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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약간 색다른 관점에서 배달대행 일에 대한 썰을 풀어볼까 한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젊은이들이 헬멧도 쓰지 않은 채 횡단보도를 지그재그로 가로지르고, CCTV가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뒷구석에서는 장시간 노동의 허기에 지친 배달원이 순살치킨 박스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출구도 미래도 없는 첨단 막노동, 인류 99%의 삶을 통째로 포위한 전산망에서 무작위로 떨어지는 파편화되고 소외된 일거리를 받아 먹으며 연명하게 될 디스토피아의 현재형 체험판.

 

수사가 다소 과장되었을지언정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배달대행의 세계에 가지는 이미지에 가까우리라. 하지만 이것은 법조인을 대충 악마라 묘사하고. (아 그건 맞다고?) 긴 치마 입은 여성을 모성과 내조의 화신으로 그려내는 것만큼이나 영양가 없는 상상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거저거 떠나 내가 배달대행 아르바이트를 해 봤더니 일단 재미있었다.

 

 

1. 무려 재미있다?

 

다른 직업이나 아르바이트와 달리 유독 배달대행 종사자들은 유튜브나 블로그에 자신의 수입 내역을 자랑삼아 공개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매한가지.

 

이런 분위기를 노렸는지 요즘 배민커넥트는 전기자전거, 전동킥보드, 에어팟 프로와 같은 현란한 경품을 내걸고 SNS에 매일매일 알바 인증을 유도하는 이벤트도 진행하고 있다. 아예 사진 찍을 때 배달 수행 건수, 거리, 수입 내역을 박아주는 필터까지 개발해 배달 앱에 포함시켰다. 스마트 모빌리티와 애플 제품에 관심있을 사람들이 배달대행 일도 랭킹 경쟁하는 게임처럼 받아들일 거라는 가정이 깔려있는 셈이다. 아니 그 험하고 천하다는 국수 배달 일 따위를 뭔 자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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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인증 필터

 

고액의 수익을 전시하는 거야 주위의 냉담한 시선에 대한 보상심리의 측면도 없지 않겠으나, 한 달 정도 일하며 발견한 것은 배달대행 일에 캐주얼 게임의 요소가 유독 많다는 점이다. 퀘스트를 따내고 수행하여 보상을 받는 원리야 기업이 수행하는 억 단위 정부과제부터 인력소개소의 파출 알바까지 현실/게임 불문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테고, 재능거래, 대리운전, 퀵서비스, 쿠팡플렉스 등 정보통신 플랫폼에 기반한 노동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어떤 면 때문에 배달대행이 유독 캐주얼 게임처럼 느껴진 것일까.

 

첫째, 비 대면 노동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배달대행 일에서는 사람을 실질적으로 상대하는 시간이 지극히 적다. 얼굴을 맞대지 않지만 하루종일 타인과의 입씨름에 매달리는 콜센터 노동과 정 반대 처지일 수도 있겠는데, 일단 배달대행 계약 체결 당사자 - 어쩌면 고용주일지도 모르는 배민 관계자조차 교육 당일 딱 한 번 만나본 게 다다. 일하는 동안은 수많은 음식점 직원과 배달 고객을 만나게 되지만 이는 길거리에 지갑 떨어뜨린 타인에게 말 걸어 알려주는 정도의 대면보다 훨씬 사소한 스침에 불과하다. 풀 커버 헬멧을 쓴 채 인사해도 무방한 대인관계는 사실상 대인관계가 아닌 것이다. 타인 개인에 대한 기대치가 제로에 가까운 조우에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 쯤이야 감정 에너지 소비 없이 얼마든지 수행 가능하다.

