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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5. 27. 수요일

K리S









 

현대사회의 문명인들은 살기 위해 소비를 한다. 의식주는 물론이거니와 교육, 의료, 교통 등등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서비스를 소비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대인관계를 위한, 혹은 체면 유지를 위한 심리적 요구와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오락적 소비도 필수적이다. 한마디로 소비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흔히들 소비를 하라고 한다. 집도 사고, 자동차도 사고, 휴대폰도 사고,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소비자가 되라고 한다. 소비는 경제발전의 구세주이기 때문에 무조건 소비를 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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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의 구세주라고?



100년 전만 해도 백성들은 생존을 위한 삶을 살았을 뿐이지 소비는 귀족만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그리고 수 차례의 전쟁, 비극과 극단적인 가난을 거치고 난 뒤 20세기 후반에는 소위 말하는 제1세계가 등장했다. 케인스주의의 열풍, 복지국가 건설, 노사 대타협, 안정적인 임금제의 일반화 등 중산층이 강화되고 소비 위주의 경제가 성장하는 시기였다.


제1세계는 대량 소비 사회에 접어들었다. 한편으로는 소련과 중국을 선두로 제 2세계인 공산국가들이 좌익 혁명독재로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제3세계인 개발도상국들은 각자의 편을 고르곤 했다. 그 당시 한국의 박정희나 칠레의 피노체트한테 우익 군사독재는 제1세계를 가능한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마찬가지로 북한과 베트남 같은 좌익 군사독재는 제2세계의 후원을 받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냉전시대가 흐를수록 2류 소비재밖에 생산하지 못한 제2세계는 서서히 피폐해지고 점점 자본주의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북한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몇 나라만 빼고는 덩샤오핑이 개방한 중국부터 고르바초프가 개혁한 소련까지 제1세계를 본받기 시작하고 대량소비는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그때부터 제1세계와 제2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제3세계만 남게 되면서, 국가가 발전한다면 자연스럽게 대량 소비 사회로 귀결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일반화 되었다. 그렇게 소비는 우리 경제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 결과, 현대사회의 문명인들은 별 생각 없이 소비하게 됐고 발전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반성하는 기미조차 없어졌다. 과연 진짜 자연스러운 결과인가? 우리는 모두 행복한 소비자가 되었나? 우리의 자식들은? 그 자손의 자손들은 우리보다 더 행복한 소비자가 될 것인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소비를 통해서 원하지 않은 경제를 부양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도 소비가 좋다! 졸라! 그러나 눈을 뜨고 소비하고 싶다. 단순히 경제만을 위한 소비가 아닌 나를 위한, 내가 원하는 소비 말이다. 소비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우리한테 그렇게 소중한 구세주니까...



소비의 문제는 두 가지다 : 결여와 과잉





소비의 결여

 

소비의 결여란 바로 빈곤이다. 개발도상국은 말 할 것도 없이 OECD 국가들조차 사회양극화와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2011년 OECD 통계에 의하면 미국은 17%1, 한국은 15%, 프랑스는 8%의 인구가 빈곤선 밑에 있다2. 대량 소비 사회를 이룩한 미국이나 한국도 생존에 필수적인 소비를 하지 못하는 계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나마 평등하다고 하는 서유럽도 정도가 다를 뿐이지만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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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율, 2011년 (Source: https://data.oecd.org/inequality/poverty-rate.htm)

 


1. 참고로 이 높은 빈곤율은 2008년 미국 경제위기의 여파가 아니고 1996년부터 2012년까지 구조적으로 17%에 고정돼 있다.

2. 빈곤선은 해당 국가에서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리는데 필요한 최소 소득 수준을 가리킨다. OECD 각 나라의 중간 소득의 50%가 최소 소득으로 정해진다. - 위키피디아




소비의 결여를 해결하는 데에 보편적 복지가 아직까지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보편적 복지는 누진세 제도로 세금을 거둔 다음,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층한테는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요구를 먼저 충족시키고, 모든 국민들한테는 차별 없는 교육, 의료와 같은 공공재의 요구와 소비를 충족시키는 데 큰 몫을 한다. 보편적 복지제도가 잘 발달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빈곤율은 선별적 복지국가인 미국과 대한민국보다 훨씬 낮다. 우연인가? 보편적 복지제도만으로 소비 결여의 문제가 아예 해결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복지 제도가 약할수록 빈곤이 더 확산돼 있다고 보는 것은 맞다.


