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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1963 12 22 오후 12 30.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 컨버터블 리무진  대가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자동차에  남자는 부인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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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발은 빗나갔고, 한 발은 남자의 몸을 맞췄고, 나머지 탄환은 남자의 머리에 명중했다.

 

 시간  범인이 붙잡혔다.  해병대 출신의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였다. 그가  남자는 미국의 35 대통령  F. 케네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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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암살 사건  하나인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스토리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배후와 석연치 않은 범인의 죽음 등에 의해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마법총알이야기다.

 

미국 정부가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대해 공식발표를 했음에도 미국인의 68% 단독범의 소행이 아니라고 응답했다.

 

워랜 위원회 보고서(미국 정부의 공식 조사 보고서) 보면, 오스왈드는  3발을 발사했다.  번째 탄환이 케네디 대통령을 빗나갔다.  번째 총알은 앞에서 언급한 ‘마법총알 케네디 대통령을 관통한 다음 텍사스 주지사를 맞춘 총알이다마지막  번째 총알이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했다는 거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번째 탄환이다. 케네디 대통령 저격 사건과 관련된 음모론의 상당수는   번째 탄환을 근거로 '복수의 저격자가 총을 쐈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번째 탄환은 오스왈드가 아닌 다른 저격수가  탄환이란 주장이다.

 

(극단적인 주장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한 세 번째 탄환은 리무진 운전수가 쐈다는 것이다. 3번째 탄환의 궤적이나 탄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케네디의 뇌를 확보해야 하는데, 증거품으로 분류돼 미국 국립기록보관소로 보관했지만... 사라졌다)

 

 

 

1.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도 ‘음모론 등장한다. 음모론의 핵심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아니라 2 저격수가 있었다.”

 

의거 110주년이 되는 지금까지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어디서 시작된 걸까? 물증이라고 제시된 것이,

 

이토 히로부미가 피탄된 상처를 보면, 모두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형태다. 제2저격자가 있다는  증명하는 거다.”

 

단신(短身) 이토 히로부미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쐈다는 건데, 이토 히로부미의 부검 소견서를 보면 거의 수평으로 총알이 관통했.

 

2, 3 사격자가 있었다는  의거 초기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 의거 초기 혼란한 상황에서 정보가 뒤섞여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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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 <도쿄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은 이런 기사를 내보낸다.

 

『환영 인파에 섞여있던 여러 명의 한인(韓人)에게 저격당해』

 

권총을 소지한 조선인 2명이 체포됐다는 보도가 먼저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복수의 인물들에게 총격을 받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사건 초기 실행자를 특정할  없었고, 목격자의 증언들이 뒤섞였던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일정 부분 이해가 간다.

 

문제는  뒤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수의 저격자가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무로타 요시아야(室田義文).

 

무로타 요시아야는 귀족원 의원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했다. 의거 직후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장면을 목격한 수행원 9명을 모두 신문했다. 이들이 귀국한 뒤에 사건 현장 보고서를 제출했다. 수행원 8명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는데, 무로타만이 다른 이야기를 했다.

 

범인은 안중근이 아니다.”

 

무로타는 일관되게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가 죽은  발행  『무로타 요시아야  이야기(室田義文翁譚)』가 문제였다. 생전에 무로타가 했던 말을 모아놓은 책으로, 하얼빈 의거 3 저격설’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일본정부는 물론, 러시아 정부까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맞춘 총알은 안중근이 들고 있는 권총이 아니라 계단 위에서 발포된 프랑스제 카빈총의 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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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러시아인이 2층에서 저격했다라고까지 살이 더해졌

 

 발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과 러시아 양국 정부에 엄청난 외교적 압박으로 다가온다. 당장 일본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불과 4 전까지 러시아와 전쟁을 했던 일본이다. 간신히 이기긴 했지만 다시 전쟁을  여력은 없다.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고 만주로 뻗어나가려면 러시아와의 충돌은 피해야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얼빈의 경비와 경호를 맡은  러시아였다는  가장  걸림돌이었다. 무로타의 발언은 자칫 잘못하면 '러시아가 암살에 관여했다' 의심을 불러올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악화되서는  된다는 ‘교감 하고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경비책임을 강하게 묻지 않았고, 이후 어떤 추궁이나 압박도 없었다. 러시아 또한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당장 안중근 의사의 신병을 일본에 넘긴 것만 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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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타는 이토 히로부미 죽음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항의했다고 한다. 중요한  무로타의 주장이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간에  자체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있다는 거였다.

