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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목요일


펜더


 


한반도의 핵역사 50년


 



이 기사는 5년 전 한 매체를 통해 발표 된 기사이다. 당시 북한이 한참 핵실험 이벤트를 벌리며, 한국 사회를 공포로 몰아가던 시점. 그러니까 제도권 언론들의 검증되지(?) 않는 추측성 기사들로 공포를 확산시키는 시절에 썼던 기사이다(지금도 잘 찾아보면 이곳저곳에 잘 퍼져있는 기사이다).


 



- 최대한 감정이나 사상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온 핵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자란 소박한(?) 생각으로 시작된 기사이다. 공포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무지는 대중을 군중으로 몰아가는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결론은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보기 쉽게 건네주자는 걸로 낙찰을 봤다(물론 필자의 주변 환경이나 그 동안의 삶을 고려해 걸러내지 못한 '편린'들이 있음을 시인하겠다. 그러나 최대한 객관화 해보겠다고 노력했음은 말할 수 있다)


 


최대한 객관화시키기 위해 연표를 우선으로 한 기사작성을 했고, 1950년부터 2005년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핵무기와 탄도탄 미사일의 움직임을 모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다.


 



로그스 님의 기사 <핵무기가 평화를 가져온다는 논리를 디벼보자 > 와 그 밑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보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핵과 탄도탄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모습들을 참고한다면 '핵'에 대한 이해가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먼지 풀풀 묻어있는 기사를 다시 끄집어 내봤다.


 



핵은 전략병기이며, 공포병기이다. 모든 전쟁무기가 그렇겠지만, 핵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대응해야 할 부분이다. 공포를 '위력'의 한 부분으로 가지고 있는 핵에 대해 섣부른 판단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자 바람이다.


 



졸필이지만, 이 기사를 통해 한반도를 둘러싼 핵과 미사일에 대한 이해에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1. 50년대 핵협박의 시작


 



한반도에서 ‘핵’이란 단어가 처음 거론된 것은 6.25 동란으로 부터였다. 미군과 한국군이 압록강변까지 짓쳐 들어가던 그때 중국과 소련은 북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서둘러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당시 소련군도 참전을 하였습니다. 비공식적으로 말이다. 당시 미그기를 몰고 미국의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리던 파일럿들은 소련군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서 맥아더는 본국에 ‘핵폭탄’사용을 건의하게 된다. 장래 미국의 대통령을 꿈꾸던 맥아더에게 있어서 한국전의 패배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치명적인 악재라고 판단하였고, 그는 핵폭탄을 써서라도 한국전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트루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핵은 안 된다고 못 박았고, 맥아더의 경질을 생각하게 된다. (핵까지는 가지 않았어도 북한에 대한 세균전은 감행하였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핵’에 관한 발언이 나왔던 시기였다. 전혀 의외이겠지만, 한국의 핵개발의 시작도 이때부터였다. 6.25가 한참이던 1951년 이승만은 핵개발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걸 실행에 옮기게 된다. 사실 이 당시 한국이 핵개발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코믹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어쨌든 핵개발이란 것에 돌입하게 되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서 핵탄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승만은 덜컥 ‘사기’에 걸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인 한명...2차 대전 당시 배터리 공장에서 일했던 일본인 한명이 한국으로 건너와 이승만에게 사기를 쳤던 것이다.


 



- 핵폭탄을 만들어 주겠다.


 



 



당시 이 일본인은 자신에게 비밀공장과 자금을 지원해 주면 한국에 핵폭탄을 만들어 주겠단 제의를 하였고, 이승만은 이게 왠 떡이냐 싶어 앞뒤 살펴볼 겨를도 없이 당시 일본군이 남기고 간 진해의 지하 기지를 제공하며, 각종 편의를 제공하게 된다. 이 일본인은 기생질과 술판을 벌이며 세월을 보내다 정부관계자들이 개발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밧데리 몇 개를 얼기설기 엮어 폭탄이라고 말하며 진해앞바다에서 몇 번이고 폭파시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사기 행각은 체 1년도 가지 못해 ‘사기’란 것이 들어나 결국 쫓겨나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핵개발 프로젝트는 그렇게 끝이 나게 된다.


