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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했다. 이름만 대면  만한 대기업이었다. 얼마  결혼했다. 단지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소속은 하루 아침에 대기업 용역회사로 바뀌었다. 팀장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아마도 나는 ‘치사하고 구질구질하다 생각을 했던  같다. 듬직한 남편도 있고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기에 곧장 퇴사를 결정했다. 30  얘기다.

 

커리어우먼이라든가, 경력단절에 대한 억울함 따위 구체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비정규직이 되는 것에 대해 어쩌면 그런가보다, 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같다. 2019년의 나라면 “결혼하면 지금껏 하던 일을   없는 장애가 생기나요?”라며 저항하거나 심지어 회사 앞에서 일인 시위라도 마다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30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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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업주부의 삶이 시작되었다. 남편의 월급으로 그럭저럭 살림하고 아이 키우며, 풍족하진 않지만 불편하지도 않게 지냈다. 그리고 IMF 터졌다. 조금씩 어려워지고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지만 아이가 어려서 내가 따로 일을  형편이 아니었다. 아이를 돌보며   있는 일을 찾았다. 내게 자신 있었던  놀이를 통해 아이에게 간접적인 공부를 시키는 엄마 역할이었기에, 궁리 끝에 집에서 공부방을 열었다. 똘똘한 아들 덕분에 몇몇 아이가 찾아왔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아이와 놀며 공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내가 그렇게 단순했다. 아이를 맡긴 엄마들은 내가 뭔가 특별한 기술을 부려 자신의 아이들이 금방 덧셈과 뺄셈을 하고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되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았다.   정도 지나 내가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입도 별스럽지 않았기에 차라리 생활비를   아끼는   편한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대책 없이 지내기엔 여전히 불안한 시기였고  불안함에 작은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는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했다.   동안 오전에 학원을 다니고 나머지 7개월은 강의 녹음 카세트테잎과 교재를 끌어안고 미련한 스타일로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설거지나 청소를 하면서도 머릿속에 들어오든 말든 앞치마 주머니에 워크맨을 넣고 귀에 이어폰을 끼고 살았다. 혹시 게을러질까 동네 친한 엄마들에게 중개사 시험 준비한다고 소문도 냈다. 떨어지면 팔리니까  스스로 담금질을  것이다.

 

3.

2003,  어렵다는 14 시험에 합격했다. 물론, 대부분의 중개사들은 자신이 치른 기수의 시험이 제일 어렵고 이상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자격증을 따고 보니, 변호사나 회계사처럼 당장 돈벌이나 취업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은 조금 든든했다.  직후 아이가 바둑 공부에 올인하기로 하면서  10시에 귀가하게 되었다. 덩달아  시간이 많아졌다. 심심풀이로 부동산중개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부동산이라고는 24 아파트   경험이 전부였던 나는, 사무실  켠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  자체였다. 지루한 와중에 진상 손님은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지. ‘ 때문에 장사가 안되는 걸까? 나와 부동산은 궁합이 맞지 않는 걸까?’라는 자책이 꾸역꾸역 밀려왔다. 6개월 만에 중개업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동대문 쇼핑몰 분양 사무실로 옮겼다. 하루종일 전화로 분양받으시라고 권하는 텔레마케팅을 하다 보니 인간에 대한 ‘작은 지겨움같은 것이 생겼다. 나이가  살이냐는  결혼은 했느냐는  성희롱적인 질문들. 사기꾼 취급하며 혐오가 한껏 배 반응들에 신물이 났다.

 

분양에 성공하지 못하면 점심식사 먹여주는  이외에는 수입도 없었다. 실적이 좋은 사람들의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나는 도저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고객을 현장으로 불러내야 하니 전화 통화만으로 나를 팔아야 했다. 영업부적응자. 그게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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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전업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남는 시간과 무기력에 답답하고 경제적으로도 아쉬웠다. 다시 재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마포의 중개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의 무식함과 단순함을 인내해주는 사장님 덕분에 조금씩 재미를 찾을  있었다. 하지만 사장 부인이 나를 탐탁찮게 여겨 결국 해고되었다. 삼십대 미모의 친절한 직원이 거슬렸나 보다. 하지만 빼어난  미모를 스스로 저주할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예쁘고 친절한  뿐인데  친절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거나 오해하게 만들다니, 억울하지만 받아들이자.  글을 읽는 독자들도 그냥 참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4.