 

간혹 갑질스러운 잔소리를 시도하는 음식점 사장님도 있고, 내 상식선에 현저히 미달하는 매너를 가진 손님도 있을 수 있지만 비율도 극히 낮거니와 정신적 데미지도 미미하다. 한국인이라면 대체로 밥 앞에서 경견해질 줄 알고, 말단 운송 노동자 전반에 대한 편견과는 별개로 자신의 끼니를 눈앞에 갖다주는 행위에 최대한의 존중을 베풀 자세가 되어 있다. 음식이 제대로 배달되는 한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배달원 개인에게 쓸데없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일하는 동안 그나마 사람과 대화라는 걸 나누는 순간이 있다면, 다른 업체 라이더가 '배민커넥트는 요즘도 단가 잘 주나요?'라고 물어오거나, 내가 배민라이더에게 'B마트 전담 라이더 쏠쏠한가요?'라고 물어보는 경우 뿐이다. 타인과 복잡하게 말 섞을 일이 없는 업무는 일면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고 실제로도 시시한 일 취급 받는 경향이 강하지만, 바로 그 시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낚이고 치여본 사람들에겐 말없이 일해도 된다는 것이 지상 최고의 장점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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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간식을 챙겨주시는 음식점 사장님도 있다. 빼 먹은 거 아님

 

둘째, 직관적이고 단순한 룰


첫번째로 언급한 비 대면 노동이 가능해지는 이유이기도 한데, 음식 배달 퀘스트는 목표가 매우 직관적이다. 배고픈 사람이기에 '어서' 먹어야 하고, 그 사람은 식거나 불지 않은, 즉 '변질되지 않은' 음식을 받아야 한다. 음식점, 주문중개업체, 배달대행업체, 배달 기사와 손님이 얽힌 복잡한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각종 클레임을 제기하는 일이 생길 수는 있지만, 목표가 직관적이기에 판정 역시 즉각 수긍된다. 공정하거나 정당하다는 것과는 약간 다른 이야기다, 직관적이라는 것.

 

수행에 간여하는 요소들 역시 단순하다. 반경 2km 내의, 결제완료된 콜만 수신하기에 결제단말기도 잔돈도 준비할 필요 없는 배민커넥트는 더더욱 단순하다. 맵에 표시된 가게로 이동해 음식이라는 화물을 받아 맵에 표시된 고객의 위치로 전달하는 게 전부다. 면인지 피잔지, 부피가 지나치게 크지는 않은지 정도를 체크하긴 해야 하지만 퀵서비스만큼 다양하지도 않고 수행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다.

 

셋째, 스킬과 전략이 먹힌다

 

복잡한 감정노동도 아니고, 룰도 단순하다는 이 명쾌한 조건에 비해 운전, 길찾기, 배차 수락 등등 본인의 스킬과 전략, 그리고 취사선택에 의한 성과의 차이는 즉각 체감이 가능할 정도로 크다. 인형 눈 부착 같은 단순 작업도 동선배치와 손놀림이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하는 영예를 얻을 수 있겠지만, 배달대행에서 실력은 훨씬 더 실질적으로 수익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길찾기에 1분, 운행에 1분을 단축할 수 있다면 그만큼 다른 콜의 선택 가능성이 늘어나게 되고, 이 단타들의 동선이 압축적으로 누적될수록 하루치 성과는 눈에 띄게 증가한다.

 

지금 문서 작성에 들이고 있는 공을 상급자가 알아 주기나 할는지, 차라리 옆 팀 한잔 하는 자리에 끼어 윗 보스 눈에 드는게 나을지 확신은 서지 않고, 이러나 저러나 결국 상급자에게 사적으로 밉보이기라도 하면 도태되고 마는 상황에 자신이 처했다 여기는 이라면, 본인의 스킬과 성과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기분은 매우 매력적일 것이다.

 

모든 훌륭하고 중독성 높은 게임이 그러하듯 이 일 역시 학습과 스킬업에 의한 보상이 확실하게 주어지고, 행운/불운 요소 역시 짜릿하게 밸런싱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기사들이 모바일 게임 공략집 올리듯 배달대행 꿀팁을 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풀타임 라이더들이 대개 하루에 열두시간이나 그 이상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렇게 힘든 일을 그렇게 장시간 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실제 해보니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전기자전거 배터리 용량 때문에 중간에 들어오는 것일 뿐, 나도 스쿠터를 몰았다면 충분히 그렇게 했겠구나 싶다. 사람에 치이는 건 질리지만 고독한 라이딩에는 전혀 질리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재미를 느낄 만한 일이다.