 

이때 제동을   일본 해군의 터주대감이자 근대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였다. 그는  번에 걸쳐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른 실력자였다.

 

무로타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진짜 범인을 찾는다고 나서는  자체가 일본 외교에 커다란 부담이   있다.”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일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얼빈 의거 '2저격자'가 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 든다. 그러나 음모론에는 언제나 허점이 발견된다. 여기도 허점이 있었다.

 

첫째, 무로타는 '이토 몸에 박힌   발이 모두 위에서 아래 방향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발은 모두 거의 수평인 상태로 이토의 몸에 박혔.

 

둘째무로타는 이토를 쏜 게 프랑스제 카빈총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누구도 이토 몸에 박혀 있는 총알을  적이 없다. 총알이 이토 히로부미의  안에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서 이걸 빼내려면 다시   이토 히로부미의 시신을 훼손하기 때문에 부검을 하지 않았다.

 

셋째, 카빈총은 기병이 사용하는 총이다. 기존 보병총보다 길이가 짧기는 하지만 총알 구경은 보병총과 비슷하다.  경우 이토 히로부미의 몸에 박힌 상처는 이런 형태가   없다. 관통하거나  안을 헤집어 놓았을 거다.

 

넷째무로타를 제외한 8명의 수행원들이 내놓은 진술서에는 2층에서 저격한 인물에 대한 진술이 없었다이토 히로부미가 죽는 순간도 보지 못한 무로타만이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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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타는 이토 히로부미 뒤에서 러시아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가다가, 이토가 쓰러지자 이를 부축해 열차로 옮길 때까지만 같이 했다. , 열차 안에 들어간 다음 상황은 모른다. 상처를 보거나 출혈의 양을 보거나  상황이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주치의였던 고야마 젠이 가지고 있던 솜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출혈부위를 막은 상태로 동행했는데, 이걸 무로타가 봤다고 하더라도 상처를 직접적으로   아니다)

 

다섯째,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다가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타나카 세이지로에게서 나온 탄이 32구경 탄이었다. 2저격자가 이토 히로부미만 노렸다고 한다면, 곁에서 수행하다가 맞은 다른 수행원, 특히나 이토와 동선이 겹쳤던 수행원들의 상흔을 생각해 한다.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서 수행했던 인물이 하얼빈 총영사관의 가와카미 토시히코이다. 토시히코는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부위다.  말은 최초 안중근 의사가 3발의 총알을 발사했을  2발이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팔에 맞았고, 비껴나간 탄이 이토 히로부미 왼쪽에서 발을 맞춰서 걷던 토시히코의 오른팔에 맞았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의 몸이 틀어지자 상복부에 4번째 탄을 발사했다고   있다.  경우 2저격자가 카빈총을 쐈다는 가설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여섯째, 안중근 의사가 의거 직후 ‘꼬레아 우라!’ 외쳤고, 이후 심문과 법정 진술에서 일관되게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했다고 말했다.

 

2저격자에 대한 논란은 결국 의거 초기 정보의 혼재에 의한 오해, 뒤이은 무로타의 억지 주장이 만든 ‘어설픈 음모론 뿐이다. 문제는 이게 상업적으로  매력적인 아이템이란 점이다. 지금도 케네디 대통령의 ‘마법총알이야기가 대중들의 흥미를 끄는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도 상업적 목적을 가진 이에게는 훌륭한 주제가 된다.

 

일본 정부가 이미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다고 공식 발표를 했지만, 일본의 언론과 작가들은 때만 되면 무로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살을 덧댄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혐한감정이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폄훼 이전에 돈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계속 살아남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