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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서구 열강 사람들 가운데 우리와 인연이 유달랐던 건 역시 네덜란드 사람들이다. 영국 군함도 충청도 앞바다에 나타나서 필담을 주고받은 적 있고, 미국 선원들도 태풍 만나 좌초했다가 중국으로 송환된 적이 있지만, 그들이 오기 대략 200년 전에 이미 네덜란드인들은 이 땅에 상륙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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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벨테브레(박연)와 그 동료 두 명, 그리고 벨테브레가 ‘수염이 허옇게 됐을 때’ 만났던 하멜의 일행 역시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던 것은 모두가 안다.

 

벨테브레의 생애는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1627년 정묘호란의 해, 제주도에 표착했고 일본으로 송환하려 했는데 일본이 기독교인 송환을 거부하면서 조선에 남게 됐다. 함께 표류한 네덜란드인 동료 둘과 함께 병자호란에 참전했는데 벨테브레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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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투에 어떤 경로로 끼어들게 된 것일까. 기꺼이 조선을 위해 총을 들었을까.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너희를 놔 주마 약속이라도 받았을까. 동료 둘은 어떻게 전사했을까. 벨테브레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벨테브레는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조선 여인은 누구였을까. 어떤 러브스토리가 끼어들었고 그 여인은 어떤 사연을 거쳐 ‘눈 파란 도깨비’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했을까. 벨테브레도 장가갈 때 사모관대 쓰고 합환주를 먹었을까.

 

궁금한 건 많은데 기록은 짧다. 무슨 역사의 장난인지 벨테브레가 조선에 온 26년 뒤 또다시 네덜란드인이 표류해 온다. 이번엔 서른 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손짓 발짓으로 양쪽 다 갑갑하던 차에 벨테브레는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등장한다. 거의 네덜란드 말을 잊고 있던 벨테브레였지만 며칠 같이 있다 보니 네덜란드 말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벨테브레는 해안가에 나가 소매가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 울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벨테브레는 이미 완연한 조선 사람이 돼 있었다. 하멜처럼 네덜란드 사람이었으되 하멜의 일행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갈 마음도 비친 적이 없었고 하멜의 표류기에서는 벨테브레를 두고 조선 관리들이 하멜 일행에게 “이 사람이 어디 사람 같으냐?” 물었고 “네덜란드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자 “아니다 조선 사람이다.”라고 웃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조선인들로부터도 조선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았던 것 같다.

 

하멜 일행 중 일부는 13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배를 구해 일본으로 탈출했고 일본의 개입으로 나머지 네덜란드인도 송환됐는데 한 명은 죽었다고도 하고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에 남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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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의 전남 병영 유배생활

출처-경향신문

 

전라도 강진 등 해안 지역의 남씨 성 가진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이 홀로 남은 네덜란드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꽤 있다. 남만(南蠻)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표류한 하멜 일행들에게 남씨 성을 붙여 불렀던 기록이 있으니 조선에 남은 네덜란드인도 남씨로 불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네덜란드인의 후예라 믿는 사람들 집안에는 얼굴이 유달리 하얗거나 쌍꺼풀이 있거나 유달리 키가 큰 서양인적인 특성이 나타난다고들 한다. 어쨌건 우리가 알다시피 이 하멜 일행은 구체적인 ‘코리아’의 모습을 서양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남긴 흔적 가운데 하나가 네덜란드 양식의 나막신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앞뒤 굽이 있는 나막신의 등장에 대하여는 효종 4년(1653년)에 네덜란드 선원 38명이 표류해 와서 1666년 하멜과 그 일행 중 7명이 탈출한 일과 연관하여 추측되기도 한다. 이 네덜란드인들은 전라병영, 전라좌수영 등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탈출자 외에는 우리나라에 정착한 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네덜란드에서 착용했던 '나막신'의 양식이 우리의 나막신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어 이들이 나막신을 전수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문화콘텐츠닷컴)

 

이후 네덜란드인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 예는 그리 많지 않지만 6.25 때 네덜란드인들은 다시 우리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좀 뜬금없는 질문을 하나 하자면 6.25 때 전쟁에 참가한 우리 육군 사단은 1,2,3,5,6,7,8,9,11,12, 수도 사단인데 그중 가장 많은 사망자 기록을 세운 부대는 어디일까?

 

답은 8사단이다. 1만 8천여 명이 전사해서 1만 4천여 명의 전사자를 기록한 7사단을 훌쩍 넘어선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8사단은 여러 차례 격전을 치르며 사상자를 냈지만 그중 1951년 2월에 있었던 횡성 전투는 8사단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1.4후퇴로 서울을 빼앗기고 37도 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UN군은 재차 반격을 개시한다. 교통의 요지인 횡성까지 진격한 것이 8사단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역포위했고 8사단은 그야말로 산산조각 나서 사단 해체 수준의 참패를 겪는다. 그나마 기천명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한 네덜란드 군이 필사적으로 중공군을 저지했기 때문이었다. 대대장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네덜란드 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섰고 수많은 한국군들의 은인이 된다. 횡성에 네덜란드 군 참전 기념비가 서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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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대통령기록관

 

그런데 또 하나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이 있다. 바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다. 앞에 붙은 ‘밴’은 우리가 익히 아는 빈센트 ‘반’ 고호의 이름에서 보는 그 ‘반’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네덜란드에서 미국에 이민 왔으니 이민 3세인 셈이다.

