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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금요일


허기자


 


(이주의 추천작)


 


1. <꿈의 미로> 아사노 타다노부의 얼굴이 영화가 되다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아사노 타다노부(淺野忠信) 특별전’이 한창이다. 1990년 마츠오카 조지의 <물장구치는 금붕어>로 데뷔한 이래 5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아사노 타다노부는 현대 일본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배우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표정만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오시마 나기사(<고하토>). 야마다 요지(<엄마>)와 같은 거장에서부터 구로자와 기요시(<밝은 미래>), 고레에다 히로카즈(<하나>), 아오야마 신지(<새드 베케이션>) 같은 중견의 작가들, 그리고 이시이 가츠히토(<녹차의 맛>)와 같은 신진 감독까지, 90년대 이후 현대 일본영화를 아우르는 거의 유일한 배우다.


 


그중 이시이 소고 감독의 <꿈의 미로>(1997)는 아사노 타다노부의 표정이 품고 있는 미스터리함을 가장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 아사노 타다노부가 맡은 역할은 어딘가 모르게 허무한 기운을 내뿜는 버스운전사 니이타카다. 팀을 이룬 버스 차장 도미코(고미네 레나)로부터 친구 치야코의 살인범으로 의심받는 것. 추리소설가 유메노 규사쿠의 <소녀지옥> 중 ‘살인 릴레이’를 각색한 <꿈의 미로>는 도미코의 눈에 비친 니이타카의 모습을 통해 혼란을 겪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다룬다.


 


이 영화에서 니이타카는 도미코 속에 내재된 이중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환영에 다름 아니다. 영화 내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니이타카는 옴므파탈로써 도미코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니이타카를 살인범으로 확신하는 그녀이지만 가까이 접근할수록 알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드는 그는 현실을 뛰어넘은 존재다. 머리로는 동료를 살해한 살인범이지만 가슴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버스 차장의 일상을 탈출하게 해줄 남자인 것이다. 니이타카를 인식하는 도미코에게 이성과 감성의 경계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 즉, 도미코가 겪는 혼란은 어떤 경계의 파괴를 의미한다.


 


파괴는 도미코의 심리적 상황을, 도미코와 니이타카의 관계를 함축하는 <꿈의 미로>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하여 이시이 소고 감독은 상반되는 존재의 충돌을 영화의 주요 이미지로 활용한다. 컬러화면 대신 흑백화면을 선택한 것도 그렇거니와 니이타카는 선과 악 사이를 넘나들고 그를 대하는 도미코의 심리는 한줄기 빛을 따라 어두운 터널을 헤매는 방황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다시 말해 도미코에게 니이타카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연결하는 터널과 같다. 니이타카를 벗어나야지만 도미코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터널의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그런 도미코의 주변을 휘감는 허무와 파괴의 공기는 죽음과 맞닿아 있기에, 그래서 탐미적이다. 사랑은 찰나적이지만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허무하다.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도미코와 니이타카의 사랑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영화는 꿈과 현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욕망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도미코의 모습을 통해 삶은 허무라는 '바니타스'(vanitas)의 테마를 재현한다. 그리고 니이타카는 바로 바니타스의 캐릭터적 재현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의 성격이 대개가 이런 식이었다. 찰나적 아름다움 뒤에 늘 파국의 그림자가 숨어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훌쩍 자살을 택한 남자였고(<환상의 빛>),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돌발적인 살인을 감행했으며(<헬프리스>), 모성애를 자극하는 창백한 얼굴에서 살인의 그림자가 엿보였다(<포커스>).


 


이시이 소고는 1980년대 일본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장본인으로써 경제 호황을 누리는 일본의 이면에 숨겨진 광기를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줬다. 살얼음 같은 아름다움 뒤에 균열을 품은 아사노 타다노부는 현대 일본의 얼굴이면서 곧 감독의 미학을 실현해줄 가장 적합한 그릇이었던 셈이다. <꿈의 미로>는 그 어떤 영화보다 아사노 타다노부의 표정에 담긴 사연을 가장 명확하게 규정한 작품일 것이다.


 


(글후기)


 


한국영상자료원의 '아사노 타다노부 특별전'은 11월 12일부터 시작해 11월 29일까지 총 23편의 영화를 상영합니다. <카페 뤼미에르> <녹차의 맛> <하나>와 같은 한국 관객에게 잘 알려진 작품은 물론이고 <지뢰를 밟으면 안녕> <청춘 딩가딩가 딩딩딩> <물장구치는 금붕어> 같은 한국에서 첫 선을 보이는 작품도 있습니다. <꿈의 미로> 역시 그런 작품인데요.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있게 본 작품입니다. 정말 아사노 타다노부가 아니라면 버스운전사 니이타카 역을 상상을 할 수가 없을 정도에요. 아사노 타다노부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필견의 작품입니다. <꿈의 미로>는 11월 28일 토요일 저녁 8시에 한 번의 상영이 더 있고요, 가는 방법은 요기(http://www.koreafilm.or.kr/main/introduce/contactus.asp )를 참조하세요.