 



50년대 한반도의 핵은 미국의 핵협박이 시기였다고 정의내릴수 있겠는데, 연표를 보며 설명해 보겠다.



1956년 핵에 대한 열망은 남한이 먼저 불태웠지만, 냉정한 이성으로 차근차근 접근한 것은 북한이라 할 수 있겠다. 북한은 1956년부터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에 과학자 들을 연수시키며 핵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연간 30명 규모로 1964년까지 이 어진다)


 



1957년 한반도에 처음으로 핵이 도입된 해였다. 이 핵도입은 여러 가지 정치적 변수가 작용하여 이루어진 ‘정치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데,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끊 임없이 병력감축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한국정부에 72만명 선의 병력을 허용하였으나, 이것이 한국 경제에 악재로 작용하고, 미국측으로도 부담으로 작용 하던 상황이었다.(당시 이 병력을 먹이고, 재우고, 무장시키는 것은 거의 미국 의 지원에 의해서 였다) 이때 미국측이 들고 나온 논리가 ‘양보다 질’이란 논리였 다. 병력수만 많고, 전력이 떨어지는 비효율을 제거하고, 소수정예의 강력한 전 력을 가진 정예강군을 만들자면서 나온 것이 정전협정 13조 D항의 폐지였다.


 


13조 D항의 내용이란 것이 ‘외부에서 한반도로 무기반입을 금지한다’라는 조항이었 는데, 문제는 이걸 북한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계속해 전력을 확충하는 상황에서 이 사문화된 조항을 계속해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과 군비 증가에 대한 부담으로 미국은 1957년 6월21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정위원회 제75차 본회의에서 13조 D항의 폐기를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현대 화와 핵무장을 선택하게 된다. 이 핵무장의 선택은 당시 국제정치 상황을 고려한 미국측의 ‘양수겸장’의 노림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 핵전력의 중추로 자 리잡은 것이 바로 ‘일본’이었는데, 일본에 핵무기를 저장해 유사시 동북아에 핵우 산을 제공한다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었고, 이는 1951년에 체결된 미일 안보조약에 의거해 일본정부의 허락 없이도 미국 독단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문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국민들이 ‘반핵운동’을 벌이면서 이야기가 묘하게 꼬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생각해 낸 것이 일본의 핵을 한국으로 옮기자는 발상이었 고, 이승만 정부의 열렬한 ‘환영’속에 1957년 일본에 있는 9개의 미군기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들이 한반도로 건너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미군의 생각으 론 한반도의 핵기지와 제7함대가 보유한 핵이라면 동북아시아에 핵우산을 펼수 있 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핵무기의 이사였던 것이다.


 


1958년 1월28일 미군은 280미리 핵대포와 지대지 미사일 어네스트 존을 한국에 배치하게 된다. 아울러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을 핵전쟁에 대비한 팬토믹(Pentomic)사단으 로의 개편작업에 들어가게 된다.(팬토믹사단은 핵전쟁을 대비한 체제로 총18개의 핵 무기 체제를 구축했던 편제이다. 그 편제를 잠시 살펴보면, 155미리 곡사포 12문, 8 인치 곡사포 4문, 어네스트 존 미사일 발사장치 2기로 구성되어 있는 전술핵 사단이 었던 것이다)


 



 



1959년 미군은 한국에 마타도어(Martardor)크루즈 미사일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사 정거리 1,100킬로미터짜리 마타도어의 배치는 북한을 노린 것이 아니라 중국과 소 련을 노린 배치였다. 한반도가 미국의 군사전략에 의해 핵무기 기지화가 되는 시초 였다.