 

현리 전투에서 군단장이 혼자 비행기 타고 달아나는 가운데 한국군 3개 사단이 녹아나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군단을 해체시켜 버리기도 했던 그는 한국군의 무기력함의 원인을 장교의 무능함 때문으로 보았고 미국의 웨스트포인트 식의 정규 육군 사관 학교 설립을 적극 지원한다. 그 외에도 한국군을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이 미국 의회 연설에서 “한국인들은 밴플리트를 한국군의 아버지로 부른다.”라고 말한 것은 아부만이 아니었다.

 

군대뿐 아니었다. 제주도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도록 도운 것도, 한국인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20세기 폭스사와 연결해서 대한극장을 짓고 융자까지 해결해 주었던 것도 그 사람이었다. 서울시가 제대로 융자를 갚지 않아 본인이 곤욕을 치른 것은 우리의 흑역사이지만.

 

한국전쟁에서 그는 아들을 잃었다. 파일럿으로 참전한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2세의 폭격기가 적의 대공포에 맞아 추락한 것이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냉정을 유지했다. 사령관의 아들 실종 소식에 안달이 나서 어떻게든 구조 활동을 펴 보려는 휘하를 막고 나선 것도 그였다.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구조 활동을 포기하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 네덜란드 이민 4세이자 사령관의 아들은 그렇게 한반도의 흙 한 줌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백선엽 장군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밴플리트를 떠올리며 이런 말을 했다. “촌사람 같은 인상이었다. 네덜란드계 미국 이민 가정 출신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팀을 성공적으로 이끈,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을 TV에서 볼 때마다 네덜란드계인 밴플리트가 떠올랐다.”

 

기실 2002년은 매우 특별한 해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광화문의 열기가 국민적 자신감으로 이어졌고, 그 집단의 에너지가 최초의 촛불시위를 점화했으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라는 드라마틱 한 스토리로 매조지됐다고 여긴다. 월드컵 4강이라는 지금 들으면 피식 웃을 것 같은 성과를 내고, 수천만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명승부들의 지휘자가 네덜란드인 히딩크였다. 그리고 그 옆에 핌 베어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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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다혈질에다가 쇼맨쉽 풍부하면서도 계산에 밝은 네덜란드 뱃사람 느낌이었던 히딩크와 달리 베어백은 말 없고 무표정한  듯하지만 정이 많고 자신이 일하는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속 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국인 코치와 외식을 하는데 한국인 코치가 먼저 돈을 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자 베어백은 “이거 축구협회 돈이냐 당신 돈이냐”를 묻고 코치가 개인 돈이라고 하자 “그럼 나도 한 번 내 보자.”라고 계산서를 냉큼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디어오늘 2006년 6월 26일)

 

‘더치페이’를 실천한 것일 수도 있으나 외국인 감독으로서 당연한 처우라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한두 명이 아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예외적인 일일 수도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 코리아라는 나라의 존재감을 세계에 부각시킨 것은 하멜이었다. 하멜 표류기의 대개 꼼꼼하지만 가끔 허황되기도 한 표현을 보면 왠지 히딩크의 과장된 몸짓이 떠오른다. 그 옆에 서 있던 베어백을 보면서 나는 벨테브레가 연상됐다. 표류자로서 조선에 왔으나 동료들과 함께 병자호란에 참전했고, 조선인들로부터도 ‘이 사람은 조선인이다’라는 말을 들었던 벨테브레 말이다.

 

어찌 보면 밴플리트 같기도 하다. 밴플리트가 상관인 UN군 사령관 리지웨이를 보좌하며 밀물처럼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들의 공세를 막아 냈듯 벨테브레는 히딩크를 도와 한국인들에게 잊지 못할 기쁨을 선사했고 이후로도 한국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 주었으니까.

 

잊지 못할 추억 속의 주인공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은 매우 울림이 크다. 그만큼 나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한때의 일상이 역사에 편입되면서 나는 철컹거리는 효과음 같은 걸 들은 느낌이랄까. 17년 전 청년 같았던 그의 모습, 어퍼컷을 날리는 히딩크 옆에서 한국 선수들과 함께 펄쩍펄쩍 뛰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한 네덜란드 인의 명복을 빌며, 그 이전에 한국과 여러 자락 악연과 가연을 쌓았던 네덜란드인들의 사연도 들춰 보았다. 이제 2019년도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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