 


 


2. <시간 여행자의 아내> 운명론을 전제하는 러브 스토리


 



 


(주의!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오드리 니페버거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목에서처럼 시간 여행을 다루지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과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SF가 아니다. 각본을 맡은 브루스 조엘 그린은 <사랑과 영혼>(1990)에서 보여줬던 장기를 되살려 판타지 요소 다분한 러브스토리로 이야기를 각색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는 헨리(에릭 바나)에게 생전 처음 보는 아가씨 클레어(레이첼 맥아덤즈)가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클레어가 여섯 살일 때 둘은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것. 헨리는 기억을 못하지만 그렇다고 클레어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시간 여행이 가능했던 헨리는 금세 어떻게 된 사연인지를 기억해내기 때문이다.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만 헨리의 시간 여행이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수시로 일어나는 까닭에 클레어와의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난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시간 여행은 주된 목적이 아니다.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물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헨리가 어떻게 시간 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같은 시공간 안에 동일인물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 등등 과학적 설명이 요구되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오로지 둘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는 <백 투 더 퓨처>(1985)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등 그간의 시간 여행 소재 장르에서 보았던 운명에 저항하는 인간의 불경한 호기심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굉장히 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 영화와 달리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정적인 운동이 극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는 눈에 뚜렷이 보이는 사건이 없다. 대개의 시간여행 영화들이 역사적 사실을 흐트러뜨린 후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사건을 다뤘다면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정해진 운명에 복종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소박한 감정을 우선한다. 그래서 클레어 앞에 나타난 시간 여행자 헨리는 미래의 사건을 알려주는 예지자라기보다는 앞으로 닥칠 위기의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돕는 감정 치료사에 더 가깝다.


 


헨리가 치료로 내세우는 건 다름 아닌 기다림. 기다림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기능한다. 안 그래도 클레어가 헨리에게 배우는 가장 중요한 감정의 원천은 기다림이다. 이미 여섯 살 때부터 헨리를 마음에 품은 클레어는 시간여행을 하는 그를 늘 기다려왔고 지금도 기다리며 미래에도 기다릴 것이다. 헨리의 죽음 이후 슬픔을 곱씹는 클레어를 위에서 내려 보는 카메라가 초침 소리에 맞춰 시계 방향으로 이동하는 촬영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는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운명론을 바탕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선천적 운명으로 결정되며 이를 결코 초월할 수 없다는 세계관을 기저에 깔고 있다. 오프닝에서 어린 헨리는 엄마의 차 사고를 목격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사건을 되돌리려는 헨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헨리 역시도 자신의 죽음을 아는 순간까지도 이를 피하려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 스스로 이를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줄 뿐.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하늘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부감 쇼트(high angle shot)를 중요하게 사용하는데 그러니까 인간의 삶은 결코 하늘의 시선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운명론은 헨리와 클레어의 사랑과 결합하면서 이상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를 낭만적인 기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헨리가 여섯 살의 클레어 앞에 나타나 운명적 사랑을 예고할 때부터, 비록 헨리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지만 가족 앞에 다시 나타나 영원한 사랑을 암시할 때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가 러브스토리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증명해 보인다. 언제가 만나게 될 사랑을 가슴에 품고 기다린다는 설렘은 얼마나 짜릿한가! 원작소설의 SF적 설정은 시간 여행만 제외하고 모두 지워버린 탓에 SF물로써는 낙제점에 가깝지만 러브스토리의 측면에서는 꽤나 볼만한 작품인 것이다.


 


(글후기)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생각보다 재미 있게 본 영화였습니다. 개봉 전 평단의 반응이 썩 좋지 못해 기대를 안 했는데 꽤나 흥미로운 점이 많았어요. 특히 멜로영화의 측면에서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사랑은 운명'이라는 전제 속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까닭에 여자 관객들이 더 좋아할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쓴 이가 그 유명한 <사랑과 영혼>을 썼던 브루스 조엘 그린이었던 이유가 있더군요. SF를 기대하고 보면 크게 실망할 작품이에요. 원작에서는 영화보다 시간 여행자의 이론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있지만 그게 꽤 정확한 편은 아니었거든요. 이를 영화로 옮겨오면서 브루스 조엘 그린이 시간을 여행하는 주인공의 설정 외에 SF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한 건 현명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사랑은 운명'이라니, 이것보다 연인을 설레게 만드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혹시 주말에 연인과 영화를 볼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추천해드립니다. 모르긴 몰라도 <2012>보다 훨 좋아요. 더 유익하기도 하고요. ^^ 다만 이번 주에는 보셔야 할 거에요. 극장에서 거의 내려가는 분위기거든요. ^^;


 


 


허기자(edwoo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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