이라면 하나 있다. 퇴사의 목적이 이직이 아니라는 .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의직장 생활 이제는 안녕이다. 이별은 무기한, 내가 원하지 않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렇다고 장사나 사업을 시작하는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전업으로 하면서 살고 싶다는 이유인데, 그게 글을 쓰거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보니 당장의 수입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물려받은 재산이나 건물이 있냐고? 그랬으면 애초에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을 전업으로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야 수년 전부터 해왔던 것이고, 그게 하필 지금 시점이었는가에는 당시 다니고 있던 직장 상황이나 다른 여러 이유가 있었다. 막상 마음을 먹었어도 그걸 실행해 옮기기까지는 적잖은 고민이 필요했다. 그런 여러 사정과 고민의 시간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에 밝히지는 않기로 한다. 나에게는 몹시 특별하고 유별난 경험이어도 막상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엇비슷하고 별다를 없이 흔한 일이 되고 마는그런 사연일 뿐이다.

 

지금까지 회사를 다녔던 기간을 박박 긁어모았더니 10년이 되지 않는다. 시간을 청산하고 이별한 이제 달째. 서론이 길었지만 글은 직장 생활과 이별한  두어  동안 내가 느꼈던 것들 -예상했던 ,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두-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이야기다.

 

 

 

-후련함을 잃었다

 

회사에 다닐 적엔출근과 업무시간이 지긋지긋하고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퇴근 후에는 하루를 마무리했다는 일종의 후련한 기분이 있었다. 그러다 금요일 퇴근 시간이 되면 후련함이 주짜리가 되었다. 이런 기분은 그날 하루를 얼마나 알차게 보냈는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하고는 상관없다그저 내가 출근을 하고 업무 시간을 보내고 퇴근 시간에 일을 마치기만 해도 뒤따르는 보상이었으니까. 이제 생각해보니 후련함은 그날 하루의 정서적 마침표였다.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지금도 낮에는나의 한다. 자료를 조사하거나 글을 쓰고 책을 읽거나 구상과 기획을 한다. 예전보다 시간을 자유롭게 있게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직장 생활과 이별한 이유는 놀고먹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의지가 없지는 않으나 그럴 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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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어떤 식으로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내든 퇴근할 때와 같은 그런 후련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걸 퇴사 달이 넘게 지나서야 어느 저녁, 밥을 먹다 문득 깨달았다. 왜일까, 머릿속으로 열심히 이유를 찾아봤다. 회사의 고정된 업무 시간과 다르게 일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이 확실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인가. 물론 그럴 있다.

 

회사에서도 짧게는 일에서 , 혹은 단위로 이어지는 업무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반복되고 그날로 끝맺는 업무도 함께였다. 따지고 보면 출근과 퇴근도 매일 반복되는 업무의 일종이자 하루의 시작과 끝을 몸소 겪는 작은 의식이다. 출퇴근이 필요 없어진 지금의 나는 덕분에 편해졌지만 일의 내용면에서, 몸의 측면에서 이전에 느꼈던 그런 후련함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결과 문제가 있다. 내가 일에 대한 결과, 지금까지 그건(급여)’이었다. 내가 하루 업무를 마치고 퇴근을 한다는 것은, 그날 일한 만큼의 약속된 돈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다. 이제는 그게 보장되지 않는다. 결과() 도출되기까지의 기간도 당장은 가늠하기 어렵다.

 

사라진 후련함의 원인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생산성이라는 주제가 떠올랐다.

 

 

 

생산성의 기준

 

직장 생활에서 나라는 경제주체가 일에 대한 생산성의 지표는 월급이었다. 그리고 월급은 내가 일에 대한 내용보다는 형식에 비중을 둔다. 여기서 내용은 업무() , 성과이고 형식은 일반적인 근태(출퇴근, 업무 시간) 말한다. 물론 넓은 관점에서 연봉은 업무의 성과를 판단하여 책정되며, 출퇴근 시간만 지키고 별로 하는  없이 사무실에 엉덩이만 붙이고 있다 보면 회사에서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다. 그래서비중 크다고 것이다. 일반적인 직장에서는 업무 성과에 따라 연봉이 그다지 즉각적, 탄력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으며, 업무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월급은 업무의 내용보다는 형식만 준수해도 군말 없이 지급된다. 월급, 그래서 직장 생활의 .

 

직장 생활을 때는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이 생산적이었다. 퇴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거나 놀아도, 주말 내내 집에서 뒹굴어도, 심지어 전날 마신 때문에 숙취에 시달려 업무 시간 내내 제대로 일도 못하고 골골대며 책상에 버티고 앉아만 있어도 나는 생산적이었다. 온전히 월급 덕분이었다. 생산성의 기준이 온전히 월급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앞에서도 말했듯 나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장의 수입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회사를 다닐 우스갯소리로 직장 생활은 버는 만큼 일하면 되는 거라고 했지만 지금은 일한 만큼 버는 것도 불확실해졌다. 만약 지금 내가 생산성의 기준을 여전히 월급으로 잡고 있다면 오늘 나는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하는 시간마저 생산적이지 않은 꼴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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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S(operating System)

 

생각해보니 생산성의 기준만이 아니었다. 직장 생활을 하는라는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OS월급이었다. 월급이 생산성의 기준을 정했고, 소비 패턴을 만들었으며 미래 계획의 중심이었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가치까지 재단했을지 모르겠다. 내친김에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월급은 정체성이었다.

 

 

 

쟁이[쟁이]

 

[접사]1. ‘그것이 나타내는 속성을 많이 가진 사람 뜻을 더하는 접미사.

 

과연, 나는 진정한 월급쟁이였던 것이다.

 

 

 

이별하는 중입니다

 

직장 생활과 이별한 나는 지난 달을 보내며 없는 삐걱거림을 겪었다. 자잘한 불안감정리되지 않는 하루, 이래서는  된다는 막연한 반성과 자기 의심. 어쩌면 삐걱거림은 몸은 직장 생활과 이별하였으나 나를 움직이는 OS 여전히 예전에 머물렀기 때문 아니었을까. 단순히 직장 생활과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길들여졌던 나와도 헤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월급에 길들여진 나와 이별해야 한다.

 

이별은 당장 본다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만났던 시간을 정리하는 과정 또한 이별에 속한다는 것을. 나의 직장 생활을 돌아본다. 시간 가운데 가장 좋았던 시절과 암울했던 시절을 꼽아본다. 우습게도 양쪽 모두 월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별로 없다. 길들여지고 익숙해진다는 그런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익숙해지고, 그래서 막상 있을 때는 존재감이 희박한 .

 

당분간은 지금처럼 조금 혼란스러울 같다. 지금까지 써먹었던 OS 갈아엎어야 하는 알겠는데그다음에 대해서는 아직 선명하지 않다. 비유를 해보자니 내가 하드웨어였고 월급이 OS였다는 것이지, 애초에 그런 것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 질서와 체계라는 , 조금 부딪히고 편하자고 만든 거지 자체가 목적은 아니니까.

 

익숙함을 지우는 , 길들여진 모습을 떠나보내는 시간의 몫이다.

 

그래서, 아직 나는 직장 생활과 이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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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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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