 



1959년 9월 북한과 소련은 ‘조, 소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 소련과 공식적인 원자력 협력체제를 구축


 



57년 주한미군에 핵탄두가 배치되면서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하자며 끊임없이 이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남한정부와 미국은 이런 북한의 주장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 당시, 70년대 홀링스워스 중장이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배치받은 다음 내놓은 전진방어 전략...그러니까 작계 5027의 등장 전까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멸망’을 상정해 놓은 전략이었다. 당시 미군의 방어계획이란 것은 북한이 남침하면, 즉각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일단 후퇴한다음 미군의 증원계획이 발동되어 병력이 확충되면 다시 반격한다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당시 주한미군의 핵탄두 배치위치였다.


 


당시 주한미군의 핵탄두들은 휴전선 바로 밑, 북한군 야포의 사정거리 안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전쟁을 일으키면 모두 죽거나, 아니면 이 핵무기를 잃는 것 둘중 하나밖에 없다’라는 심리적 압박을 북한과 미군측에 동시에 가하는 말 그대로의 ‘죽음의 포커판’을 벌인 것이다. 더큰 문제는 핵무기를 쏘는 순간 한국의 수도 서울과 경기도 일대는 방사능 오염에 의해 사람이 살수 없는 죽음의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미군은 베트남에서처럼 한마을을 구하기 위해 그 마을 전체를 다 죽여버리는 짓을 이미 1950년대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2. 60년대 공포의 확대 재생산...


 



60년대는 북한의 핵연구가 걸음마를 뗐던 시기였다. 영변에 원자력 연구단지를 건설하고 원자력 연구에 들어간 사이 미국은 계속해 남한에 핵탄두를 들여왔다. 60년대 내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이런 경고를 보냈다.


 



- 내려와 봐라, 오는 순간 너희와 남한은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언제든 핵탄두를 너희들에게 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


 



실제로 미군은 계속해 핵탄두를 전방으로 보냈으며, 이는 곧 핵무기를 ‘인계철선화’시키는 전략이었다. 이에 대한 북한의 심리적 압박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1961년 사정거리 1,800킬로미터의 메이스(Mace) 미사일이 들어오면서 한반도의 핵이 북 한만을 위한 핵이 아님을 공고히 했다. (터키에 배치된 주피터와 토르 중거리 핵 이 소련을 노리는 것처럼 남한에 배치된 핵 또한 소련과 중국을 노리고 있었다. 이 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반도가 핵전쟁의 전초기지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중국의 핵실험 성공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핵정책을 ‘강경일변도’로 나가게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핵보유가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동맹체제를 붕괴시키지 않을까란 불 안감으로 아시아에 대한 핵전력의 확충에 들어가게 된다. 당장 괌에 B-52핵폭격기 를 배치했고, 전략핵 잠수함인 폴라리스를 실전배치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 지 않았다. 당장 북한에 대한 전략이 변하게 된 것이었다. 중국이 핵을 보유하지 않았을때에는 중국과 북한이 연합을 해 남침을 할 확률이 낮았으나, 이제 중국도 핵 보유국이 된 상황에서는 중국이 미국 눈치를 보며 한반도의 개입에 대해 고민할 변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당시 미국이 상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소련이 유럽 으로 쳐들어 오는 것과 동시에 북한과 중국이 연합을 해 남침을 한다는 시나리오 였다. 이 상황에서 미군이 택할수 있는 방법은 미군을 후퇴시켜 후일을 대비하는 것(증원군이 올때까지 버티는 것)과 초전에 핵을 사용해 적을 제압하는 방법, 이 두가지를 두고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미국은 아주 당연하게도 후자를 택하 게 되었고, 그리고 그 전략에 맞춰 한반도의 핵전략이 바뀌게 되었다. 전쟁 초기 핵사용을 목적으로 해서 한반도에 핵지뢰(AMD : Atomic Demolition Munitions) 로 불리는 원자파괴탄이 배치되었다.


 


이는 초전에 핵을 써서 북한군의 서울 진격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아울러 핵탄두가 장착된 나이키 허큘리즈 미사일을 서울 북방에 배치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전쟁이 터지면 일단 핵부터 쏘고 시작한다 는 것이 명문화 되었던 것이다.


