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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23. 월요일


문화불패 병신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의 글 잘 보고 있다. 두가지 측면에 있어 반론을 하고자 한다. 주시자가 일본에서의 거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주시자는 일본과 한국을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경향의 글과 컨텐츠들이 웹상에서 많이 보인다. 나는 우선 이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일본과 한국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상당히 다른 나라다. 일본에서 보니까 이렀던데 한국은 왜 이래? 내지는 한국은 이런데 일본은 왜? 이런식의 접근방식은 쌍팔년도에는 매우 유효했을지 몰라도 요즘같은 세상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 만화가 윤서인의 일본박사 조이라는 만화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윤서인의 만화는 지극히 평면적이고도 1차원적인 비교로 일관하며 한국과 일본을 조명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은 선진, 한국은 후진이라는 발상을 지속적으로 남발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근거를 자신의 여행 경험에서 끄집어 내고 있다.




웹툰 작가 윤서인의 「내맘대로 느낀대로 일본이야기」


 


일본을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피상적으로 몇 번 왔다 갔다 해본 사람들은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를 칠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다년간 거주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만화가 얼마나 단순 무식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윤서인에게 백번 천번 설명하고 따져봐야 별 소용이 없다. 윤서인의 시각은 딱 여행객의 그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나는 일본에서 수년간 거주했던 주시자의 글에서도 그러한 답답함을 느낀다.


 


외모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이는 '내가 일본에서 보니까, 이렀던데 한국은 그런게 부족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쳐야된다.'는 식의 박정희식(?) 논리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화적 방정식들을 포함하고 있는 복잡한 수학 문제와도 같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접근논리에 대하여 NO라고 말하고 싶다. 글쓴이의 글을 조금 인용해보자.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국적을 떠나 '외모를 폄하하는 사회'와 '외모를 칭찬하는 사회'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 만큼,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문화는 충분히 정착될 수 있고 또 정착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취지에서 이 글을 쓴 거다.”


 


외모를 칭찬하자? 일본은 외모를 칭찬하는 사회이니 우리도 칭찬 좀 해보자? 일본이 외모를 칭찬을 한다고 해서 우리도 덩달아 칭찬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 같이 보이겠지만, 현재 한국의 현실을 보자. 거의 사회 전 부문에 있어 일본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


 


식민잔재니 일제군국주의의 영향이니 들먹거리지 않아도 현대 한국 사회만 따로 놓고 봐도 그런 꼬라지라는 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걸까?


 


'일본이 이러니까 우리도 이렇게 해보자. 일본은 이렇게 하는데 우리라고 못할게 뭐있어? 우리도 하자.' 등등의 거의 사회 관습처럼 굳어진 일본 흉내내기가 이제는 문화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에서 거주 좀 해 본 사람들이 각종 블로그, 기사들을 통해 꾸준히 이런 식의 발상들을 쏟아내고 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다른 나라다.


 


더욱이 한국과 일본의 현실은, 과거의 한국이 맨주먹으로 일본 흉내만 내던 옛날과도 많이 다르다. 한국은 문화적 토양과 그 기반이 상당히 부실한 편에 속하는 나라다. 여기에 더해 남을 배우자는 구호아래 무작정 배우기만 하다보니 ‘한국’ 자체는 사라지고 모호한 짬뽕 문화만이 득세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의 기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제어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어디는 이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자.'


 


나는 이러한 습관성 발상들부터 하나둘씩 각개격파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외모를 칭찬하자구?


 


외모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 왜 일본식 관습을 이식하고 주입해야 하는가? 왜 문제해결의 발전모델을 일본에서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끌어와야 하는가? 왜 일기장이 아닌 번듯한 언론매체의 기사를 통해 이런 글을 봐야하는 것인가?


 


한국인들이 극단적으로 외모를 중시하는 풍토속에서 살게 된것은, 우리 모두가 덜떨어진 칠득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네들이 그동안 살아온 환경과 토양이 그러했기에 부록처럼 따라온 일종의 부작용일 뿐이다. 이러한 부작용에 대한 해결책마저 일본에서 끌어오자는건가? 한국인들은 일본 흉내를 내지 않으면 스스로 자립할수 없는 그런 열등 민족이라는 말인가?


 


글쓴이가 그동안 작성한 기사를 놓고볼 때 글쓴이는 한국 특유의 막가파식 우익들에 대하여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비상식적인 인물들의 정치를 통해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꾸준히 자발적인 일본의 개 노릇을 하며 주인을 배우자며 목청높이 외쳐왔고 또 그것을 실행해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래서 한국이 잘 되었는가? 경제, 정치, 문화, 사회관습 등등 결국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장구한 세월의 식민지 역사만이 남았다.