내가 직접 중개업소를 차리기로 작정했다. 구의동 동부경찰서 위쪽에 자리 잡은 작은 전파사를 인수해서 지인과 사업을 시작했다. 투입한 자금은 보증금 1천만 원과 권리금 3백만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재개발 소문은 있었지만 상권이 별다르게 형성되지 않았던 터라 대로변임에도 월세는 저렴했다. 최근에  앞을 지나다 보니 상호는 바뀌었지만 중개사무실은 그대로 있었다. 당시 자리는  잡았었단 의미리라.

 

장사는 그럭저럭 됐지만 하염없이 자리를 지키고 찾아온 손님에게 집을 보여주며 걷는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그저 예쁘고 친절하기만  , 체력은 저질이었다.  익숙해질테니 독자들도 참고 견뎌냈으면 좋겠다. 울고 싶은데  때려준 격이랄까. 마침 아이가 바둑을 그만두기로 하는 바람에 방과  집에서 숙제나 끼니를 해결 하는 데에 어려움이 생겼다. 학교생활이라고는 2 동안 오전수업만 받던 아이가 일반적인 생활로 돌아오니 무척 낯설어했다. 스스로 적응하라고 내버려두기도 난감했다. 중개사무실 오픈한    만에 권리금 조금 챙겨서 넘겼다. 동시에, 동업은 되도록 하지 말거나 어쩔  없이 하더라도 책임은 정확하고 냉정하게 나눠야 한다는 . 그리고 나는 자리 지키는 장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을 덤으로 얻었다.

 

아이는 3 정도 기원을 다니며 바둑  이외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  쌓은 수학과 영어 공부를 위해 알맞은 학원을 찾아 보내고 그동안 바깥  먹은 아이에게  밥도  먹이며 전업주부의 보람을 만끽했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항상 아이였다. 남편은 냉장고와 세탁기 사이 어디쯤이었다.

 

아파트를 팔아 월세로 전환해서 종잣돈을 만들었다. 짬짬이 경매의 세계에 발을 들여 낙찰 받아 소소한 수익도 내고 역세권 다세대 지하를 매입해 3 보유하고 매도해 차익을 조금 챙기는  자리에 얽매이지 않고 투자처를 찾아다니며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2008 가을, 전세계를 공격한 금융위기가 나에게도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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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에게 2008 금융위기는 IMF 때보다  힘들었다. 월세와 생활비, 당장 아이 학원비라도 챙겨야 했다. 얼마 안 되는 쌈짓돈을 생활비로 소비해야 하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일을 찾아야 했다. 부동산 분야는 곤두박질치고 있어 중개업소에서 나를 고용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벼룩시장을 뒤적였다. 만만한  텔레마케팅 알바인데 일전에 분양사무실에서 하던 일이 떠올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 지하철  앞에 있는 호두가게의 알바구함을  여겨 보게 되었다. 가게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다. 쑥스럽기도 하거니와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내일 가보자하며 돌아서기 일쑤였다.

 

특별한 기술이 없고 경력이 단절된 아줌마가 일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급여 수준도 낮고 기계적이고 단순한 일들뿐이다. 2017년에 퇴사하고 집을 짓기 , 알바를 찾아 봤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텔레마케터마저도 거절당했다. 목소리마저 늙었나 보다. 아줌마는 청소, 식당, 계산원 정도가   있는 전부이다. 더는 안되겠다 싶어  마음먹고 호두가게에 들어가 연락처를 남기고 나왔다. 막상 들어갔다 나오니 별거 아닌 일이었고 거절당하면 그만인 것을 며칠씩 고민했나 싶었다. 다행히도 면접한 사장님이 일하라 하셨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5시부터 10시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호두를 하나씩 종이에 싸서 박스에 포장하거나 보관하는 것이었는데 왼손에 종이를 놓고 호두를 올린 다음 쥐어서 종이의 양쪽을 모아 비틀어 싸준다.   동안 일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마감을 맡아서 커피기계 정리와 매장정리까지 하게 되었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생각보다 힘들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뿌듯하긴커녕 탈출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고 몸에 배 호두과자의 고소한 냄새는 집안까지 호두과자 향으로 채웠다. 내가 호두과자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호두를 싸다가는 결국 빈곤해지겠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던  아닐까 싶다.   손가락을 다쳤고 그걸 핑계로 호두가게를 그만 두었다. 먹고   있는 수입이 되는 일을 찾아야 했다.

 

 나이 마흔 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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