대량소비를 숭배하는 사회에 있어서 소비의 결여는 위급한 과제가 된다. 그럼 우리는 소비자나 시민으로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비의 결여를 해소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족의 가장, 공동체의 구성원,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공동체 안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힘을 합쳐서 자식을 부양할 수 없는 가장을 국부적으로 돕는 것이며, 국가에서는 공동체에서 할 수 없는 보편적 복지 제도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것이다. 소비의 결여, 즉 빈곤은 큰 문제지만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비전과 항쟁의 의욕만 있다면.




과소비

 

빈곤은 해야 하는 소비를 못하는 것이고 과소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소비를 하는 것이다. 돈이 많을수록 소비의 자유가 생기고 소비가 자유로울수록 하지 않아도 되는 소비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부자일수록 과소비에 빠진다. 그렇지만 과소비는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산층에도 널리 퍼져있는 사회현상이다. 난 부자들의 뻔한 과소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200평에서 살고 있는 연예인이나 외제차를 10대, 20대 이상씩 가지고 있는 대기업 회장과 같은 양반들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나한테는 마치 외계인 같다. 부자들의 과소비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탐욕과 환상을 부추기는 요소일 뿐이다. 탐욕이라고 표현했지만 흔히들 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부자가 되는 꿈. 개꿈. "미안하다. 우리는 부자가 못 될 것 같아..."라고 내가 아내에게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은연중에 혹은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헛된 희망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부자가 못 될 거면서. 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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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뻔한 과소비는 떼놓고 평범한 중산층의 일상적 과소비를 다뤄보겠다. 일단 상대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 과소비를 하는 것이다. 부자는 중산층보다, 중산층은 빈곤층보다 빈곤층은 노숙자보다 과소비를 하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생각해보자.


다른 나라나 다른 계층과의 비교는 접어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고.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소비하는 것이다. 그럼 소비를 하는데 별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과소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비자로서 행복한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한다. 취미 생활은 고사하고 건강을 관리 할 시간도 없다. 가족도 자주 못 본다. 왜? 먹고 살아야 되니까. 소비를 해야 되니까. 노동과 소비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노동하는 것이다. 취미, 건강, 가족, 꿈까지 뒷전으로 할지언정 소비를 위한 노동을 멈출 수는 없다. 필요 없는 과소비를 위해 하기 싫은 노동을 하는 것은 소비로 위로 받기 위해 자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단순한 생각이겠지만 우리는 과소비를 자제할 수 있다면 돈이 덜 필요하게 되고 노동 시간을 줄여, 남는 시간에 취미생활이나 건강관리, 가족에 더 신경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 있다고 하자. 자신이 왜 이렇게 열심히 일만 해야 되는지에 대한 고민이 생길 때마다 가족을 위해, 내가 일을 해야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넉넉히 생활 할 수 있다고 자기 스스로 세뇌하면서 위로를 한다. 존경스럽지만 한편으로는 한심하기도 하다.


내 경우, 난 노동시간을 줄이고 생활할 만큼만 버는 대신에 여가시간이 많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랑 매일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좋아하는 취미나 건강관리에 신경 쓸 시간도 있다. 그래서 난 소비로 나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 없다. 내가 소비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내 행복을 위해 살아보는 것이다. 불필요한 과소비를 자신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대체하려는 내 마음은 망상의 수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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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 Jackson, TED, 2010.

 

"It’s a story about us, people, being persuaded to spend money we don’t have, on things we don’t need,

to create impressions that won’t last, on people we don’t care about."