 

 

2. 폭주의 유혹

 

시야가 탁 트인 2륜차 운행의 일반적인 성격에 더해, 배달대행 특유의 '스스로 상황 통제 가능하다' 여겨지는 기분은 종종 고위험을 감수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아직 시급 15,000원짜리 초보자인 나는 현재 이동중인 배달지가 대형 상가나 대단지 아파트라면 추가 콜 잡는 것을 포기하는 편이다. 무슨 시장 5층짜리 건물의 '나-1234호'로 배달을 해야 하는데 이게 당최 몇 층인지 어떤 입구로 들어가야 하는지, 청계천에서 진입해야 할지 을지로에서 진입해야 할지 조차 감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퀘스트를 수행하고 나면 내 머리 속에 해당 상가의 맵이 오픈될 거고 다음 배달 때에는 좀더 자신있게 다른 콜 뜨는 상황도 참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배차를 빈틈없이 엮다 보면 예컨대 호텔 배달 도중에도 새로운 음식을 픽업하는 식으로 조금씩 무리를 하게 된다. 모텔과 달리 호텔은 반드시 로비에서 음식을 전달해야 하는데, 손님이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전화를 한참만에 받거나, 뭔 마무리할 잔업이라도 있었는지 세월아 네월아 내려올 생각을 않는 경우가 있다. 첫번째 콜의 전달 완료가 늦어진 건 손님 사정 때문이라 쳐도, 가방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쌀국수는 하염없이 식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음식을 전달하러 가는 길은 법질서를 현저히 위반하더라도 신속히 이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가만 보니 너나를 막론하고 오토바이는 쌩쌩 튀어나가고 있고, 쌀국수는 밀국수보다 조금 덜 부는 것 같기에 이 배달 건 역시 별다른 클레임 없이 성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아슬아슬한 성공의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점점 엮음이 주는 고소득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간다. 그나마 동시배차를 2건으로 제한하는 배민라이더와 배민커넥트는 초심자에게나 어울린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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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엄청 지연된 콜이고, 조리시간도 15분이라지만 혹시 5분만에 음식이 나온다면?

 

 

 

3. 나만 개이득일까?

 

지금까지 배달대행 일이 왜 재미있게 느껴지는지를 캐주얼 게임과의 비교를 통해 알아보았다. 분명 '한판 더' 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게 사실인데, 문제는 중독성이 나와 위탁계약을 체결한 상대방에게는 더더욱 매력적인 현상이라는 거다. 배달의민족은 주문 고객에게 쿠폰을 뿌리는 등 각종 이벤트를 선보이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라이더들에게도 이벤트를 제공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오늘도 커넥트 인증 이벤트'뿐 아니라 '어제보다 더 뛰면 보너스 얼마, 지난주보다 더 뛰어도 보너스 얼마, 오늘은 B마트 배달 건당 얼마 추가'같은 공지가 수시로 날아온다. 웬만한 게임 서비스 못지 않게 다채롭다. 이러고 있으니 더더욱 게임처럼 느껴질 수밖에.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고 결정적이어서 언급조차 하지 않은 차이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배달대행은 게임과 달리 라이프 ❤️ 가 하나뿐이고  '리스폰'이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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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회사 이름이 여태 우아한형제들인줄 알고 있었지?

 

이 일이 재미있는 건 재미있는 거고, 최근 배달의 민족과 단체교섭을 성사시킨 '라이더유니온'에도 관심이 생겨 가입 신청을 넣어 보았다. 봇 가입 방지를 위한 캡차 API가 허술한 탓인지 모바일에서 이미지 로딩이 되지 않아 계속 실패.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켄 로치 감독의 12월 19일 개봉 신작 '미안해요 리키'가 택배노동자와 0시간 계약 간병노동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니 이 영화나 함 감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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