 



1965년 6월 주한미군이 핵무장을 강화하며, 핵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그때 북한은 59년 9 월에 체결한 ‘조, 소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에 의해 소련으로부터 원 자로를 들여오게 된다(IRT-2000 원자로...우리에게는 제1연구용 원자로로 불리고 있다) 한반도 최초의 원자로 도입이었다.


 



IRT-2000은 1963년 6월부터 평양 북방 92킬로미터 지점의 ‘영변’에 건설된 말 그 대로의 ‘순수한 형태의 소형 연구용 원자로’였다. 이 IRT-2000의 건설과 동시에 약 300명의 북한 핵전문가들이 소련의 각종 핵 연구소에 파견되어 기술교육을 받았다. 한반도 핵 역사에서 이 IRT-2000원자로가 가지는 의의는 대단한데, 이 IRT-2000 을 통해 북한은 핵연구에 관한 제반사항을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IRT-2000의 건설과 교육을 위해 파견된 소련 기술자가 떠나자, 곧바로 북한은 이 를 운전할 수 있게 되었고, 계속된 연구를 통해 애초 2MW급이었던 이 IRT-2000을 5MW로 확장하였고, 궁극에 가서는 7MW급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60년대 한반도의 핵은 말 그대로 [공포의 확대 재생산]이었다. 중국의 핵실험 성공에 의한 긴장의 고조는 막바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전략을 ‘파멸로의 에스컬레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재래식 전쟁의 개전을 핵으로 막아보겠다는 편의적인 발상 덕분에 전쟁과 동시에 서울과 경기도 일대, 북측의 개성은 방사능 낙진의 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구체화 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남한은 주한미군의 핵에 대해 어떠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핵이 한국을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핵무기가 인계철선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안도하게 된다. 어쩌면 이 공포의 시기가 20여년 뒤 한반도 핵위기의 씨앗이 되었을수도 있다. 이때까지 북한은 그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요구하며 기회가 있을때마다 주한미군의 핵철거를 요구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 북한은 훗날 북한의 희망이 되는 ‘핵억제력’의 기초를 닦아가게 된 것이었다.


 



3.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70년대의 한반도 핵은 크게 두 가지 틀로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하나는 베트남의 패망과 카터 행정부의 등장에 의한 미군철군 등등의 악재(?)에 의해 한국의 핵보유 추진을 시도한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홀링스워스 중장(James F. Hollingsworth)의 등장이었다. 이제 미군에 의한 핵무기 위협은 어느 정도 감소된 반면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가 한반도에 새로운 핵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국제정치학 적으로 봤을 때 70년대는 말 그대로 ‘핵의 질풍노도’시기였다. 이스라엘은 1966년 11월 네게브 사막에서 내폭실험을, 1979년에는 남부 인도양에서 남아공과 합동 핵실험을 했었고, 남아공은 1977년 칼라할리 사막에서 핵실험을 하였고, 이것이 미국과 소련의 정보위성에 포착되어 남아공 역시 준 핵보유국으로 분류되었다. (1979년 남부 인도양에서 이스라엘과 남아공의 공동 핵실험으로 이 두 나라는 핵보유국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남아공과 이스라엘의 핵보유는 어느 정도 국제정치학적인 ‘허용’이 있었던 부분이라면, 미국의 뒷통수를 내려 친 것이 1974년 5월에 있었던 인도의 핵실험이었다. 이 질풍과도 같은 핵보유 러쉬 앞에서 미국은 내부단속(동맹국들의 핵개발 감시 및 전 세계적인 핵개발 의도 사전 파악)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걸린 것이 바로 한국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의 한반도 핵은 국제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1970년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핵확산금지조약)의 발효...미국은 1957년 UN에 제의하여 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국제원자력기구)를 창설하게 된다. IAEA는 원자력의 무기화를 방지하고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사용하 기 위해 최초로 생겨난 국제기구이다. 미국은 IAEA를 통해서 핵확산을 막으려 하 였으나, 60년대 이어진 핵보유 러쉬(프랑스 1960년, 중국 1964년, 이스라엘 196 6년) 앞에서 IAEA의 무력화를 경험하고, 소련과 공동으로 NPT를 제안하게 된다. 이 NPT는 한마디로 말해, 불평등 협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목적을 살펴 보면, ①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을 막고 ②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을 방지하며 ③ 원 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1970년 2월 18일 닉슨 독트린 발표. 한국 핵개발의 기폭제가 된 닉슨 독트린...당시 베트남 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미국은 결국 [탈아시아 정책]을 내놓게 된다. "미국은 아 시아 및 극동에 있어,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 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발언을 듣고 한국은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불과 6개 월 전인 1969년 8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였기에 그 충격은 더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 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함으로써 패닉상태에 빠진 한국에 마지막 일격 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주한미군에 대한 철군이 없을 것이란 낙관론이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다.