우리한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나마 오래가지도 않을 감명을 주기 위해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돈으로 사도록 설득당하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


라고 영국 경제학자 팀잭슨이 말했는데 내가 아는 과소비의 제일 간단하고 정확한 정의다. 조금은 극단적이지만 상징적이다. 이 멘트를 보면 한 사례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할부로라도 화려한 SUV 자동차를 구매한다. SUV는 사막이나 험한 도로에서 달리는 스포츠형 다목적 차량이다. 헌데 시내에서만 달릴 거면서 왜 필요한가?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돈도 없이 사서 할부 값, 유지비 등 차 때문에 괜히 고생만 하는 건 아닐까? 차를 사는 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긴 하지만 진짜 그런가? 사회, 기업, 마케팅의 심리적인 압박과 무관하게 오로지 본인만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나 묻고 싶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린 일상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과소비를 하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산 근처도 안 가면서 비싼 아웃도어 점퍼를 유행 따라 사는 것, 일반 커피숍에서 3천 몇 백원이면 충분히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왠지 좀 ‘있어 보이는’ 6천원 짜리 브랜드 커피를 마시는 것, 아이를 위해 집안을 가득 채울 만큼의 장난감을 사 들이는 것 등등 우리 모두는 좋은 핑곗거리를 대면서 과소비를 하게 된다. 나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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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맛있는 커피의 예




소비자의 항쟁

 

귀농을 해서 자급자족 하거나 심지어 금욕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비하면서 느꼈던 자유로움은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되찾기 위해 소비를 거절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물질적 이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게 되고 진정한 혁명가가 된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함께 이윤이 목적이 아닌 환경이나 사람을 위해서 활동하는 협동조합도 있다. 우리 사회에 아주 이로운 친환경 소비운동인데 바쁜 도시 생활에 쫓기는 일반 소비자한테는 참여하기 어렵다.


혁명가나 환경운동가 같은 근성은 없지만 일반 소비자로서 원하지 않은 경제와의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방법은 하나! 속지 말자. 소비 욕구를 조절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자제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소비할 자유는 있지만 그 자유의 희생자가 되면 결국 경제의 노예가 되는 반면에 소비의 자유를 자신과 맞게 이용할 수 있다면 주체적인 소비자가 될 수 있다.


물론 ‘과소비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하고 싶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사실은 나도 좀 그렇다. 흡연자로서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을 알고 있지만 담배를 피울 자유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해롭게 할 수는 없다. 개인의 욕구뿐 아니라 공동체의 제한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소비로 인한 부작용이 한 개인에게만 미치는 건 상관없지만 과소비로 인해 자원이 지나치게 개발되고 환경이 오염된다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니다.


소비의 축소는 경제의 위기를 불러오지만 지나친 소비는 인류의 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우리 세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체감하기도 어렵고 단지 생태주의자들의 극단적 비관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가별 생태발자국3을 비교해보면 부정할 수 없다. 모든 지구인들이 일반 미국인처럼 소비하게 되면 우리 지구와 같은 행성이 4개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선진국들이 소비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은 한, 우리가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지구는 자산이 아닌 빚이 될 것이다.


3.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자원의 생산과 폐기에 드는 비용을 합하여 땅의 면적으로 환산한 지수, 면적이 넓을수록 환경문제가 심각하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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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회의 분열과 같은 커다란 문제는 소비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맞는 소비자의 역할이 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생활 속에서 어느 한 가지의 과소비를 자제할 수 있다면 소비자의 항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과소비를 줄임으로써 스스로에게 주는 의미 있는 선물이 될 테고 보편적으로는 자신의 생태발자국을 줄임으로써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난 몽상가다.


혹시라도 글을 읽다가 지루해서 여기로 바로 왔을까봐 이 애니메이션으로 끝내고 싶다. 원래는 중독현상을 상징하는 작품이지만 난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새는 인간을 가리키고 황색 액체는 자원, 새의 행동은 우리가 자제해야 할 과소비다. 끝.

 







 







 





K리S (교정 : KIMA)


편집 :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