 


전여옥의 베스트셀러 ‘일본은 없다’는 비판의 소지가 많은 책이기는 하나 적어도 한가지 명제만큼은 확실하게 제시했다. 일본은 없다. 아니, 이제는 일본은 없다라는 말 자체도 썩은 떡밥이다. 이제는 좀 없어도 되지 않는가? 더욱이 일본의 불안한 현재와 미래로 인해 ‘일본은 없다’라는 명제는 한국보다는 일본내에서 더욱 유효한 실제적 현실로 자리잡고 있다.


 



 


입체적이고도 정교한 통찰없는 “우리도 고치자”식의 구호는 이제 너무 낡았다. 쉰내가 진동을 한다.


 


두 번째 반론으로 들어가겠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혼네와 다테마에 대한 논의는 글쓴이의 표현대로 곰팡내가 나는 떡밥이기는 하다. 하지만 글쓴이가 일본인들의 혼네와 다테마에를 원글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건 좀 아니올시다' 라는 말을 하고 싶다. 원글을 인용해보자.


 


“우선,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것은 일본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직장생활 하면서 상사한테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하고 사는 사람 있나? 이등병때 동기끼리 선임병 험담 안해본 예비역 있나? 뒷담화라는 말이 왜 태어난 건데? 난 애시당초 일본의 국민성에 뒷담화를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는 말 자체를 믿지 않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남 앞에서 막말하는 것 보다야 낫다는 생각이 든다.”


 


글쓴이는 일본인들의 혼네와 다테마에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 보고 있다.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다 혼네와 다테마에를 지니고 있고, 이러한 이중적인 부분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할 속성이라 보고 있다는거다. 백프로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조금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하이 컨텍스트 컬처와 로우 컨텍스트 컬처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같은 하이 컨텍스트 컬처 국가로 분류된다.


 


하이 컨텍스트 컬처에 대하여 조금 지엽적으로 말해보자면 한국과 일본은 서양과는 달리 직설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적당히 둘러서 말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는 그런 사회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혼네와 다테마에는 이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글쓴이의 주장대로라면 혼네와 다테마에는 전세계 어느곳에서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 전체의 공통적 기질일 것이다.


 


일본인들의 혼네와 다테마에는 단순히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1차원적 언어적 습관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제1의 원리이자 규범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람들도 어차피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말이 다르지 않느냐? 는 식의 단순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대단히 고도화된 그들만의 수사법이자 생활양식이라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대단히 독특한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의 생활양식이 인류의 보편적인 그것과는 조금 혹은 많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나온 평가다.


 



armpit = 겨드랑이


 


일본인들의 훌륭하다 못해 지나치다 싶은 서비스, 극도로 발달한 겸양어와 겸손한 생활태도, 마치 개미와도 같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협력하는 국민성등등...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제1의 원리에서 발생된 그들만의 문화인 것이다. 서양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하이 컨텍스트 컬처로 묶여지는 여타의 아시아 국가에도 이런식의 문화와 사회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글을 조금 더 인용해보자.


 


“간단히 정리하면, 혼네-다테마에라는 건 그냥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이고, 경우에 따라선 그게 서로 상처받지 않는 예의바른 사회생활의 지름길이기도 하다. 괜히 일본인만 그런 것 처럼 도매금으로 넘기는건 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본다.”


 


미안하지만 이런식으로 혼네와 다테마에를 규정 짓는것은, 일본관련 글을 많이 쓰는 기자로서 직무유기에 가깝다. 글쓴이는 오랜시간 동안 한국과 일본 양국을 체험해 보았음에도 혼네와 다테마에의 본질에 대하여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잠시 말한것과 같이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인식 구조는, 엄청 못생긴 48.92점 짜리 여자를 두고 이쁘다고 말하는 식의 이중적인 언어습관, 혹은 고참 앞에서는 칭찬을 하다가도 고참이 없으면 뒷담화를 까는 식의 겉다르고 속다른 태도등으로는 절대로 설명될 수 없는 그들만의 특질이다. 단순한 이중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작게 보자면, 개개인의 관계를 원활하게 만드는 윤활유의 구실을 하고, 크게 보자면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구조, 생활습관등을 합치시켜나가는 법보다도 더욱 밀접한 생활, 문화, 관습 그 자체인 것이다.


 


혼네와 다테마에로 규정되는 인식구조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부작용도 존재한다. 더욱이 그 부작용이 사회적으로 확대되었을때에는 선과악, 그리고 법률과 도덕마저도 초월하는 무서운 권력, 두려운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말하는 권력과 빅브라더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천왕이나 총리와 같은 특정 지배층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또한 헌법이나 도덕과 같은 보편적인 법률체계나 가치관과도 다른 것이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바로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비정한 통제사회인 것이다. 일본은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일상생활에서조차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눈치를 봐야 하고, 한번 휩쓸리는 기운이 나타나면 모두가 침묵한 채 한배를 타야한다.