 



1970년 6월 북한 경비정에 의한 한국 선박의 납북사건이 터졌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대 통령 직속 기구로 국방과학 연구소의 창설을 검토



1970년 7월5일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는 70년 6월 30일 ‘미군 철수는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달성되어 우리의 전투능력이 북한을 훨씬 능가하게 되는 70년대 후반까지는 있을 수 없다’라며 당시 언론에서 흘러나온 ‘주한미군 철군’에 대한 관측기사를 전면 부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발표가 있은지 1주일 뒤인 7월 5일 사이공에서 개최된 월 남 참전국 회의에 참석한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함께 참석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하겠다"는 정식 통고를 했다.


 



1970년 8월 대통령령 제 5267호로 국방과학 연구소 창설...산하에 무기개발위원회라는 비 밀기관 설립


 



1971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수, 같은 시기 비무장지대의 최전방 에 배치되어 있던 제2사단도 서울 북방 휴전선 근처로 이동 배치


 



1972년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재처리 장비와 기술확보를 위해 프랑스와 손을 잡게 된다. 이때 한국이 선택한 핵폭탄은 플루토늄식 핵폭탄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플루토늄 제조용 재처리 공장 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1973년 홀링스워스 중장(James F. Hollingsworth)이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홀링스워스의 등장은 케네디 행정부때부터 공식화 된 유연반응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ry)의 한국적 적용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측은 한반도 전쟁 상황시 초기에 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재래식 방어력을 통해 북한군을 막아서 자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이때 홀링스워스가 주창한 전략이 그뒤 한반 도에서의 전략을 결정하게 되는 [전진방어전략]이다. 전진방어전략 이전의 한반도 전쟁상황은 북한군의 공격시 일단 후퇴를 하고, 이후 미군의 증원을 받아 반격을 한다는 전략이었으나, 홀링스워스 중장은 이럴것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 을 맞아 싸운다는 전략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야포부대가 전진배치 되었으며, 제2사단 휘하의 2개 여단에게 전쟁발발시 개성장악의 임무가 부여되었 다. 같은시기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과 캐나다에 근무하는 한국인 핵·화학·엔지니어 링 전문가를 은밀히 스카우트하기 시작했다. 이와 별도로 해외에서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장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74년 1차 율곡사업(1974~1981) 시작


 



1974년 프랑스의 협력에 의해 한국은 연 20kg의 핵 분열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공장 기술 설계도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설계도대로라면 한국은 미국이 지난 2차세계 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2개를 만들 수준의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1974년 5월 인도의 핵개발 성공, 이로 인한 충격으로 미국은 전세계의 핵개발 동태를 점검 하기 시작한다.


 



1974년 9월 북한 IAEA에 가입


 



1974년 11월 미 대사관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 첫 단계를 추진중이라는 1급 기밀 정보를 본국에 보냈다. 당시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평가서를 여러차례 워싱턴에 보냈으며, 이 평가서를 바탕으로 해 미국은 한국의 핵개발 수준을 다각도로 분석하기 시작함



1975년 2월 말 주한 미 대사의 평가서의 분석이 끝났다.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이 총동원되 어 분석한 결과는 ‘한국은 향후 10년 안에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1975년 2월 기준으로 한국은 이미 핵무기 개발이 초기단계(initial stage)에 들어섰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의 대응책은 크게 3가지로 나뉠수 있었는데, 하나는 한국이 들 여오기로 한 핵 연료와 재처리 플랜트를 구입하려고 접촉하고 있는 캐나다와 프랑스 에 한국에 핵물질을 공급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한국에 대한 경 고로 이 이상 더 핵무기 개발에 나서지 말라는 직간접적인 압력이었다.


 


셋째는 당시 한국에 건설 예정중인 고리 원자력 발전소 2호기에 대한 미 수출입 은행 차관 제공 을 백지화 시킬것이라는 협박이었다. 당시 에너지 난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으로선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절실하였다. 당장 수출입을 하기 위해선 전력이 필요한데, 지 금 당장 전력를 끌어올때가 없었다. 더군다나 제1차 오일쇼크 이후 에너지 난에 대 한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원자력 발전소는 생명줄이었다.


 


같은시기 주한미군에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들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그 동안 전진 배치 되어있던 핵무기가 후방인 군산 미공군기지에 있는 저장시설로 이동배치 되었 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핵무기 인계철선은 사라지게 된다.


 



 



1976년 3월26일 김일성, 일본잡지 [세카이] 편집장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핵무기로 무장하 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핵무기를 생산할 돈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시험해 볼 장소도 없다’며 핵무기 개발의지를 부인



1976년 도널드 럼스펠드가 슐레진저 미 국방부 장관의 후임으로 들어서면서 럼스펠드, 주 한미 대사인 스나이더,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하비브 세명이서 삼 각체제를 구축 전방위적인 압력을 행사, 결국 ‘핵무기 개발을 강행할 경우 안보 및 경제 협력관계를 포함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 할 것’ 이라는 미국의 최후 통첩을 받고 박정희 핵 프로그램 중단. 그러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비밀 핵무기 개발팀을 해산하지 않고 한국핵연료개발공사라는 조직에 흡수시킨 뒤 원자로에 쓸 핵 연료봉을 제조하라는 새 임무를 맡겼다


 



1976년 10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였다’는 기사를 보도하게 됨 코리아 게이트의 시작. 당시 미 의회와 국무부는 박동선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미국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삼아 송환을 거부. 이후 여러차례의 협상을 통해 1977년 12월 31일 박동선의 ‘전면사면권’을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박동선의 증언을 할 것이라는 공동 성명 발표. 이듬해 1978년 2월23일 미국으로 건너간 박동선은 미국 상 ·하원 윤리 위원회 증언에서 한국에 대한 쌀판매로 약 920만 달러를 벌어 이 중 800만 달러 를 로비활동 등에 지출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3일 공개청문회에서 그는 전 (前) 하원의원 R.해너 등 32명의 전 ·현직 의원들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R.M.닉슨에게도 2만 5천 달러 를 제공하였다고 밝혔다.


 



1976년 11월 지미카터, 민주당 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출마, 현직 대통령 G.R.포드를 누르 고 제39대 대통령이 되었다. 인권외교로 대표되는 지미 카터의 등장은 박정희 정권 의 ‘심각한 위협’이었다. 당시 코리아 게이트의 한가운데에서 선거운동을 벌렸던 지 미 카터는 유신체제, 인권억압 거기에 미국에 대한 로비로 점철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가지게 된다. 이미 선거공약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웠던 지미카터의 등장은 필연적으로 박정희 정권과의 마찰을 예고했다.


 



1977년 5월 카터 행정부 ‘주한미군 철수’를 공식 정책화. 이 철군계획에 따르면, 1978년 제2보병사단의 1개여단(6,000명)을 즉각 철수하고, 1980년 6월말까지 두 번째 여 단과 모든 비전투병력을 철수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여 병력과 미군사령부, 핵무기의 완전 철수는 1982년도까지 완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급해진 박정 희 정권은 군사원조의 증액과 전술핵무기에 대한 남한 잔류를 요구하였지만, 미국 측이 거부함. 이때 당시 남한에 배치된 미군 핵무기의 총 수량은 250기로서 절정 기때 700기에 이르렀던 것에 비하면 그 양이 1/3 정도로 줄어든 수량이었다.