 


인간의 욕구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장려되고, 또 그것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화한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고도로 강제화 된 구속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이러한 왜곡된 사회구조를 선진화된(?) 사회로 착각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모두를 위한 보이지 않는 권력을 위하여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혼네와 다테마에는 이 모든 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무기요 관습이요 그네들의 문화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모든 것을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잘 해결하자.”는 식의 논리로 귀결되기도 한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역시 이러한 인식으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너희들을 통치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발전한 것 아니냐. 그러니까 이제 좀 그냥 넘어가자. 과거의 이야기를 자꾸 꺼내서 뭐해. 이젠 좀 잊자.”


 


이와같은 인식역시 1차원적인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성과는 그 궤를 달리 한다. 도덕적으로 따지자면 뭐가 옳고 그른지 알고 있지만, 그걸 따져서 뭐하냐는 거다. 침략은 잘못된 것이지만 은글슬쩍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자.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이제 다 지난 일인데 그걸 이제와서 왜 자꾸 들추냐는 말이다. 한 일본 우익 인사는 정신대 이야기를 자꾸 꺼내게 되면 정신대에 끌려갔던 한국 할머니들의 심정을 아프게 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그만 꺼내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런식의 태도가 바로 혼네와 다테마에의 진수인 것이다.


 


일본 사회가 타국에 비해 비교적 트러블이 적은 것 역시 이러한 인식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일본도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지만 정치인이 국민을 억압하고 고용자가 피고용자를 착취해도 ‘쓸데없는’ 분규는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꾸 따져서 뭐하냐. 그냥 내가 손해보고 말지.' 자꾸 들추기 보다는 그저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조용히 넘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서비스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사람이다. 서비스 업에 종사한다고 해서 손님에게 노예처럼 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서비스를 하는 사람은 개나 노예처럼 굴고 손님은 왕처럼 행세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서비스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도 이러한 모습을 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것일까?


이런식의 서비스 문화는 오직 일본에만 존재한다.


기분좋은 서비스와 굴종적이고 비굴한 비인간적인 서비스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구분되어야 한다.


 


일본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 밥도 먹지 못한다. 숨어서 먹어야 하는 것이다. 서비스업 종사자가 일을 함에 있어 인권은 철저히 무시된다. 앉아서 쉬어도 안되고 잡담을 하는 것 조차 금기시 된다. 끊임없이 일을 해야된다. 왜? 보이지않는 빅브라더가 서로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당 그래야만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기에 '왜?'라는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혼네를 죽이고 다테마에를 내세워 살아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지메를 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지메라는 단어는 왕따니 은따니 하는 단어의 뉘앙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보다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어법으로 이해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이지매는 늘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모두를 위하지 않는 사람은 이지매를 당해 마땅하다는 빅브라더의 엄명이 있기 때문이고, 모두를 위해서라면 개인은 억업되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외모를 칭찬하자? 왜 밑도 끝도 없이 칭찬해야 하는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도 일본인들처럼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꾹꾹 누르면서 다테마에를 내세워야 되는건가? 외모 지상주의는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처럼 외모를 칭찬하지 않아서 발생한 현상이 아니다. 내부에서 발생한 현상이라면 내부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왜 자꾸 그 해답을 일본에서 못끌어와서 안달인가?


 


서구인들이 일본인을 흉내내자며 그들의 생활방식을 모방하는가? 오리엔탈리즘으로 포장된 재팬컬처를 즐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의 문화를 즐길지언정 그들의 괴상한 인식구조까지 흉내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식 서비스를 재미있어 할지언정 그런식의 굴종적이고도 비굴하기까지한, 인권을 지닌 한 사람을 개처럼 만들어버리는 서비스를 직접 시행하지는 않는다. 그들 눈에는 그것들이 말그대로 특이하고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일본의 정신까지 흉내내자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과 일본은 얼핏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문화구조와 사회체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의 기질도 다르다. 지나치게 다르다. 머리와 몸에 맞지도 않는 것들을 왜 우리가 자꾸 흉내내야 하는가? 일본은 선이고 한국은 악인가? 개미처럼 일사불란한 사회는 선진사회이고 따로따로 놀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회는 후진사회인가?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을 본받자. 일본인들의 서비스를 따라하자. 쉰내나는 구호들이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우리가 그들과 같이 개미떼같은 질서의식을 지녀야 하는가? 왜 우리가 개처럼 행동하는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뜬금없이 사람들의 외모를 칭찬해야 하는가?


 


중국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차이나파워를 들이미는데에는 그들의 잠재력 높은 경제력이라는 커다란 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힘은 바로 ‘중국은 중국이다’라는 똥배짱에서 나온다. 중국은 중국인데 한국은 한국인가? 그러한 자신감이 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일본을 흉내내고 배워야 한다며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싸매는 나라에 그런 자긍심이 언제쯤 생길까?


 


글쓴이의 글을 두고 억울할 정도로 비판했는데, 솔직히 글쓴이의 심정은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그러나 억지춘향식으로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을 계몽시키려는 글쓴이의 발상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웠기에 몇 자 적어보았다.


 


문화불패 병신