 



1977년 12월 북한 영변에 있는 IRT-2000 원자로에 대한 부분적 안전조치 협정을 IAEA와 체결 1978년부터 매년 1회씩 사찰 실시


 



1978년 박정희 핵개발 프로그램 재가동, 프랑스와 핵재처리 시설에 대한 협상을 다시 시작 하게 됨. 한국의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발 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담판을 지음. 박정희에 대한 지미 카터의 불신감 증폭


 



1979년 1월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인 선우련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1981년 상반기중 핵 무기 제조를 완료할 수 있다’라는 말을 털어놓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81년 국 군의 날 행사때 이 핵무기를 대외에 공개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의견을 밝 힘(이는 확인된 사실은 아니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건에 대해선 상당한 신빙성이 있 는 발언이었음 1979년 당시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완성단계 바로 직전의 수준이었 다)


 



1979년 북한 영변에 5MW급 원자로 건설 시작...이후 있을 한반도 핵위기의 단초를 제공함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1970년대의 한반도 핵을 정의 내리자면, 주한미군의 전술핵이 일선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안보불안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 보유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 역시 한국과 치열한 수싸움을 벌리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1970년대 박정희의 이런 치열한 핵무기 추구 노력은 거꾸로 부메랑이 되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자극하게 되었다.


 



4. 목란(木蘭)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


 



70년대 중반 김일성이 핵무기 보유의지가 없음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핵무장을 추구하던 박정희 정권의 움직임에 자극받아 핵무기 개발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이미 79년에 시작된 영변의 5MW급 원자로 건설이 그 의지의 표명이었다. 남한이 박정희의 죽음으로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던 것과 달리, 거꾸로 북한은 박정희의 죽음을 통해 핵무장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80년대는 남한에서 피우지 못한 무궁화를 북한이 이어받아 목란(木蘭)꽃을 피우기 위한 기간이었다. 미국도 70년대 남한 정부를 통제했던 것처럼, 북한의 이런 핵열망을 봉쇄하기 위해 두팔을 걷어붙혔던 80년대이다. 그리고 그 80년대의 시작은 박정희의 그림자로 남아있는 ‘남한 핵무기’의 제거로 시작되었다.


 



 



1981년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이 없는 정권들이 했던 것처럼 대외 에서 정통성을 찾게 된다. 이런 그들에게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 미국의 ‘정권승인’ 이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승인을 받기 위해 전두환은 박정희가 목숨을 걸고 만 들었던 핵무기를 팔기로 결정하게 된다. 1981년 1월 22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 사가 헤이그 미 국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레이건-전두환 회담을 위한 협의사항 제 안’이라는 제목의 2급 비밀 전문을 보면 전두환 정권과 미 레이건 행정부의 막후 거래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는데,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前) 대통령의 미 국 망명 허용과 핵무기의 포기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결국 전두환은 미국 행정 부의 승인을 받는 조건으로 해서 핵과 김대중을 포기하게 된다. (이때 반대급부로 제공받은 것이 남한에 계속 전술핵을 배치한다는 것과 F-16전투기의 지원이었다)


 



1982년 4월 북한 영변에 건설중인 북한의 5MW(미국측 주장은 30MW급) 원자로가 미국의 첩보위성에 포착되게 된다.(이 5MW급 원자로는 1987년에 가동되게 된다)


 


1984년 6월 원자로와 냉각탑등을 확인하게 된 미국은 이것이 원자로임을 확인하게 됨. 당 시 이 원자로의 형태는 195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원자로와 놀랍도록 유사하였다 고 함. 미국측은 남한에 이어 북한까지 핵개발에 나섰다고 판단, 촉각을 곤두세우 게 된다. 당시 냉전이 한참이던 시절이었기에 미국에 의한 북한 제재가 어려웠던 상황이었기에 미국은 소련에게 ‘북한이 NPT에 가입할 수 있도록 협조’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이런 미국의 협조요청에 소련또한 발빠르게 대응, 북한의 설득에 나서게 된다. 당시 북한에 대한 설득에 나선 소련이 내놓은 조건이란 것이 ‘440MW급 흑연로 4기를 제공할 터이니, NPT에 가입해라’라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 조건을 수락하게 된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죽자 고르바초프가 새 서기장으로 등장하게 된다. 소련붕괴의 전주 곡이자, 북핵위기의 본격적인 시동을 의미했다.


 



1985년 12월 북한 NPT 가입/ 북-소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경제기술협력 협정’체결


 



1986년 4월 26일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1986년 소련의 흑연로 4기 건설을 위한 기술자들이 대거 북한으로 들어옴.(소련은 건설부 지를 1992년 함경남도 신포 인근으로 결정하게 된다. 이때 소련은 애초 지원하기 로 했던 440MW급 흑연로 4기 지원 계획을 바꿔, 650MW급 소련형 경수로로 바 꿨다. 당시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영향에 의한 변경이었다)


 



1986년 3월 영변의 강가 모래사장에서 고폭약 실험의 흔적들이 미국 첩보위성에 발견되었 음. 과거의 위성사진을 다시 판독한 결과 1983년부터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실험의 흔적이 발견됨. 고폭실험은 핵무기 개발의 확실한 물증이었다. 이때 같이 발견된 것 이 영변에 새로 건설 중인 용도미상의 축구장 두배에 달하는 건물이었다.


 



1987년 2월 1986년 3월에 발견된 용도미상의 건물이 핵재처리 시설의 전형적인 형태인 두 꺼운 방사능 차폐벽이 설치되고 있음이 확인. 핵 재처리 시설임이 밝혀짐


 



1988년 영변 인근에 50MW급 원전 건설이 확인 됨/ 같은해 노태우 정권 북방정책 돌입, 이후 90년대 북핵위기 초반기까지 북한을 압박하고, 대화로 끌어내는 시금석이 됨


 



1989년 2월 미국 영변의 흑연로 건설이 전력생산이 아니라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이란 확 신을 가지게 됨. 문제는 이 사실을 미국만이 알고 있고, 소련, 중국, 남한정부는 몰 랐다는 것인데, 미국 결국 2월에 소련과 중국에 이 사실을 각각 통고, 같은해 5월에 남한 정부에도 통고하게 됨.(이 사실은 곧 국내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1989년 영변의 5MW급 원전이 100일간 가동정지 되게 된다. 북한핵을 분류할 때 ‘과거의 핵’, ‘현재의 핵’, ‘미래의 핵’으로 나누는데, 이때 100일간 정지된 원전에서 축출했 을 것이라 예상되는 플루토늄을 ‘과거의 핵’이라 부르게 된다. 본격적으로 북한핵이 궤도에 오른 시점이다. 이 5MW급 원전의 운전 중단은 이후에도 상당부분 문제가 되 었는데, 1990년 북한이 IAEA에 신고한 내용을 보면, 단1회의 재처리를 통해 80g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IAEA가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채취된 샘플 을 정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소한 3회(1989년, 1990년, 1991년)에 걸쳐 총 8Kg의 플루토늄을 축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9년 9월 프랑스의 상업위성 SPOT 2호의 촬영에 의해 영변 핵시설이 전세계에 공개되 게 된다. 북한핵이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떠오르게 된다.



80년대를 정리하자면, 70년대 박정희가 남긴 한국의 핵무기 그림자를 지워버리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 이번에는 북한이 핵개발을 들어가면서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핵위기의 싹을 틔우게 된다. 80년대 북한핵 개발 시도는 90년대를 대비한 일종의 사전포석과도 같은 성격이었다.


 


-2부로 이어짐


 


딴지 군사전문기자 펜더


(jagdpant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